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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56> 캠퍼스

입력 : 2012-06-05 22:18:16 수정 : 2012-06-05 22: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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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퍼스, 지성의 열매를 구하는 들판

흔히 대학의 교정을 이야기할 때 쓰는 영어 단어 ‘캠퍼스(Campus)’는 라틴어로 들판을 뜻하는 ‘캄푸스’에서 나왔다. 우승자를 일컫는 ‘챔피언(Champion)’이라는 단어도 ‘캄푸스’에서 나왔다. ‘들판에서 싸우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그 말이 대학 혹은 연구소의 시설과 경계를 통틀어 부르는 의미로 변환되고, 어느덧 구글이나 애플과 같이 창의적인 작업 환경을 추구하는 회사들이 자신들의 사옥을 칭할 때 사용하는 이름이 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 캠퍼스의 어원이 경작이나 수렵 등으로 인간에게 생존을 보장해주는 들판이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의미상에서는 더욱 합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캠퍼스라는 일반명사가 쌓아놓은 이미지는 대체로 대학의 낭만적이고 고즈넉한 장면으로 떠오른다. 잔디와 나무그늘과 그 안에서의 독서, 그리고 진지하지만 젊은이 특유의 약간 설익고 열적은 토론 등과 같은….

고풍스런 옛 서울대 본관 서울 동숭동에 있는 옛 서울대학교 본관 건물.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쓴 건물이다. 지금은 문화예술위원회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실체는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대학로에는 ‘대학’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가 거기 있었다. 원래 1924년 일본 정부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이 이곳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법문학부·의학부만 설치했다가 26년 식민지 조선 최초의 종합대학이 되었다. 1931년 본부 건물을 준공했으며, 8·15 광복 이후 경성대학으로 교명이 바뀌었다가 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통합되었다.

지금 대학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큰길은 옛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를 반으로 가르는 개천과 옆으로 나 있던 길을 합한 것이다. 그 개천을 당시의 서울대 학생들은 ‘세느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는 수유리에서 6번이나 9번 버스를 타고 돈암동에서 혜화동을 거쳐 연지동·오장동 쪽으로 가며 늘 그 안을 가로질렀었다. 가끔 어둑어둑한 밤에 그 앞을 지날 때 개천 옆에 카바이트 불을 밝힌 리어카 노점상이 있었고 그 주변에 젊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던 모습이 생각난다. 캠퍼스 내부인 동시에 차가 다니는 일반 도로. 마치 ‘클라인 병(Klein’s bottle)’처럼 경계가 모호한 그곳을, 나는 대학인지도 모르고 다녔고, 그 후로 세월이 많이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그때 기껏해야 초등학교 학생이었으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외국의 역사가 깊은 대학들은 도시 전체를 캠퍼스로 구성해 대학의 경계가 모호하고 광범위하다. 어찌 보면 그때의 서울대학교 캠퍼스는 대학의 향기가 주변과 격리되지 않고 도시를 좋은 색으로 물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적절했고 긍정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권의 연장과 체제의 수호에 눈이 어두웠던 당시의 정부는 대놓고 정권을 비판하는 ‘시대의 양심’들을 서울의 한가운데 남겨놓는 것이 껄끄러웠을 터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명분과 이유로 서울대학교는 1975년 당시로는 멀고 먼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 격리되었다.

그리고 지구가 시속 1600㎞로 돌고 있는데도 미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사회가 아주 빠르게, 그러나 느껴질 수 없는 속도로 변하면서 대학들도 그 속도를 맞추느라 그러는지 변하고 있다. 그래서 하는 일들이 대학에 소비문화를 수용하는 일이다. 커피숍, 빵집, 헬스클럽 등이 학교의 한가운데 마치 예전에 독수리상 혹은 호랑이상이 있듯이 상징으로 우뚝 서있다. 언제부턴가 우리가 아는 정서적이거나, 약간은 우둔하거나, 혹은 완고한 학교의 건축이 하나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빼어난 각선미와 우뚝 솟은 코를 한껏 뽐내는, 어딘가 인공감미료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있다.

