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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50> 존재의 순환

입력 : 2012-02-14 17:56:55 수정 : 2012-02-14 17:5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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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순환하고 윤회한다 존재의 중첩, 나는 너다 

흔히 영화, 소설 등의 줄거리나 내용을 미리 밝히는 일이나 그런 사람을 ‘스포일러(spoiler, 방해꾼)’라고 부르며 경원시하는데, 오히려 나는 미리 줄거리를 알고 전체를 다 파악하고 나서 보는 것을 즐긴다.

물론 사람마다 보는 취향이 다르고 즐기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는 결말을 위해 무섭게 달려가거나 혹은 결말을 가지고 독자와 일종을 게임을 하는 이야기의 구조보다는 이야기의 공간에 머물며 같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방식의 방향이 없고, 그냥 그 안에서 크게 원을 도는 이야기가 좋다.

네덜란드 건축가 벤 판 베르컬의 ‘VilLA NM’. 에스허르의 그림처럼 차원의 경계를 실제로 뛰어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일반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구조와는 다른 색다른 공간경험을 하게 해준다.
그런 내 취향에 맞는 소설가를 최근에 발견했다. 어느 날 배수아라는 작가의 ‘올빼미의 없음’이라는 단편을 우연히 읽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모호한 내용의 그 소설을 읽고 굉장히 흥미를 느꼈다. 그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일단 줄거리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하고, 이야기 간의 인과관계를 고정적인 시각에서 파악하려 들지 말고 그냥 순수하게 읽어 내려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마치 산길을 헤매다가 누군가가 심어 놓고 간 허술한 안내판을 발견하듯이 약간의 힌트를 얻게 된다. 우리는 그 안내판을 읽으며 열심히 가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배수아는 독일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글을 쓴다는데, 얼마 전 신문에서 그녀의 새로운 소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서 보았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방향도 없고(물론 내가 보기에는), 문체도 건조하고 심지어 외국 작가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한 듯하기도 해서, 읽는 중간 나는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리고 있었다.

주인공 경희는 이름도 생소한 ‘낭송 전문 배우’이고 그녀는 낯선 나라에 온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 독일어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흥적이며 피할 수 없는 방황을 시작한다. 그리고 베를린이라고 추정될 뿐 정확하지 않은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들의 정체도 정확하지는 않다. 화자도 모호하고 주인공도 모호하고 배경도 모호하다. 모든 장소가 겹치고, 심지어는 주인공마저도 겹친다. 그저 서로 크게 연관이 되지 않는 듯한 문장들이 서로 걸쳐있을 뿐이다.

“사실은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하나로, ‘존재의 중첩’이라고 표현하고 말 수도 있겠지요. 혹은 더욱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떤 한 사람의 존재라는 것이 수많은 산과 강을 넘어 어느 정도 이상의 시간과 지리적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그때 수많은 산은 이미 모든 하나의 산이며, 그때 수많은 강물 또한 모든 하나의 세계 강으로 흘러 가버리니, 그 산 안에 내가 있고 그 강물 속에 내가 있어, 그때는 어떤 존재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바로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사실만큼이나, 동시에 수억 개의 별들이 섬광 속에서 소멸하며 미친 듯이 죽어가고 있는 이 우주의 시간 전체 안에서는, 더 이상 어떤 현상을 위해서도 결정적인 설명이 되어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배수아, ‘서울의 낮은 언덕들’ 중에서)

존재의 중첩…. 나는 너이며 그이고, 나는 언니이고 딸이고, 낮은 밤이고, 그는 노바디이고 반치이고 치유사이고 마리아이다. 결국 모든 존재들은 중첩이 되고 서로 존재적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밤은 낮을 낳고, 낮은 밤으로 들어가고, 입구는 출구가 되고, 시작이 끝이 되는 한없이 반복되는 윤회와 순환의 존재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였다.

