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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53> 앙가주망 : 사회참여

입력 : 2012-03-27 17:27:49 수정 : 2012-03-27 23: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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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양심을 일깨우고 ‘어린이 도서관’ 기적을 낳다 # 말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프랑스어 ‘앙가주망(engagement)’은 정치나 사회문제에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말한다. 원래 사전적 의미로는 약속·계약·책임 등을 뜻하는데, 프랑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사르트르가 논문 ‘존재와 무’에서 처음 그런 개념으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앙가주망은 사회참여, 자기구속(自己拘束)이란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사회적 현실에 구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인간과 현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앙가주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앙가주망은 눈앞의 현실을 피하지 않고 실천하고 참여하는 태도를 가진 작가들의 현실에 대응하는 자세를 일컫기도 한다.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일단 언어의 세계에 끼어든 이상 작가는 말할 줄 모르는 척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글 일부다. 그에 의하면 작가는 상황을 폭로함으로써 세계의 변혁을 시도하고 독자는 폭로된 대상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므로, 작가와 독자 모두가 필연적으로 사회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앙가주망의 정신을 실천한 작가들, 즉 앙드레 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생텍쥐페리 같은 작가들을 ‘행동주의 작가’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물질적으로 피폐해진 세상에 대한 반성으로 무너진 휴머니즘을 되살리고자 했으며, 모든 인간을 억압하는 정치적인 세력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이 문학의 참된 임무라고 강하게 이야기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여해 참혹한 현실을 지켜보며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았다. 생텍쥐페리도 전투비행사로 세계대전에 참전해 인간 사이의 유대와 희망을 자기 문학의 몸과 정신으로 삼았다.

20세기 초에 그런 올바른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기려 했던 많은 양심들이 봄에 딱딱한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보드랍지만 강인한 새순처럼 이 세상에 많이 돋았다는 사실이 왠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이념이나 표어보다도 우리가 가장 먼저 배운 인간에 대한 예의와 양심적인 삶, 그런 것들이 아닐까.

특히 생텍쥐페리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엄청나게 크고 텅 비어있는 방이나 끝 간 데 없이 넓은 사막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 무척 낮은 목소리인데도 울림이 크고, 결정적으로 ‘절대고독’이 느껴진다.

생텍쥐페리는 1900년 프랑스의 명문 집안에서 출생했다. 말하자면 봉건적 사회가 무너지고 인본적 사회로 접어드는 20세기 시작 직전, 즉 19세기 마지막 해에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의 대표적 재앙이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참화가 거의 끝나가던 시점인 1944년 전시에 정찰비행을 나갔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평생 하늘을 날고 싶어했던 그는 여러 번의 난관과 쉽지 않은 길을 극복했다. 심지어 연령제한으로 비행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나이인데도 어떻게든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그의 소설에 나오는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별로 돌아갔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 속 한 장면. 어린 왕자가 조그만 그의 별에서 허름한 걸상에 앉아 해 지는 모습을 44번 봤다는 사연이 담겨 있다.
# 인간의 대지…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에 있다

다들 그렇듯 나도 역시 그의 소설은 ‘어린 왕자’부터 보았다.

어릴 적 집에 있던 세계문학전집, 그 시퍼런 하드커버를 열면 갱지 냄새가 고색창연하게 풀풀거리고 누렇게 뜬 종이에 개미처럼 구물구물 활자들이 열 지어 기어다녔다. 그 책들 중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정말로 반갑게 만난 재미있던 소설, 그리고 그림이 있던 유일한 소설이 ‘어린 왕자’였다. 대체 뭐하자는 이야기인지 싶도록 몽환적이면서 어딘가 쓸쓸했던 그 풍경을 잊지 못하겠다.

나는 특히 어린 왕자가 민들레나 강아지풀들이 솟아 있는 조그만 그의 별에서 허름한 걸상에 앉아 해 지는 모습을 44번 봤다는 그 그림이 너무 좋아서, 나도 그 대목을 하루에 44번이나 봤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설계하는 집에는 작은 걸상을 놓고 해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발코니를 놓고는 한다.

‘앙가주망’의 정신을 실천한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 전투비행사로 참전하며 인간 사이의 유대와 희망을 자기 문학의 몸과 정신으로 삼았다.
그 다음 ‘야간비행’ ‘남방우편기’로 옮겨가다가 ‘인간의 대지’까지 갔다. ‘인간의 대지’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살아오면서 보았던 것, 느꼈던 것을 담담하게 엮어놓은 글이다. 그냥 편하게 쓴 것 같은데 무척 울림이 크다. 그래서 그 책도 꽤 여러 번 읽었다.

‘인간의 대지’에서 생텍쥐페리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다가 조난당한 동료의 이야기, 안데스산맥에 불시착했으나 강인한 의지로 살아나온 또 다른 동료의 이야기, 본인이 사막에서 살아나온 이야기, 노예를 구해준 이야기 등을 아주 담담하고 건조하게, 마치 무척 먼 거리에서 망원경으로 본 것처럼 풀어놓는다. 아무런 들뜸도 없고 아무런 좌절도 없다. 그냥 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뜨거움과 차가움밖에 없는 모래 위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다. 끝이 없이 펼쳐진 사막에 앉아서 대상도 없이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전해져온다.