이화캠퍼스 이화캠퍼스복합단지 ECC. 정문에서 본관까지 이어지는 폭 25m, 길이 250m의 ‘밸리’ 양측으로 6개 층의 독서실·세미나실·강의실·영화관 등이 있다.
# 낭만이 사라진 캠퍼스

하길종 감독이 1975년에 만들었던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가 있다. 소설가 최인호가 스포츠신문에 연재했던, 무어라 장르를 구분하기 애매한 소설이 원작이었다. 어찌 보면 조흔파 선생의 당대의 히트작 ‘얄개전’의 대학 버전 같기도 하고, 대학생다운 치기 어리고 엉뚱한 상상력과 당시 군사정권 치하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깊은 페이소스가 짙고도 강하게 배어 있는 참 애매모호하면서도 즐겁고 낭만적인 소설이었다.

‘바보들의 행진’은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갓 돌아온, 당시에 드문 유학파인 ‘배운 감독’ 하길종이 만들었다. 그는 작품성 짙은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자 ‘맘 먹고’ 이 영화를 내놓았다. 그리고 15만 관객을 동원해 그 당시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도 사정이 별반 다른 것은 아니지만 당시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꿈은 대통령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고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대학생이란 입시의 압박에서 일단 벗어나 느지막이 일어나서, 드문드문 학교에 나가고, 단체로 미팅을 하고, 생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꼬나물고, 눈물을 찔끔 흘리며 기타를 치고,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청바지를 땅에 질질 끌면서, 한 손에는 테니스 가방을 들고, 한 손에는 ‘갈매기의 꿈’을 들고 다니는 명분 충만한 백수의 모습과, 그러면서도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당당하게 항의하는 의로움과 낭만의 결정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 시절의 ‘뉴 트렌드’를 선도하는 최인호의 야릇한 소설을 열심히 읽었고, 하길종의 유쾌하면서도 슬픈 영화를 몇 번이나 봤다. 그 배경은 연세대학교 캠퍼스였다. 먼지가 연무처럼 폴폴 날리는 강의실과 무성한 나무와 잔디와 널찍한 돌계단과 청명한 하늘은 무척이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 역시 무엇이 될까 보다는 그저 대학에, 아니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는 게 꿈이었고, 캠퍼스에 벌렁 누워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때 마침 연세대에 다니던 누이가 가져오는 여러 종류의 교지와 학교 신문도 열심히 보곤 했다. 그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행인의 뒤통수처럼 살짝살짝 비치는 캠퍼스의 조각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미술 시간에 비누 조각 숙제가 나왔다. 보통은 사람의 얼굴이나 주먹 쥔 손을 만드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며 여러 개의 빨랫비누를 망쳐놓아 집에서 온갖 구박을 받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다른 대상을 찾아봤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얼마 전에 보았던 연세대 교지가 생각났다. 넘기다 보니 오래된 돌 건물들은 장식이나 지붕의 모양이 재현해내기 무척 힘들어 보였고, 그중 한 건물이 평지붕에 단순하고도 단정한 표정이라서 ‘그래, 이거다’ 싶어 무릎을 치며 그 건물을 조각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니면 운명적인 어떤 힘이 있었는지, 초등학교 3학년 때 공예품을 만들다 선생님에게 망신을 당한 이후 미술 시간에 이뤄지는 어떤 창작도 하위 10%의 벽을 넘지 못하던 내게, 그 건물의 조각은 이상하게도 재미있었다. 빠른 시간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미술 시간에는 최초로 칭찬까지 받았다. 그리곤 집으로 의기양양하게 들고 왔지만, 며칠 후 우리 집 빨래에 거품을 안겨주며 장렬히 사라졌다.

얼마 전 연세대에 특강을 하러 갔다가 어떤 건물이 철거될 위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역사가 있고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자리이며…. ‘그래, 요즘의 대학들이 다 그렇지’라는 생각이나 하면서 한참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저녁을 먹으러 캠퍼스를 따라 내려오다, 이 건물이라며 가르쳐준 그곳이 바로 내가 1974년에 비누 조각을 했던 바로 그 건물이었다.

아…. 내 비누 조각처럼 거품을 일으키며 사라진다는 그 건물, ‘용재관’은 동문의 성금으로 어렵게 지어진 의미 있는 건물이었으며, 오랜 시간 연세대의 상징인 백양로의 한 부분을 담아주었는데, 강의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거대한 현대식 건물을 짓기 위한 철거 계획이 세워졌다고 한다.