순환하는 공간, 차원의 경계를 허물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판화가인데, 한없이 돌아가는 물길이나 계속 올라가는 계단, 바닥과 천장이 물려 있는 공간 등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는 삼차원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모든 차원이 서로 물려 있다. 그는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감각을 2차원에서 구현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에 놀라기도 하고, 마치 어딘가에서 본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에스허르의 그림에서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구성하는 질서 체계인 앞뒤, 좌우, 위아래, 안팎, 높낮이, 거리, 차원 등의 물리적 법칙들이 모두 무시된 불가능한 공간들이 버젓이 하나의 공간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올라가는 것 같지만 내려가고 있기도 한 순환하는 계단을 그린 ‘상대성’(relativity, 1953)이라는 그림은 우리가 공간을 인지하는 마음속의 현실과 실제 구조물이 구성되는 물리적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표현이다. ‘뫼비우스의 띠 II’(1963)는 띠를 한 차례 비튼 다음에 양쪽 끝을 이어서 만든 고리를 개미들이 기어다니는 그림으로, 고리의 각 부분에서 보면 앞면과 뒷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리의 한 면을 줄곧 따라가면 어느덧 원점에 되돌아오기 때문에 실제로는 한 개의 면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과연 말장난이나 철학적인 수사가 아닌 윤회와 순환의 공간 혹은 그런 존재적 상황은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그런 다차원의 공간에 대해 많은 건축가가 꿈을 꾼다. 마치 건널 수 없는 우리 앞의 커다란 강을 건너듯이 울타리를 뛰어넘듯이 넘어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우리는 엄정한 중력의 지배를 받고 있고 삼차원의 질서를 거스를 수 없다.

가령 네덜란드의 건축가 벤 판 베르컬(Ben van Berkel, UNStudio)는 뫼비우스의 띠라는 개념을 ‘뫼비우스 하우스’나 ‘VilLA NM’에서, 평면과 단면을 이용해 층간의 구분을 없애고 건물을 돌아서 회전하거나 공간, 형태, 시간이 연결된 연속체로 표현한다. 이는 에스허르의 그림처럼 차원의 경계를 실제로 뛰어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일반적인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구조와는 다른 색다른 공간경험을 하게 해 준다.

물리적으로 그런 시도는 현대 건축가들만의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의 오래된 건축물에서도 그런 공간의 조작과 차원의 조작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지금의 건축처럼 요란하고 시끄러운 형태의 조작과 사람들의 시·지각의 착각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지형과 심리적인 요인을 이용해서 만들었다는 것이 다르다.

전북 부안에 있는 내소사라는 절은 무척 아름답다. 한적하고 건강한 공기를 뿜어주는 진입로의 긴 전나무 숲길도 아름답고, 중간중간 유려하게 흐르고 있는 개울 너머로 보이는 부도밭도 아름답다. 절의 경내로 들어설 때 나오는 우화루와 그 뒤로 조각 같은 바위산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서 있는 대웅전과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마당…. 모든 것이 참으로 적당한 스케일이 있고 섬세한 건축적 조형미와 공예적 감각이 듬뿍 뿌려진 곳이다.

그리고 대웅전 옆으로 커다란 집이 한 채 보인다. ‘설선당(設禪堂)’이라고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요사채인데, 겉에서 보기에는 그저 커다랗고 네모난 집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대문채를 통해 들어가면 주왕신을 모시고 있는 부엌 부뚜막이 보이고 그 옆으로 안마당이 얼핏 보인다. 네모 반듯한 안마당은 지형을 이용해서 각 면이 반 층씩 올라가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북쪽 아래 단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올라가다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면 높이가 한 층만큼 들어 올려진 2층 누마루와 물려 있는 진입부가 된다. 마치 에스허르의 그래픽을 보는 것 같은 그 평면은 단정한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위상기하학적인 변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강력하다.

