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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0> 별서(別墅)

입력 : 2012-08-21 21:07:21 수정 : 2012-08-21 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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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세상 시름 떨쳐내는 곳 #아름다운 풍경과 건축과 문학적 향기가 담긴 담양의 별서들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서 담양 방향, 무등산 북쪽으로 가다 보면 광주댐이 나온다. 그 주변에 다다르면 솜을 푸짐하게 넣어 만든 비단이불처럼 풍광이 부드럽고 푸근하고 아름다워지는 지점에서 군데군데 숨어 있는 보물들을 보게 된다. 마치 경주의 들녘을 무심하게 거닐다가 툭툭 튀어나오는 보물들을 만나는 것처럼…. 명옥헌·송강정·면앙정·취가정·소쇄원·환벽당 등 광주와 담양 일대에 박혀 있는 별서(別墅)들은 한 군데도 그냥 스쳐갈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과, 건축과, 거기에 더해 문학적인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곳들이다.

조선시대 중종 대에 양산보가 일찌감치 정치의 뜻을 꺾고 고향으로 내려와 평생을 걸쳐 조성한 별서 원림 소쇄원.
별서는 살림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어 놓은 작은 별채를 의미한다. 별장과 달리 본가와의 독립성이 강하지 않고, 그저 쉬는 장소만이 아니라 살림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농사를 짓거나 실질적인 생산활동을 하는 곳이며, 책을 읽거나 창작을 하는 곳으로도 그 의미가 확장된다.

담양 근처의 별서들은 때론 언덕 위에 한 채만 덩그러니 있는 경우도 있고, 담을 두르고 살림집처럼 여러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모두 지은 사람의 취지와 성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호남가단(湖南歌壇)’이라 불리는 일군의 독특한 문학인들이 나왔고, 조선 성리학의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았고,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의병이 나왔다.

그중에서 ‘세속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조선시대 중종 대에 양산보가 일찌감치 정치의 뜻을 꺾고 고향으로 내려와 평생을 걸쳐 조성한 별서 원림으로, 몇백 년 동안 자손들이 잘 지켜 내려온 곳이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얼마나 좋은 곳인지 보겠다는 마음에 무턱대고 소쇄원을 찾아갔었다. 지금처럼 GPS망과 위성정보가 세계 구석구석 쥐구멍까지 찾아주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광주터미널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가야 했다. 버스 기사에게 위치를 물어보자, 식영정은 알아도 소쇄원은 잘 모르겠다며 아마도 근처일 것이라며 나를 식영정 앞에 내려줬다.

세상의 녹색은 모두 몸을 숨긴 겨울의 한가운데, 사위는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무채색이 질펀하게 뿌려져 있었다. 눈앞에는 너른 들녘과 마른 가지들이 부숭부숭 얹혀 있는 야트막한 동산들이 수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은 하나 없었고 바람만 세차게 불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바로 앞에 조그만 안내판이 하나 있었다. 그 안내판에 식영정은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을 지은 장소라고 쓰여 있었다.

정철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관동별곡’을 통해 알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일일연속극 중에 ‘사미인곡’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 주제곡이 정철의 사미인곡을 가사로 송창식이 곡을 입혀 부른 노래였다. 사실 내용은 정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효종과 송시열 등이 나오는, 청나라에 대항하는 북벌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이 몸 삼기실제 임을 조차 삼기시니…” 하는 아름다운 가사와 비장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되어 곧잘 그 노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곤 했었다.

사미인곡·관동별곡뿐 아니라 대부분의 송강가사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소리끼리의 아름다운 조화와 생동감 있는 운율이, 머리와 마음으로 받아들여 감상을 하기도 전에 벌써 입안에서 굴려지는 맛으로 큰 감흥을 준다. 

