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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1> 베니스

입력 : 2013-01-19 14:58:31 수정 : 2013-01-19 14:5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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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섬들을 정교하게 꿰맨 천 조각 같은 물 위의 도시 #감각의 도시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120여개의 섬을 400여개의 다리로 연결해 놓은 물 위의 도시다.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촘촘하게 붙어 있는 작은 섬들이 정교하게 꿰맨 천 조각 같다. 베니스(Venice)는 영어식 발음이고 본래의 이탈리아 이름인 베네치아(Venecia)로 부르는 게 더 좋겠지만, 나는 ‘베니스’가 더 입에 붙는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알고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안다. 그리고 비둘기로 가득한 산 마르코 광장을 알고 두칼레 궁전을 알고 있지만, 정작 베니스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서울 한복판에 실핏줄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골목처럼 가늘고 긴 물길이 집과 집 사이에 흐르고, 가로줄 무늬 티셔츠를 입은 사공이 흥겹게 곤돌라의 모서리에 서서 노를 젓고, 그 위로 달이 뜨는 베니스의 모습을 가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

카프카는 미국에 가보지 못했으나 지도를 보면서 ‘아메리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카프카의 머릿속에 들어있고 글로 풀어낸 아메리카는 실존하는 아메리카와 다른 가공의 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상 속의 여행이 오히려 가서 본 화려한 겉모습에 미혹되어 그 안에 깊숙이 숨겨진 진실을 읽어내지 못하는 ‘얼치기’ 관광보다 훨씬 핵심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가보지 못한 산 마르코 광장을 거닐고,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를 건너고, 곤돌라에 앉은 채 베니스의 비좁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닌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토마스 만이 1912년에 썼던 무척 모호한 소설이다.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 머물 당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구스타프 말러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를 기리기 위해 소설 주인공에게 말러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71년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이 말러의 음악을 배경으로 넣어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베니스와 죽음. 나는 그 제목이 너무 멋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인 특유의 아무런 감미료나 당분도 없는 팍팍한 글에 읽다가 지치고 또 지친 채 깜빡깜빡 졸면서 읽어 내려갔는데, 마침내 다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 밀려오는 감동의 파도가 넘실댔다. 대체 그에게 베니스는 무슨 의미였을까.

“공화국이 제공하는 환상적인 건축물의 눈부신 구조를 보게 되었다. 궁전의 경쾌한 웅장함, 탄식의 다리, 사자상과 그리스도상을 묘사한 물가의 기둥들, 동화에나 나옴직한 신전의 화려하게 튀어나온 측면, 성문으로 나있는 길과 거대한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인 음악가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가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우연히 베니스를 선택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며 받는 인상이다.

“베니스란 이런 곳이었다. 아양을 떠는 수상쩍은 미녀 같은 이 도시는 어떻게 보면 동화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나그네를 옭아매는 덫 같기도 했다. 이 도시의 썩기 쉬운 공기를 맡으며 한때 향락에 빠져 예술이 번성했고, 이 도시는 어르며 감미롭게 자장가를 불러 잠재우는 음을 음악가에게 제공해 주었다.”

감각을 인정하지 않았던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에게 베니스는 수상쩍은 도시이고, 감각으로 가득한 도시이다. 그는 도시에 들어서면서 그를 속이려고 하고 갑자기 무언가를 덮어씌우려고 하는 음모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냉소적인 자세로 그 도시에 들어앉는다. 그리고 그는 그 도시가 되어버린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베니스의 해변에서 그는 죽는다.

베니스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전경.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페기 구겐하임은 평생에 걸쳐 모은 미술작품을 모두 이 미술관에 기증했다.
#예술의 도시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자로 명성을 떨치며 20세기 미술계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중 하나인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은 베니스에서 죽었다. 유럽과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베니스에 정착한 지 30여년 만이었다.

페기가 살았던 저택은 18세기 중반의 건축가 로렌초 보스체티가 설계한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Palazzo Venier dei Leoni)’다. 지금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 되었다. 사실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은 현대미술의 주요 작품을 아우르는 대단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박물관 건물로 유명하다. 미국을 대표하는 두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프랭크 게리가 각각 설계한 뉴욕, 그리고 스페인 빌바오의 건축물이 그것이다. 반면 베니스의 구겐하임은 건축보다는 페기의 이름이 남긴 의미가 더 크다.

유복한 유대인 집안 출신인 페기는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죽은 벤자민 구겐하임의 딸이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자인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다. 그는 복잡한 집안내력과 유산으로 물려받은 부를 지닌 채 23살 때 프랑스 파리로 가서 마르셀 뒤샹, 만 레이, 콘스탄틴 브랑쿠시, 막스 에른스트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현대미술에 눈을 떴다. 그는 한때 사무엘 베케트와도 사랑을 나눴으며, 에른스트의 아내였고, 또다른 예술가들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후원자였다. 전시를 이용해 작가들로부터 그림을 헐값에 사들이기도 하고 애정편력으로 수없이 구설에 올랐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고 유럽의 초현실주의와 미국 추상표현주의 미술이 만나는 지점에 그가 있었다.