소쇄원의 담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능동적으로 공간에 개입하고, 초입의 다리는 원형으로 순환하는 동선의 시작이자 끝이다.
소쇄원, 시작과 끝의 존재적 순환 

소쇄원은 광주와 담양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이다. 조선시대에 양산보라는 선비가 조광조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사화로 인해 스승을 잃자, 정치적인 뜻을 거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가꾸었던 별서이다. 별서(別墅)란 본가는 따로 있고 책 읽고 손님 맞기 위해 지어놓은 별장 개념의 집으로 보면 될 것이다.

소쇄원이 있는 곳은 무등산의 한 자락이면서 창평의 너른 들을 면하고 있어 예부터 경제적으로 유복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양산보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고 보는데, 무등산을 앞에 두고 한 줄기 비단처럼 흘러내리는 자미탄을 바라보며, 깊지는 않으나 조금 들어가면 속세와 마냥 인연을 끊어버릴 듯 적막한 자리에 정원을 하나 만들고, 그 의도와 그 과정을 기록하면서 남겨놓았다. 그리고 집안에서 대대로 잘 보존하며 지켜내려 왔는데, 건축가 김수근이 가보고 극찬하면서 일반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소쇄원은 1980년대 이후 병산서원과 더불어 한국 건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하는 하나의 전범으로 높이 받들어지게 되었다.

내가 소쇄원을 처음 본 것은 사진가 임응식이 찍어놓은 사진을 통해서였다. 꼭 가봐야지 다짐을 하고 마침내 찾아간 것은 87년 12월 한겨울의 일이었다.

소쇄원에 대해서는 세상에 너무나 많은 글이 있고 너무나 많은 분석이 있어서 따로 떼어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당시에 어떤 조영에 대한 원칙을 세웠는지 어떤 의미의 조경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글과 그림으로 남아 문중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를 통해 볼 때 나무 한 그루, 주춧돌 하나, 계곡의 바위 하나까지 일일이 치밀한 계산과 연출에 의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도가 어설프게 드러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기존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면 더욱 놀라게 된다.

그런 이야기 말고도 나를 감동시킨 것은 배치의 오묘함과 그 다차원적이며 위상기하학적인 공간 연출에 있다. 소쇄원은 초입에 울창한 대나무 숲에서 시작한다. 그 숲에 들어서면 멀리 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가는 담이 보이는데, 담을 보며 따라 들어가면 왼쪽으로 펼쳐지는 소쇄원 계곡과 건물들이 보인다. 그리고 숲을 지나자마자 바로 왼편에 있는 나무로 된 다리가 있다.

제주도에서 온 장인들이 조선시대에 쌓았다는 높지 않은 담이 소쇄원의 내부를 관통한다. 원래 담이라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가르는 것인데, 여기의 담은 무척 모호하지만 능동적으로 공간에 개입한다.

그 담을 외부로 돌든 내부로 돌든 결국 한곳에서 만나는데, 작은 계곡을 지나고 계단을 올라 만나게 되는 소쇄원의 안채라 볼 수 있는 제월당에서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담은, 일단 거기에서 한번 끊어졌다가 다시 제월당 앞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담을 따라 내려가면 너머로 소쇄원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는 광풍각을 만나게 된다. 그 순환의 경로를 따라 다다른 지점은 광풍각의 좁은 마당이고, 그 마당 바로 아래에는 깊지는 않지만 무척 드라마틱한 경관을 만들고 있는 계곡이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처음 들어올 때 입구에서 보았던 그 다리가 나오고, 원형 순환의 동선은 거기서 끝난다.

고대 로마인들은 문에 앞뒤가 없다고 생각하여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1월을 뜻하는 영어 January는 문을 상징하는 야누스(Janus)라는 로마신화 속의 인물에서 나왔다. 즉 일월은 끝과 시작이 붙어 있다는 의미이며, 입구이면서 출구라는 것이다. 문이 과거이자 미래의 연속성을 뜻하듯, 건축에서도, 우리의 삶에서도, 시작과 끝은 늘 반복되고 순환된다. 시작과 끝은 무척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지만 사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거나 혹은 하나일 수도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순환한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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