수입차 병행수입 현황과 전망
지난해 6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김모씨는 B사의 수입차를 구입하기 위해 매장에 들렀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김씨가 “뒷좌석 AV시스템이 없는 차량이 필요하다”고 하자 영업사원은 “그런 차량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풀 옵션이 장착된 차량을 권하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사든지 말든지’ 하라는 태도에 화가 나 김씨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러다 김씨는 최근 병행수입 외제차 매장을 둘러보고는 속이 후련함을 느꼈다. 영업사원들의 태도가 기존 수입차 매장과는 180도 달랐기 때문이다. 외국 브랜드 국내 판매권자가 독점하다시피 해온 수입상품시장에 변화가 일고 있다. 이른바 병행수입이 늘면서부터다. 시장 관계자들은 최근 정부의 물가대책과 맞물려 활성화되기 시작한 병행수입이 새로운 유통채널로 자리 잡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상품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가격도 기존 수입제품과 비교해 훨씬 저렴해 국내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다. 이에 반해 기존 수입업자들은 지금까지 많은 비용을 들여 국내 수요기반을 넓혀 놓았는데 이제 와서 병행수입 업자들의 무임승차를 허용해 기득권이 침해 당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최근 활기를 띠고 있는 병행수입 시장의 현황을 살펴보고 문제점을 짚어봤다.
기존 수입차보다 10~15% 저렴…옵션 등 소비자 선택폭 넓어져
병행수입제란 같은 상품을 여러 업자가 제각기 다른 경로로 국내에 들여와 판매할 수 있는 제도로 원칙적으로는 상표의 출처표시와 품질보증 기능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하고 있다.
정부는 1995년 11월부터 수입공산품의 가격인하를 유도하기 위해 허용했으며 이후 국내 독점판매권자와 수입상표 전용 사용권자는 위조품에 대해서만 그 권리를 보호 받을 수 있게 했다.
또 국내외 상표권자가 동일인이거나 같은 계열사 또는 본·지사 관계, 독점 수입대리점 등 자본거래가 있는 특수 관계인 경우에는 상표권이 이미 알려진 것으로 인정해 다른 업자가 이 상품을 수입해 판매할 수 있다.
시장경쟁 환경 조성…유통마진 줄여 가격 내려
반면 수입상품의 독점 판매권자가 국내에서 독자적인 제조와 판매망을 갖고 있을 경우 기존 영업권 보호 차원에서 병행수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제도는 시장에 경쟁 환경을 조성해 수입상품의 과도한 유통마진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
병행수입제가 활성화되면서 가장 큰 변화를 맞은 곳은 고가의 수입자동차 시장이다. 2007년 11월 SK네트웍스의 수입차 병행수입이 도화선이 됐다.
당장 소비자들이 선택할 폭이 넓어지자 시장은 빠르게 변했다. 최근 B사의 수입 신차를 구입한 이영국씨는 예전에는 수입자동차에 장착된 불필요한 옵션기기까지 선택의 여지없이 사야 했지만 병행수입차는 옵션을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어 만족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병행수입 신차는 A/S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예상외로 기존 업체보다 서비스망이 잘 갖춰져 있고 복합정비 공장 신설, 추가 제휴 서비스도 곧 확충할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고 전했다.
중저가 외제상품들도 들어와…상품 다양해져
대다수 외제차 수입업체들은 지금까지 풀 옵션차량만을 들여와 판매했다. 하지만 SK네트웍스의 병행수입 후 도요타는 최근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 외에도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자사의 여러 차종을 선보이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말까지만해도 중저가 차량(프리우스, RAV4, 캠리)의 한국 출시계획이 없었는데 올 들어 판매량이 급격히 줄자 태도를 바꿨다. 수입차시장 관계자들은 "도요타는 자사 브랜드 중 수익성이 높은 최고가 차량만 수입해 팔았지만 병행수입제가 본격화되면서 최근 전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다른 변화는 가격의 하락이다. 병행수입 차 가격은 차종별로 기존 수입차와 비교해 약 10∼15% 싼 값(풀옵션 기준)에 공급되고 있다. 현재 2억660만원에 팔리는 벤츠 S550는 SK네트웍스에서 3000만원 싼 1억7650만원에, 1억8520만원 하는 BMW 750Li도 3170만원 싼 1억5350만원에 구입할 수 있다. 또한 도요타, 아우디, 크라이슬러 차량들도 수백만원에서 최대 수천만원까지 저렴하다.
도요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수입차시장은 이제 공급자 일변도에서 국내 소비자 수요에 맞춰 변하고 있다.
SK네트웍스 장세찬 과장은 "수입차 시장은 그 동안 독점판매권을 가진 사업자의 의도대로 가격과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정해 시장원리가 작용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본의 아니게 무한경쟁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이전에는 수입차 가격이 외국과 비교해 유난히 높은 데다 고객 불만도 많았다"면서 "최근 가격을 낮추고 서비스 만족도를 높이자 시장의 반응은 예상외로 뜨겁다"고 귀띔했다.

서비스 수준도 향상…시장 선순환 구조에 한몫
SK네트웍스가 당초 병행수입에 손을 댄 의도는 단순했다. SK에너지 주유소 운영사업 노하우를 바탕으로 고객들에게 또 다른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포트폴리오의 일환이었다.

그는 또 "이번 사업은 전국 600여개 스피드메이트의 첨단 정비시설과 도요타 렉서스의 7년 이상 독점판매에서 쌓은 노하우를 기반으로 고급차 정비기술 등을 두루 갖춘 만큼 프리미엄 차량에서 중저가에 이르는 다양한 차량을 고객에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아직은 사업초기로 전시 차종에 한계가 있지만 차츰 고객 취향에 맞게 늘려갈 계획이다.
한편으로 SK네트웍스의 병행수입은 연료, 정비, 고객서비스, 마케팅 등 고급차 관련 후방산업 비즈니스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역할도 하고 있다. 더불어 국내를 시발점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에 이와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을 수출하겠다는 글로벌 전략도 숨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병행수입은 시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 과장은 "그간 수입차 시장에 분명 거품이 있었다"며 "가격이나 서비스 차원에서 시장의 변화를 앞당겼다는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손정우 기자 jws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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