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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58〉 정중동의 미학

입력 : 2012-07-17 18:14:03 수정 : 2012-07-17 23: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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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높이 세우지 않았어도 큰 움직임이 담겨있다 #살풀이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정지해 있는 것도 아닌

살풀이춤을 처음 본 것은 1987년 어버이날 세종문화회관에서였다. 우리나라의 어버이들을 위해 자식들이 표를 사서 보내드리는 그런 공연이었다.

물론 나는 그때 어버이는 아니었고 새파란 대학생이었다. 그때는 학교를 잠시 쉬면서, 돈을 벌어 전국을 돌며 옛집들을 섭렵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며 어딘가에서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너무 고된 하루하루에 지쳐 있던 시절 ‘나도 조금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름 문화적 휴식을 찾아 주변을 둘러봤는데, 그때 마침 내 눈에 띈 것이 그 공연이었다.

공연의 구성은 그 당시 잘나가던 김덕수패의 사물놀이부터 황병기의 가야금 연주, 여러 명인들의 판소리 등등 국악의 모든 장르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어진 지 꽤 되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종문화회관에 들어가 보는 것이 큰 목적이었다. 그곳에서 진행하는 공연들은 대부분 고액이며 내가 알 수 없는 고상한 장르들이었는데, 그 공연은 그래도 비교적 저렴한 공연이었고 어느 정도는 졸지 않고 들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매방
기억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5000원 정도 하는 그 공연의 표를 선뜻 사서 오후 7시에 시작하는 시간에 맞춰서 들어갔다. 널찍하고 웅장한 세종문화회관은 무척 머쓱했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내 또래는 보이지 않아 더욱 어색했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마주친 공연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시들했다. 나는 무척 지루하게 늘어져서 그냥 세종문화회관이라는 일상의 장소가 아닌 곳에서 몇 시간을 보낸다는 일탈의 여유로만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연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 이매방이라는 화장을 무척 짙게 한 분이 홀로 무대에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 춤이 시작되었는데, 여태까지 늘어져 있던 내 몸의 근육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을 찾은 관객의 수준은 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나이 지긋한 이 땅의 ‘어버이들’이었다. 중간중간 “여기보다 밥 먹으면서 쇼 보는 그런 극장식 식당이나 보내줄 것이지” 하는 원망을 하던 분들이었다. 참 희한한 경험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산만하고 시끄럽던 공연장 내부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 그리고 그 원인이 거의 동작이 없는 그 이상한 춤 때문인 것이.

무엇에 홀린 듯 황홀하게, 춤이라기보다는 그냥 단속적인 동작의 나열에 혼을 뺏긴 채 몇 분이 지나갔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컴컴해진 광화문으로 나올 때도 그 춤이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져서 잊혀지지 않았다.

이후 특별히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그 전에는 노인들만 보는 프로그램인 줄 알았던 텔레비전에서 한가한 시간에 방영되던 국악 관련 방송을 열심히 보게 되었다. 그 중간중간 살풀이춤을 보게 되었으며, 이매방이라는 사람이 승무도 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전라남도 목포가 고향인 이매방의 살풀이춤은 남도 살풀이라던데, 꼿꼿하고 정갈하며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춤이라는 것이 동작을 보는 것이고 흐름이 있고 율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춤은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정지해 있는 것도 아닌, 그 사이의 애매한 영역을 거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동작들이 주는 긴장감과 야릇한 해방감은 도저히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숨을 크게 쉬지도 못할 정도로 공간과 시간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대체 저 춤은 무엇인가. 나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내가 아는 춤이, 내가 아는 음악이 과연 맞는 것일까. 근본적인 질문이 내 안에서 스멀거렸다.

김숙자
#정중동, 움직임 속에서 조용함이 있을 때 하늘과 땅을 관통하는 영혼의 리듬이 나타난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1989년 가을 나는 대학로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에 면한 지금의 아르코예술극장인 문예회관을 내 집 앞처럼 매일 지나다녔다. 매번 다양한 공연과 연주회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나는 그냥 그 앞을 지나치기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를 붙잡아 세워놓는 포스터가 하나 있었다.

‘김숙자 살풀이춤 공연’. 물론 일천한 나의 지식으로는 그 사람이 누군지, 어떤 춤을 추는지도 모르면서 몇 년 전의 감동이 되살아나서 무턱대고 그 표를 사 혼자 극장에 들어갔다. “김숙자 선생은 도살풀이의 대가이시며 아버님에게 춤을 배웠고 따님도 이어서 그 춤을 추고 있다”고 무대에서 진행자가 길게 길게 사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객석은 가득 차 있었고, 잠시 후 무대에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입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손에 긴 무명수건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전에 보았던 이매방의 춤사위와는 다소 다른 듯 비슷한 듯했다. 그리고 역시 관객의 모든 호흡을 빼앗은 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언지 영원에 가까운 동작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졌다.

다만 초심자의 내 눈에는 이매방의 춤이 아주 정연하고 절도 있는 것에 비해 김숙자의 춤은 약간 구부정하며 비례와 균형의 귀퉁이가 살짝 벌어진 채 움직이고 있었다. 처연한 듯하면서도 경쾌하며, 유장한 듯하면서 빠르게 휘감는 느낌이 약간은 귀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간 내가 보았고 들었던 어떤 장르의 예술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감동이 있었다. 마치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감각기관에 처음으로 닿는 자극을 받는 것 같았다.

