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59> 마스터(Master)

입력 : 2013-01-24 18:22:09 수정 : 2013-01-24 18:22:0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기완성 하고자 노력 # 자신의 일에 일생을 걸다

“줄 끝이 멀리 멀리 보여서는 더욱 안 되지만 가깝고 넓어 보여서도 안 되는 법이다. 그 줄이라는 것이 눈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고, 줄에만 올라서면 거기만의 자유로운 세상이 있어야 하는 게야. 제일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 줄에서는 눈이 없어야 하고 귀가 열리지 않아야 하고 생각이 땅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단 말이다.”

이청준의 소설에는 어떤 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서편제’는 최고의 소리를 내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1966년 사상계를 통해 발표했던 ‘줄’에는 목숨을 걸고 줄을 타는 사람들이 나온다.

서커스에서 줄 타는 광대인 아버지는 학교에 들어갔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세상에는 줄광대가 밟을 만한 땅이 없지”라고 혼잣말을 하고 아들에게 줄타기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땅에 선을 그어놓고 그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시작으로, 각목 위를 걷게 하고 각목이 줄로 바뀐다. 줄의 높이를 점점 높여가며 아들을 수련시켜 기량이 거의 아버지와 맞먹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 년 동안 수련만 시킬 뿐 아들을 무대에 오르게 하지 않는다.

답답해진 아들이 줄에 오르게 해 달라고 이야기하자 아버지는 묻는다.

“그래, 그럼 줄을 탈 때 끝이 가까워 보이느냐?” “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가는 줄이 넓어 보이겠구나….” “그 위에서 뛰어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 되겠다!”

또 그렇게 연습만 하다가 2년이 흐르고, 아들은 다시 무대에 오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어때 줄이 넓어 보이더냐?” “줄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 줄을 타고 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단 말이냐?” “예.”

“귀도 들리지 않고?” “예.”

“흠, 아직도 객기가 있어….”

그러고 다시 일 년이 지났을 때 줄을 타고 있는 아들에게 갑자기 아버지가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지만 아들은 듣지 못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줄 위의 세상을 이야기하며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한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기량뿐이 아니라 줄 위라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경지에 오를 때까지 지켜보며 훈련시킨 것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전념하거나 한 가지 기술을 전공하여 그 일에 정통하려고 하는 철저한 직업 정신을 ‘장인정신’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이 자칫 사회와는 담을 쌓거나 사회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자기완성만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일 특히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기완성을 하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구도자의 자세와도 통하는 점이 있다. 극한의 정신과 초월을 통해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의 욕심에서 벗어나려는 구도자와는 달리, 어떤 구체적인 직능을 통해 그 가장 중심에 있는 근본적인 정신에 도달하려는 장인정신은 현실에 기반을 둔 구도라 할 수 있다. 장인정신을 통해 수련하여 그 분야의 최고가 된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마스터(Master)’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에 의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의 1위로 선정된 그룹 들국화의 1985년 첫 번째 앨범.
# 전인권, 경계를 넘어 소리를 얻다

전문가들에 의해 선정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의 1위는 1985년에 나온 그룹 들국화의 첫 번째 앨범이라고 한다. 들국화는 세련된 음악과 뛰어난 보컬, 그리고 전원이 작곡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무척 실력 있는 밴드였었는데,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하고 말았다.

들국화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1980년대 중반, 이태원에 있는 ‘라이브’라는 음악클럽에서 그들이 공연을 한다고 들었다. 당시 여기저기에서 그들의 연주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피어올랐는데, 당시 나는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이 한참을 웅성거리다가 나를 빼고 어느 날 밤에 그곳을 다녀오더니, 그 이후로 한참 동안 옆에서 들국화의 노래만 틀어댔다. 메인 보컬을 담당하고 있던 전인권의 내지르는 독특한 음색으로 부르는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뿐 아니라 ‘매일 그대와’ 같이 나른한 분위기의 노래 등 무척 다양한 음악들을, 나는 본의 아니게 거의 외울 정도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술자리 등에서 소리를 꽥꽥 지르며 전인권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노래는 소음과 음악의 묘한 경계에 놓여 있어서 전인권이 아니면 어느 누가 불러도 고성방가에 지나지 않았다. 참 시끄러웠던 청춘의 기억들이다.

이후 그들의 행보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앨범을 몇 개 내고 멤버들이 흩어졌다고 했다. 그들의 음악이 들리는 빈도가 작아지고 점점 추억의 명곡으로 자리 잡고 있을 즈음이던 1993년이던가, 가끔 산보를 나가던 몽촌토성의 나지막하고 만만한 잔디 언덕을 넘어서 걸어 내려가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날 너른 터에서 무슨 공연이 있는지 사람들 모여들기 시작하고 무대가 뚝딱거리며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진용을 갖추기 전의 무대 위에서는 가수들이 목을 풀고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혹시 아는 가수나 내가 좋아하는 가수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몇 명의 가수가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전인권과 강산에가 올라와서 노래를 맞추기 시작했다.