“대지는 우리에게 만 권의 책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의 진가를 발견한다.” “어떤 직업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모아 놓는 데 있는지 모른다. 진정한 사치는 한 가지밖에 없으니 그것은 인간관계의 사치다. 물질적 이익만을 위해 일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감옥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살 만한 가치가 조금도 없는 재와 같은 돈을 가지고 외롭게 유폐되는 것과 같다. 내 추억 가운데 내게 오랜 맛을 남겨준 것을 찾아보고, 가치 있는 시간을 따져 보면 그 어떤 재산도 내게 마련해 주지 못할 시간을 찾아낼 수 있다. 메르모즈 같은 친구의 우정, 함께 시련을 겪음으로써 우리와 영원히 맺어진 동료의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비행하던 밤과 그 무수한 별들, 몇 시간 동안의 그 담담한 심정, 그 절대력,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는 노예로 살고 있는 중늙은이 바륵을 구해주며 “자 바륵 영감, 가서 사람이 되시오”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풀려난 바륵에게 닥쳐올 고난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귀향의 흥분이 가라앉기가 무섭게 바륵을 제일 먼저 맞이할 가장 충실한 벗은 곤궁일 것이고, 석 달이 지나지 않아 그는 철로 위 어딘가에서 침목을 뽑느라고 애쓰리라는 것을 그들이나 나나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사막에서보다 우리 사이에서 덜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동족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생텍쥐페리는 진정한 사치는 인간관계의 사치이고 어떤 직업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모아 놓는 데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 간의 유대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1년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에 관한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의 한 장면. 건축의 사회적 의미를 몸소 실천한 그는 ‘기적의 도서관’들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 건축가로 낯익은 얼굴이다.
#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을 기억하다


작가는 글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건축가는 자신이 창조한 공간을 통해 세상에 이야기를 한다. 최근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말하는 건축가’라는 영화를 보았다. 내용은 지난해 3월 암으로 세상을 떠난 정기용(1945∼2011)이라는 건축가의 마지막 몇 년간을 담은 것이고, 동선은 그가 마지막으로 밟고 다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무척 바짝 당겨서 찍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바짝 대고 듣고 있었다.

영화 내내 그는 말한다. 그런데 병으로 거칠어진 목소리 때문에 그가 하는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그의 말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는 왜 저런 목소리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러는 사이에 그는 점점 수척해지고 머리카락이 점점 줄어들고, 아니 존재 자체가 점점 증발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가 설계한 건축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펴낸 책을 통해서였다. 누가 나에게 존경하는 건축가를 물어보면 나는 늘 “존경하는 건축가가 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한 명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나온 윤보 목수이고, 또 한 명은 하산 파시(Hassan Fathy)라는 이집트 건축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두 건축가를 만난 적이 없고 그들이 지은 집을 본 적도 없다. 왜냐하면 한 명은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고, 또 한 명은 실존하긴 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건축 행위, 즉 한껏 멋을 부린 ‘웰 메이드’ 건축을 하는 건축가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의 건축은 멀고도 먼 이집트 오지에 있다. 그럼에도 내가 존경하는 이유는 그들이 지향한 지점에 크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향한 건축, 그것은 누구나 지향하는 건축의 가치이지만 그게 작업에 깊숙이 녹아 들어가는 예는 거의 볼 수가 없다.

1945년 이집트 룩소르 부근의 구르나 마을 이주 건설계획을 담당했던 건축가 하산 파시는 당시 이집트 농촌의 생존 조건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전통적 축조술을 재생시킨 흙 건축을 이용한 아름다운 마을을 건설했다. 그는 본래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에서 건축 공부를 했다. 농촌생활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오해가 있던 그는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자기 집안의 소작인들 집을 방문했고, 당시 이집트 농촌 주거환경의 참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고대 왕조 무덤의 도굴을 주업으로 하던 구르나 지역 7000명 주민이 이주할 마을을 새로 건설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단순히 집을 짓는 일만 한 게 아니었다. 마을 경제의 수입원이 될 것들을 부활시키고 학교와 사원, 시장 등의 공공시설을 먼저 건설하면서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건축가로서의 도덕적 책무가 어떠한 것인지를 훌륭히 보여주었다.

하산 파시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이가 바로 건축가 정기용이다. 1980년대 말에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라는 책을 번역해서 우리나라에 소개한 정기용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건축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 땅의 건축’을 찾고 구현하는 데 생을 바친다. 나는 리모델링되기 전 오랫동안 광화문 교보문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거울처럼 반사되는 천장,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청와대 맞은편에 백악산을 바라보고 앉아있던 청와대사랑방에 갈 때마다 필연적으로 정기용을 떠올리곤 했다.

전남 순천에 들어선 ‘기적의 도서관’ 건물. 정기용이 설계했다.
그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기적의 도서관’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 건축가로 낯익은 얼굴이기도 하다. 건축의 사회적 의미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기에 그를 빗대어 ‘건축계의 공익요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르나 마을 이야기의 영향이었을까,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자연 기후에 맞는 흙집을 연구하고 실제로 적용하고자 애썼다. 무주구천동이라 일컬어지는 동네에 여러 채의 예술인 마을을 흙집으로 짓기도 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그가 자신이 설계한 전북 무주의 한 공중목욕탕 건물 입구 계단의 돌로 만든 난간에 걸터앉아 목욕을 끝내고 기분이 좋아 모여 떠들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빙긋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내내 말하고자 한 것이 사람들 사이의 희망이고 온기이고 그리고 생에 대한 감사라는 것을 나는 마지막에 그의 다 꺼져버린 몸을 통해서, 또 그의 얼굴에 얇게 비치는 미소를 통해서 들었다.

그는 “건축은 근사한 형태로 만드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생텍쥐페리가 인간관계의 가치를 가장 큰 덕목으로 생각했듯 건축 또한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닐 때 그 본연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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