페기는 1938∼39년 영국 런던에서 ‘구겐하임 죈느(Guggenheim Jeune)’ 화랑을, 1943∼47년 뉴욕에서 ‘금세기미술관(Art of This Century Gallery)’을 각각 운영하며 유럽 전위작가들을 후원하고 전시회를 열었다. 페기의 갤러리에서 아르프, 브라크, 디 키리코, 달리, 막스 에른스트, 자코메티, 칸딘스키, 미로, 피카소, 탕기 등 유럽의 전위적 작가들이 전시를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렉산더 칼더,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등도 페기 구겐하임의 지원을 통해 세상에 등장했다. 1947년 에른스트와의 이혼한 후 뉴욕을 떠나 베니스로 간 페기는 자신의 컬렉션으로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회를 열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하루에 한 점’이라고 할 정도로 열심히 수집한 미술작품들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모두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했다.

공교롭게도 ‘베니스의 상인’에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채무자에게 1파운드의 살을 요구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도 유대인이다. 모두들 알고 있는 대로 “살은 주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판결로 인해 샤일록은 재산을 잃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셰익스피어의 낭만적 희극작품으로 기억되는 이야기에 담긴 유대인에 대한 오랜 편견과 증오는 그만큼 부와 강렬한 종교적 신념이 유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말해준다.

작품이 발표된 17세기 초는 베니스가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지중해 및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한창 번성한 시대였고 그 중심에 유대인 상인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은 늘 경원시되는 존재였다. 중세 이후 기독교인과 분리되어 살도록 마련된 별도의 유대인 거주지역을 가리키는 ‘게토(ghetto)’라는 말도 1516년 베니스에서 처음 쓰이며 점차 보편화됐다.

한편에서는 신분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쓴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자유를 부르짖던 카사노바가 감옥에 갇혀 탄식하던 도시 베니스. 갯벌의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를 부유했던 부와 향락과 예술….

2012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일본관의 전시실 모습. 일본 건축가들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모두의 집’ 프로젝트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건축의 도시

베니스의 중심에 있는 산 마르코 성당은 9세기에 두 명의 상인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성 마르코의 유골을 모시면서 세워진 납골당에서 비롯했다. 그 후 성 마르코는 베니스의 수호자가 되었다. 11세기에 산 마르코 성당이 재건되면서부터 동방을 침략할 때 가져온 그리스 시대의 조각 등 여러 장식품들이 성당에 가득하다.

산 마르코 성당의 장식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정면에 있는 황금사자상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배우 강수연의 여우주연상 수상,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 등으로 기억되는 베니스 영화제는 1932년 시작된 가장 오래된 국제영화제인데, 이 영화제에서 주는 최고의 상이 황금사자상이다.

세계 3대 비엔날레 중 하나이자 미술 및 건축계에서 가장 큰 권위를 자랑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주는 가장 큰 상도 황금사자상이다. 1895년 시작된 베니스 비엔날레는 자르디니 공원과 아르세날레에서 열린다. 미술에서 점점 분야가 확장되어 홀수 해에는 미술전, 짝수 해에는 건축전이 각각 열린다. 한국이 참가한 것은 1986년부터다. 해마다 50개국 이상의 나라가 참여하지만 독립된 개별 국가관을 가진 나라는 25개뿐인데, 그중 마지막으로 지어진 것이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한 한국관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건축전은 세계 건축계의 주목을 받는 가장 큰 행사다. 국가별 전시가 이루어지는 국가관과 저명한 건축가들이 경합하는 주제관으로 구분되며, 그해의 주제가 정해지면 각 나라에서 커미셔너와 참여 건축가들이 건축적·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전시를 기획하여 참여한다.

올해의 비엔날레는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예술감독을 맡아 ‘공통 기반(Common Ground)’이라는 주제로 8월29일부터 11월25일까지 열린다. 한국은 김병윤 커미셔너가 기획한 ‘건축을 걷다(Walk in Architecture)’라는 주제로 8개 팀이 참가했다. 대형 건축물 위주의 작업을 하는 대규모 건축사무소 임원들이 한국 대표로 선발돼 대회 개막 전부터 논란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참여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전시회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한국관 전시는 주로 소나무와 한지로 된 프레임에 모니터를 설치해 모형이나 패널 없이 참여작가의 작업을 소개하는 영상으로 구성되었는데, QR코드를 설치해 아이패드를 이용하면 각 건물을 볼 수 있게 한 러시아관이나 소리를 통해 공간을 감상하게 한 폴란드관 등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다른 전시에 비해 별다른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예술의 화려한 잔치 끝에 건축가 도요 이토가 커미셔너를 맡은 일본관이 국가관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피해를 입은 지역의 부흥을 위해 건축가들이 참여한 ‘모두의 집(Home-for-All)’ 프로젝트가 전시 내용이었다. ‘여기서 건축은 가능한가(Architecture, Possible here?)’라는 주제 아래 나무 등 가장 자연적인 재료와 형태로 꾸몄다.

토마스 만이 ‘아양떠는 수상쩍은 미녀’에 비유한 매혹적인 도시 베니스에서는 여전히 예술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 예술은 단순한 감각의 전시가 아니라 인류가 같이 풀어내야 할 문제들과 같이 누려야 할 문화에 대해 고민하는 그런 예술의 향연이었다. 예술이란 단순히 개인적 취향의 문제 혹은 호사가의 과시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의 자산이다. 베니스는 그런 자산을 보여주는 매혹적인 도시다.

임형남, 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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