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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 전문배우 박용수, 트랜스젠더로 변신

입력 : 2013-01-10 18:32:47 수정 : 2013-01-10 18: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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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측해서 거절했는데… 놀다보니 잘 맞더군요”
3일 남산예술센터에서 연극 ‘사라지다’의 막이 오르자 객석이 술렁였다. 숨 죽인 공기 사이사이 탄식과 웃음이 튀어 올랐다. 중견 배우 박용수(57)가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앙 다물고 긴 속눈썹을 새침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가진 자, 배운 자 등 권력자 전문 배우에서 성전환자로 파격 변신한 배우 박용수.
김범준 기자
그는 이름보다 얼굴이 더 잘 알려진 배우, 육군 사단장, 부장 검사, 대기업 임원 등 가진 자나 배운 자 역할을 도맡아 해온 이른바 ‘꼰대’ 전문배우다. 키 171㎝에 80㎏이라는 넉넉한 풍채는 대한민국 50대 아저씨의 표준이다. 그런 그가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섰으니, 옆집 아저씨가 커밍아웃이라도 한 듯 충격을 받을밖에. 아침에 꼼꼼하게 면도한 자리에 수염이 뚫고 나왔는지 푸르스름한 얼굴의 그는 아내와 딸을 버리고 성전환자의 길을 택한 ‘말복’으로 분해 있었다.

연기인생 35년 만에 성전환자로 파격 변신한 배우 박용수를 10일 남산예술센터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고사했죠. 내가 봐도 망측할 것 같아서. 제가 우리나라 배우들 통틀어 얼굴 크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듭니다.”

대본을 쓴 이해성 작가는 처음부터 호리호리하고 예쁘장한 남자 배우를 찾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로 살을 빼지도, 간드러진 목소리를 꾸미지도 않았다. 눈썹을 붙이고 립스틱을 바르고, ‘이년들아∼’를 입에 달고 살지만 흥분하면 어느새 목소리가 굵어진다.

“배역을 소화하는 데 있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다이어트 같은 인위적인 노력은 하지 않았어요. 작가가 대본에 쓴 대로 편안하게 따라갈 뿐입니다. 다만, 여성이 되려는 노력은 보여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당부였어요.”

딸이 태어나던 날 드레스를 입고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 나타난 말복은 20년 만에 만난 부인에게 “어머, 이게 몇 년 만이니? 잘 지냈니? 어쩜 너는, 옛날 그대로다 얘”라고 말한다. 애교 있는 말투는 보기와 달리 평소 장난기와 어리광 많은 그의 말투가 근간이 됐다고 한다. 
“마음이 열려야 신나게 놀죠. 플레이(play) 아닙니까. 연극이 영어로 플레이더라고요. 그런데 난 왜 이렇게 진지하게만 하지? 그걸 연극한 지 15년 만에 깨달았습니다.”

주로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기득권층을 연기했지만 사실 그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도선사였던 부친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입학해 다른 친구들이 오페라 연습에 한창일 때 그는 연극에 미쳐 있었다. 서울대 총연극회에 들어간 그는 ‘연극은 민중운동과 괘를 같이해야한다’고 생각했고, 데모대에 몸을 던졌다. 서른여덟, 뒤늦게 한양대에서 연극 석사과정을 밟다 실기를 배우고 싶어 학부 수업을 청강하면서 그의 연기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최형인 교수님이 나를 앞에 세워놓고 한참 어린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호흡이 안 되는 잘못된 배우의 전형을 보면서 수업을 하니 얼마나 복 받은 겁니까?’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달았죠.”

‘작가의 의도가 속으로 들어와 내 경험을 한 번 관통하고 나와야 살아 있는 연기가 된다’라는 걸 터득하면서 그는 40년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남들이 그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듯 자신도 점잖고 진지한 줄로만 알았지만, 아니었다.

“연기 훈련을 통해 호흡이 편해지면서 제 속에 오욕칠정이 다 있다는 걸 알았죠. 어리광, 장난기, 질투심. 그때부터 제 자신이 재밌어지더라고요.”

그의 깨달음은 예리한 연출가들도 읽었던 모양이다. 양정웅 연출은 그에게 ‘돈키호테’(2011년)의 애교 있는 충신 산초 역을 줬고, 임영웅 연출은 ‘고도를 기다리며’(2002년)에서 징징대는 캐릭터인 에스트라공 역을 맡겼다. 칭얼의 극치를 보여주며 ‘앙증맞다’는 소리를 물리도록 들었다고 그는 자평한다.

그는 지난해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아워 타운’ 등 5편의 연극을 했다. 젊어서도 이렇게 쉬지 않고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다만, TV나 영화에서는 장난기 많은 친근한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장자연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노리개’(2월 개봉)에서도 그는 여자 연예인을 성노리개로 삼은 신문사 사장을 변호하는 검사장 출신 변호사로 나온다.

“얼마 전 게이 역할이 들어왔는데 안 한다고 했어요. 성전환자에 이어서 하는 것이 좀 그래서. 귀여운 남자 연기가 제일 하고 싶어요. 늘 힘 있고 자신만만한 역할만 했으니 이제는 고생도 하고, 힘들면 비겁해지기도 하고 마누라한테 칭얼대기도 하는 친근한 아버지, 삶의 애환이 있는 서민적인 역할요. 60대가 제 전성기가 될 것 같은데 그때쯤이면 할 수 있겠죠?”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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