홍익대 초대형 빌딩 홍익대 정문의 홍문관. 2002년 12월 착공해 1000억원의 예산을 들인 지하 6층, 지상 16층의 타워형 건물로 국내 대학건물 중 단일 건물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 캠퍼스, 자본주의의 첨병에 서다


내가 다녔던 홍익대는 무척 작은 학교다. 터도 좁은 데다가 산이 바짝 붙어 있어 어디 한 군데 너른 구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홍익대학교에 들어가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으뜸은 홍익대 캠퍼스가 좋아서였다. 그 캠퍼스는 정확히는 홍익대 교내가 아니라 홍익대 주변의 동네를 아우르는 영역이었다. 나는 홍익대가 보이는 서교동 주변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딘지 예술적인 분위기에 반했던 것이다. 입학원서를 내기 위해 처음 학교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주 작지만 역시 고즈넉하고 군데군데 심드렁하게 널려있는 다양한 ‘현재진행형’ 예술창작 조각들과 그걸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물론 지금보다 단과대학이 적었고 당연히 사람도 적었으며, 덩달아 건물들이 이루는 밀도도 지금보다 훨씬 넉넉했다. 그리고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그리고 언덕을 절반 정도 오르는 동안 계속 이어지는 하얀 벽에 부조로 파 놓은 사람들의 군상이 무척 멋있었다. 다양한 자세와 표정으로 시립해 있었던 그 사람들의 수가 몇 명인지 궁금해서, 올라갈 때마다 세기 시작하곤 했으나 중간에 잊어버리거나 아는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중단하여 끝까지 제대로 세어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동아일보 1970년 6월5일자에 실린 옛 기사를 찾아보고 30년 만에 120명이라는 걸 알았다. 그건 홍익대 교수의 작품이었다. “기도하는 사람, 칼을 든 사람, 승리의 월계관을 든 사람 등 120명의 남녀상이 새겨져 있던 길이 22m, 높이 2.4m의 이 거대한 부각은 ‘조국의 투쟁사’로서, 구한말부터 4·19까지 밖으로 또는 안으로 향한 민족의 저항사를 형상화하여 역사를 인식케 해주는 촉매이자 학교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을 없앤 자리에 지어진 홍문관은 2002년 12월 착공해 1000억원의 예산을 들인 지하 6층, 지상 16층의 타워형 건물이다. 국내 대학건물 중 단일 건물로는 최대 규모라고 한다.

어느 날부터 대학이 대문 근처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차요금을 징수하면서부터, 대학 캠퍼스에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혹은 기존의 캠퍼스가 가지고 있는 스케일을 파괴하며 무척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그 안은 카페나 극장 같은 다양한 형태의 소비문화의 첨병들로 채워진다. 고려대에는 ‘타이거 플라자’ ‘하나스퀘어’(200m×50m 대지에 525대 규모의 지하주차장을 포함해 지은 지하 3층, 지상 1층 건축물. 총넓이 2만8154.96㎡) 등이 지어졌고, 이화여대에도 총넓이 6만6000여㎡, 총 6개 층으로 이뤄진 ECC(이화캠퍼스복합단지, Ewha Campus Complex)가 있다.

ECC는 정문 쪽에 있던 철도가 복개되면서 지면 높이가 올라가게 된 것을 계기로, 기존에 이화광장과 운동장이 있던 터를 이용한 지하캠퍼스로 계획되었다. 정문에서 본관까지 이어지는 폭 25m, 길이 250m의 ‘밸리’ 양측으로 6개 층의 독서실, 세미나실, 강의실과 영화관 등이 매달려 있다. 관목과 잔디밭이 부각된 옥상정원은 아늑했던 예전에 비해 너무 넓어 보이고 ‘계곡’은 너무 깊어서, 그 축의 끝에 놓인 크지 않아도 단아한 기품이 있었던 본관(1935년 완공, 등록문화재 지정)은 잘못 놓인 인형의 집처럼 머쓱해졌다.

어떤 지진 혹은 태풍의 전조처럼 그런 일들이 벌어지며 지성의 열매를 구하던 들판은 자본의 열매를 맛보는 들판으로 변질되었다. 캠퍼스에서 더 이상의 낭만이나 순수는 기대하지도 말라는 선언 같기도 하다. 대학들이 학생들의 편의를 핑계로 교육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캠퍼스의 팽창과 수익사업에 몰두하는 사이, 학생들 또한 대학을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이 아닌 ‘스펙 쌓기’의 배경쯤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서로를 위한다면서 서로 단절되고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캠퍼스라는 공간만큼은 아무리 자본주의가 첨예해지더라도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연대감과 자부심, 정서적인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교육의 공간인 ‘캠퍼스’에서 최후의 보루로 지켜야할 가치이기도 하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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