둘이서 같이 부르던 그 노래는 그 당시 막 뜨고 있던 강산에의 ‘라구요’라는 곡이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을 볼 수는∼” 하며 강산에가 노래를 시작하다가, “꼭 한 번만이라도∼” 하며 음이 무척 높이 올라가는 마지막 부분을 전인권이 마무리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수백 개로 갈라지며 나오고 있었다. 내가 직접 그를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고, 당연히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레코드나 늘어진 테이프에서 들었던 목소리보다도 훨씬 거칠었다. 심지어 도저히 노래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의 탁성이었는데도 묘한 전율이 왔고 ‘아∼ 참 좋은 가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언뜻언뜻 듣기로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더욱 독특한 자기만의 음색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또한 그의 행적도 세상사의 파도 위로 거침없이 내달렸다. 지난 몇 년간은 가끔 지나가며 들리던 소식조차 끊어졌지만, 가끔 음악파일을 열어서 그의 거칠다 못해 습기를 가득 머금은 신문지처럼 꾸깃꾸깃한 목소리를 간혹 듣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들국화가 다시 모여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다. 지난 7월13일 금요일 저녁 비가 오락가락하는 장마의 한가운데를 뚫고 공연장으로 갔다. 불이 켜지자, 머리가 허옇게 센 전인권이 사자갈기 같이 마구 뻗쳐나가던 머리를 차분히 묶고 의자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예전에 불렀던 노래들…. 자주 들었던 노래들이었다. 그 막힌 듯 쭈글거리고 흐트러진 목소리가 높은 음과 낮은 음의 경계를 마음껏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이상한 감흥을 주었고, 한없이 아득했다. 그날 그는 형해만 남긴 채, 필요 없는 모든 장식이나 기름 등을 걷어낸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가수가 저렇게 완성이 되는구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악기 같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이스 칸의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고대 유적의 모습처럼 건축의 근원에 다가가는 듯 장엄하고 엄숙하다.
# 루이스 칸, 건축의 본질에 한없이 다가서다

건축은 음악이나 미술 등 다른 분야의 예술처럼 10대나 20대에 일찌감치 재능을 드러내기 힘든 분야이지만, 루이스 칸(Louis I. Kahn)처럼 남들이 은퇴하기 시작하는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축가도 아주 드문 경우이다. 1901년에 태어난 칸은 오십이 훨씬 넘은 나이에 건축의 꽃을 피웠다.

에스토니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난한 유대인 가정 출신이며, 작은 키의 볼품없는 외모에다 난로 불꽃의 푸른빛이 아름다워 다가갔다가 입은 화상 자국이 평생 얼굴에 남아 있었던 칸. 그런데도 모두가 그의 작품 중 걸작이 아닌 것이 없노라 동의하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 사람이 바로 칸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루이스 칸의 건축을 좋아한다. 그의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감정적인 푯말이 서지 않고, 그저 건축의 어떤 가장 중요한 곳을 가장 근원적인 어떤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두운 입구를 거쳐서 밝은 곳으로 나가는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Phillips Exeter Academy)의 도서관은 무지는 암흑과 같고, 지식은 그 암흑을 밝히는 빛과 같은 것이라는 명쾌한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마치 고대의 유적에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의 건축은 건축의 본질에 깊이 들어가고자 했던 그의 태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칸의 건축은 당시 세계를 뒤흔들던 이른바 국제주의 양식과는 한 걸음 떨어져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들이 코르뷔지안 스타일로 불리는 유사한 건축을 하는 데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봉장이었던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칸의 건축을 배운 제자들 중 칸을 흉내 내는 건축가는 없다. 그가 건축에 담은 것은 어떤 이론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기교가 아닌 건축의 재료를 비롯한 사물의 존재 의지였기 때문이다. 바흐의 음악처럼 화려하지만 무겁고도 장엄함이 그의 건축에 있다.

얼굴의 상처를 결코 감추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그는 건축에 있어서도 단점을 감추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고, 과정을 중시했다. 그는 콘크리트를 굳히는 과정에서 생긴 거푸집 자국, 조적의 흔적 같은 것들을 그대로 두게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결과물이 조악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디테일이라 부르는 각 부분의 상세한 결합이 돋보이는 건축으로 완성되었다.

사각형, 원, 삼각형 등 가장 단순한 기하학에서 오는 평면과 입면의 아름다운 비례에는 그가 대학에서 배운 전통적인 고전양식의 건축을 통해 익힌 감각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경제공황 시기를 거치며 30·40대를 보내는 동안 연구회 활동, 공공건축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면서 묵묵히 내공을 쌓았다. 특히 20대와 50대에 그리스·로마 등 고대 도시를 여행한 경험이 ‘침묵과 빛의 구현’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건축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칸의 아들이지만 생전에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적이 없었던 너새니얼 칸이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건축을 따라가며 만든 ‘마이 아키텍트(My Architect)’라는 영화가 있다. 그 막바지에 다다르면 70대에 이른 루이스 칸이 1974년 죽기 직전까지 출장을 다니며 공들였던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이 신기루처럼 등장한다. 1963년부터 구상하여 그의 사후인 1983년에 와서야 완성된 유작이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의 틈으로 흘러드는 빛 아래서, 현지의 건축가가 너새니얼에게 “너희 아버지는 정말 위대했어”라며 진정이 담긴 눈물을 보인다.

저개발국가의 열악한 건축 환경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바구니로 시멘트를 지고 날라 이루어낸 민주주의의 상징…. 건축가의 의지의 완성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 고단한 여정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루이스 칸이야말로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해가며 건축의 본질에 접근했던 진정한 ‘건축의 마스터’라고 할 수 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나연 '깜찍한 브이'
  • 나연 '깜찍한 브이'
  • 시그니처 지원 '깜찍하게'
  • 케플러 강예서 '시크한 매력'
  • 솔지 '아름다운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