그림자가 쉬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담양의 별서 ‘식영정’.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림자를 쉬게 하는 곳, 식영정

정철은 이곳 담양 창평의 너른 들에서 키워졌다. 원래 이곳 출신은 아니고, 1536년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무척 유복한 명문가로, 그의 누이가 인종의 후궁이어서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철이 10살이 되던 해에 일어난 을사사화로 집안이 몰락하여, 그는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세월이 지나 16세에 아버지는 사면되었으나 서울로 가지 않고, 담양 고서의 당지산 아래에서 머물게 된다. 그해 여름에 순천에 있는 형 정소를 만나러 길을 가다, 날이 더워서 지금의 식영정 앞 자미탄에서 목욕을 한다.

그때 식영정 건너편에는 환벽당이라는 별서가 있었다. 그곳에는 나주목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세월을 보내고 있던 사촌(沙村) 김윤제가 기거하고 있었다. 김윤제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서 환벽당 아래 용소에서 용이 노니는 것을 본다. 잠에서 깨어난 김윤제는 꿈이 묘하다며 사람을 시켜 혹시 용소에 누가 있는지 보고 오라고 한다. 그렇게 정철은 운명적으로 김윤제를 만나게 되고, 김윤제는 한눈에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그를 맞아들여 공부를 시킨다.

그런데 그 공부라는 것이 정말로 거창하고 대단한 공부였다. 그 당시 창평 주변에는 내로라하는 학자와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 면면을 보면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면앙정 송순 등 문자 그대로 당시의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와 문인들이었다. 정철은 그들에게 시를 배우고 학문을 배운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그는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화려하게 서울에 돌아오게 된다. 정철이 급제했을 때 어린 시절 친구처럼 지냈던 당시의 왕 명종이 축하연을 베풀어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정철의 여러 가지 극적인 정치적 편력과 고단한 인생사는 조선 중기 붕당이 형성되는 시기와 맞물려 도저히 그의 문학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엇던 디날 손이 성산의 머물면서/ 하서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 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엇디 한 강산을 가디록 나이너겨/ 적막 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

이렇게 시작되는 성산별곡은 정철이 25세 때 식영정에 머물며 지은 것으로, 식영정 주인이며 스승인 임억령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식영정은 정면 두 칸에 측면 두 칸의 아주 작은 집이다. 자미탄이 훤히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에 있지만, 밖에서는 그 집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경치 좋은 언덕에 세운 정자들이 근방 어디에서건 잘 보이는 곳에 당당하게 세워져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입지다. 그렇다고 집이 아주 깊이 박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절묘하게 한 발 물러섬으로써, 밖에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정자로서 얻어야 하는 차경은 충분히 얻으며 겸손하게 자리할 수 있었다.

그 집에 가기 위해서는 긴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런데 난간도 없는 그 계단은 뱀처럼 구불구불해서, 급한 경사를 완만하게 해주지만 절대로 빠르게 오르내릴 수 없게 되어 있다. 집의 앉은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무척 길고 좁은 그 계단은, 그 끝이 어디로 가는지 잘 보여주지 않는다.

식영정은 서하 김성원이 그의 장인이며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집이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직역을 하면 ‘그림자가 쉬는 정자’라는 뜻이다. 그 이름의 의미는 임억령이 지은 ‘식영정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집의 이름을 청하는 김성원에게 임억령은 장자의 ‘제물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준다.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해 아래를 달리는데, 그가 그림자를 없애려고 급하게 달리면 달릴수록 그림자가 끝내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나무 그늘 아래로 나아감에 미처 그림자가 홀연 보이지 않더라. (중략)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조물주와 더불어 무리가 되어서 궁벽한 시골의 들판에서 노닐 적에 거꾸로 비친 그림자도 없어질 것이며, 사람이 보고도 지적할 수 없을 것이니 이름을 ‘식영(息影)’이라 함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그가 이야기하는 그림자는 사람을 얽어매는 욕망이며 현상이다. 식영정은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그림자를 끊겠다는 그런 의미의 집이다. 식영정과 같이, 별서는 ‘홍진에 묻힌’ 사람들이 현실과 잠시 거리를 두며, 우리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잠시 거두는 곳이다. 