정중동의 미학…. 정지해 있으면서도 움직인다. 과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말들을 우리는 쉽게 한다. 혹은 너무나 쉽게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살풀이춤을 통해 그 의미를 비로소 조금씩 알게 되었다. 정지해 있지만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닌, 심지어 너무 크게 움직여 도무지 우리가 눈치챌 수 없는 그런 것이 살풀이춤에는 있다.

“동양 사상에서는 ‘반대’라는 개념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움직임과 정지가 반드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음양처럼 조화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춤에는 정중동(靜中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은 정지 속에 움직임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한국 춤에는 정지한 듯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움직임이 있습니다. 반면 발레는 외향적으로 항상 움직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지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정지를 움직임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최준식)

사실 동양사상, 그중 특히 한국의 사상에 입각한 예술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개의 사상을 통섭하는 ‘정중동’이라든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이미 영원한 도가 아니다)’와 같이 애매한 말들을 앞에 내세우고, 실질적으로 그런 생각에 절여서 꺼낸 듯한 결과물들을 우리 앞에 태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살풀이춤이 그렇고 정악이 그렇다. 한 동작, 한 음을 내고 그 다음 동작까지의 길고 긴 여백 그 사이에, 우리는 무수히 많은 생각과 무수히 많은 영상을 스스로 만들어서 채워야 한다. 관객이 작품에 직접 개입하여 같이 완성하는 ‘창조적 수용자’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공연예술의 깊은 전통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이, ‘얼∼쑤’ 혹은 ‘잘한다∼’ 같은 추임새를 틈틈이 넣고 박자도 같이 맞추어 주는 그런 참여와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공연 중에는 기침도 참아야 하고 부스럭거림도 큰 실례가 되는 서양의 공연과는 사뭇 다르다.

종묘는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가장 크게 움직임을 얻는 정중동의 미학을 구현한 한국 건축미학의 완결이다.
#종묘, 우주의 움직임이 담긴 고요함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양의 척도를 배우고 서양의 양식과 제도를 그대로 직역해 만들어놓은 여러 교육 시스템에서 길러진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사물을 재고 사물을 인식하는 ‘자(척·尺)’는 속속들이 서양의 자인 것이다. 그 자를 들고 우리의 것을 재면, 도저히 인식하고 입으로 낼 수 없는 이상한 숫자나 신호가 읽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 많은 편견이 있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옹졸함과 무식함이 한꺼번에 작용해서, 심지어 한때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폄하하고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인식이 많이 개선되어서 잘 모르는 것이더라도 예전처럼 무시하고 덮어버리려고 하지는 않지만, 서양식 잣대를 들고 선 것은 그대로다. 근대화의 백년 사이에 우리는 참으로 많이 바뀐 것이다.

한국의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를 바꾸어야 한다. 한국의 춤에 사진에는 들어오지 않는 움직임 혹은 사람들이 알아챌 수 없는 움직임이 담겨 있듯, 멈춘 듯 움직이는 건축. 한국의 많은 공간들이 그런 이상을 추구한다.

높이 세우지 않으면서도 주변을 압도해 버리는 수평적 랜드마크의 건축이 있다. 조선 왕들의 영혼을 모신 종묘가 그런 건축이다. 종묘에 들어가면 모든 소리와 생각과 시각이 압도된다. 지평선을 온통 덮어버린 수평으로 길고 긴 건축. 대체 저 건물의 길이가 얼마인가, 넓이가 얼마인가 하는 척도개념은 사라지고, 우리의 감각은 ‘무한에 가까이 넓고 길다’로만 인식한다.

사람의 스케일에서 벗어난,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움직임이 무척 커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지구의 자전 혹은 우주의 운행과도 같은 그런 ‘신적 스케일’을 지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묘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세운상가에서 내려다본 종묘의 모습. 정적이 담긴 숲 속의 수평적인 지붕선이 큰 움직임을 드러낸다.
종묘 정문에서 중앙으로 들어가는 신도는 왕도 드나들 수 없는 신(조상)만의 길이다. 조상을 받들고 효경(孝經)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종묘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은 유교사회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의 건축이다. 그래서 고대 중국부터 왕이 도읍을 정하면 궁전 왼편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편에 사직을 세우게 했다. 조선의 태조 또한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경복궁보다 먼저 종묘를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불타버린 궁궐보다 먼저 종묘를 복원하였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 정전에 봉안했다가 공덕이 높은 왕을 제외한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신 19실이 있고,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옮겨진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고종의 아들인 영친왕)의 신주를 모신 16실이 있다.

원래는 7칸으로 창건된 종묘가 19칸으로 길어지게 된 것은 정전을 새로 짓지 않고 기존의 건물에 이어서 지어나갔기 때문이다. 정전의 신실은 제1실에 태조 신주가 봉안되어 있고, 고대의 예법인 ‘서상(西上)’의 원리에 따라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차츰 늘어났다. 영녕전은 태조 이전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중앙에 모시고 양쪽으로 증축해 나갔다. 정전은 19칸 태실의 지붕이 똑같지만, 영녕전은 중앙의 4칸 지붕이 높다. 그래서 3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전이 영녕전보다 훨씬 길어 보이게 되었다.

무한히 긴 집, 종묘는 영혼이 사는 집이고 신이 사는 집이다. 인간의 척도가 아닌 신의 척도로 지어진 그 수평적 무한성과 공간감은 우리의 감각을 넘어선다. 그리고 공간은 크게 움직인다. 그것은 동양사상이 추구하는,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가장 크게 움직임을 얻는 정중동의 미학을 구현한 한국 건축미학의 완결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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