살구나무 그림자 아래 쉬면서 서쪽으로 걸어가는 무등산의 여덟 연봉을 바라보는 화암동 주택.
박영채 제공
#살구나무 그림자 아래서 무등산을 바라보다

나는 소쇄원을 가면서 몇 번 무등산을 먼발치에서 보곤 했는데, 식영정과 소쇄원이 멀지 않은 무등산 북쪽, 바위가 여기저기 꽃처럼 피어나서인지 화암동이라 불리는 동네가 있다. 그곳에 어떤 화가가 젊은 시절 땅을 구하고, 틈나는 대로 와서 바위에 올라 서쪽으로 마치 줄을 지어 도란도란 걸어가고 있는 듯한 여덟 개의 연봉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흐르면서 논이었던 땅과 오래된 농가 위로 두터운 시간이 쌓이고, 100여년 된 살구나무만 건강한 그림자를 떨구고 있었다.

화가는 산을 벗하여 그림을 그리며 휴식을 취하는 집을 하나 짓고자 했다. 땅에 넓게 펼쳐지는 큰집이 아니라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 원래 있던 바위 중 하나처럼 편안히 앉은 작은 집이면 족했다. 담양 일대에 펼쳐진 별서의 전통이 무등산 한복판으로 날아든 셈이다. 별서들이 대부분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지어졌듯이, 이 집도 광주 시내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고개만 하나 넘으면 거짓말처럼 무등산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무등산은 돌이 많아 신령스런 돌이라는 의미의 ‘무돌산’ 등으로 불리던 것이, 한자와 불교사상으로 통해 ‘무등(無等)’이 되었다고 한다. 서쪽 양지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 풍경이 이름처럼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무등산은 묘하게 편안한 산이다. 지리산 같기도 한데 질척하지 않고 점잖은 것 같은데 서울 북한산처럼 강퍅하지도 않고, 어디 아픈 데를 따스한 입김으로 불어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등산은 단순히 광주라는 도시를 둘러싼 자연이라는 것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땅의 인상은 예전에 지리산 한복판 실상사에 갔을 때 받았던 한없이 안온한 느낌과 비슷하다. 땅의 중심에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고, 주변을 둘러보면 사방의 산들이 나란히 어깨를 포개고 서 있다. 그리고 약간의 흙과 잡초 아래는 온통 바위투성이로, 번들거리는 바위가 아주 느긋하게 누워 있다. 무등산 특유의 각이 지고 색이 검은 바위들은 들고 나는 사람들을 짐짓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양 옆으로 물이 가늘게 흐르다가 만나고 있었고, 너른 벌판에는 전장의 용사들처럼 웅성거리고 있는 무수한 백일홍들이 가득했다.

주인에게 이 집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은 서쪽에서 걸어가는 산을 바라보고, 놀러 와서 즐기게 될 가족과 오랫동안 이 땅을 지키고 있는 훤칠한 살구나무를 보는 것,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 겸 거실과 침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외부 데크와 이어지는 주방으로 이루어진 아주 간단한 평면을 그대로 삼차원으로 일으켜 세웠다. 바위처럼 단단한 노출콘크리트 벽은 다시 서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가벽으로 연결되어, 면에서 선으로 치환되는 입체적인 변화가 담긴다. 단순함 속에 들어가고 들어가도 끊이지 않는 흐름이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마당에 솟아오른 바위는 아래에 감추어진 거대한 암석의 꼬리 부분이었다. 그래서 집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되었고, 듬성듬성 땅에 버티고 선 돌들은 무등산의 일부가 된 집을 환영하며 팔을 벌리고 있다. 집은 그 단단한 땅에 정박하듯, 혹은 원래 있었던 바위처럼 고요히 정좌하고, 주인은 길게 늘어지는 서쪽의 살구나무 그림자 속에서 쉬게 되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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