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9〉 다운타운

입력 : 2012-01-18 01:13:42 수정 : 2012-01-18 01:13:4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양은도시락 같은 서울 재개발에 헤아릴 길 없는 슬픔이…
종묘 코앞에 고층빌딩 숲 만들고 녹지축을 남산까지 연결 한다는
세운상가 재개발은 애초 무리수
# 다운타운, 무인도의 또 다른 이름

1990년대 중반 미국 시카고의 한 설계사무소에 같이 진행하는 일을 조율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 11월의 추위는 우리나라 대한, 소한의 추위를 다 합해도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혹독했고, 도시 한가운데 있는 미시간 호수는 말이 호수지 바다와 같이 넓었고 그럴듯한 파도까지 철썩였다. 가기 전에 시카고에 대해 좀 알아보고 갔으면 좋았으련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었고 게으름이 겹쳐져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본 것은 내 눈이 닿는 범위가 전부였고, 그 범위 안의 일상은 장소만 옮겼을 뿐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평소의 일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며칠 지나니 이질감 내지 향수 같은 하는 것은 아예 종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저 서울의 어느 구석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심지어 귀를 스치는 언어들이 한국말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시카고 다운타운 한가운데 있는 그 회사 건물은 대니얼 번햄이라는 20세기 초의 건축가가 설계한 유서 깊은 오피스였다. 주변에 일리노이 주청사를 비롯한 많은 관공서와 시카고 미술관 등 문화시설과 시어스 타워, 존 핸콕 타워 등 대형 오피스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야말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를 움직이는 현대자본의 중심지라는 인상을 주는 대도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구석에서는 재즈의 낭만이 흘렀을 것이고 어느 구석에서는 가족의 단란한 대화가 흘렀을 것이지만, 나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만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몇 주간 무인도에서 머문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았었다.

오후 5시에 퇴근하면 내 뒤로 남겨진 도시는 텅 비어버린다. 그 큰 도시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누군가 나에게 밤에는 호텔에서 나가서 돌아다니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나는 객실에서 낙서를 하며 재미도 없는 미국 텔레비전을 보았고, 아침이 되면 어디선가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에 섞여서 출근을 했다. 그게 21세기형 도시의 모습인지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인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꿈꿨던 찬란한 도시가 이런 것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 돌아왔다. 5시 이후에도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도시로.

1960년대 말 서울시장으로 재임했던 김현옥이라는 분은 일하는 스타일이 워낙 밀어붙이는 성향이어서 ‘불도저시장’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분이 하도 텔레비전이나 뉴스에 자주 나와서, 지금도 서울시장하면 자동적으로 김현옥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때 그의 ‘업적’이 워낙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데, 당시 나이도 40대 중반 정도였고 절대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막강한 신임이 있어서 어떤 도시계획가나 위정자도 그 기간에 이룰 수 없는 많은 일을 해냈다. 문제는 도시에 대한 이해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은 성장 일변도의 정책과 시행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와우아파트 부실시공에 따른 붕괴로 어쩔 수 없이 불명예스런 사직을 했는데, 그가 이룩한 많은 ‘업적’ 중 하나가 세운상가 건립이었다.

세운상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공습에 대비해 만들어놓은 ‘소개도로’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짓는 계획이었다. 세계의 운을 모은다는 의미로 ‘세운’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설계를 맡은 건축가 김수근은 20세기 초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빛나는 도시’에서 펼쳤던 꿈을 서울 장사동에서 펼치게 된다. 공중가로가 있고, 저층부에는 상업시설이 들어가고, 상층부에는 고급 아파트가 들어갔는데, 준공 당시 그 아파트는 상당한 재력가들이 들어가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타워팰리스 정도.

그런데 곧바로 이어서 진행된 강남 개발로 부자들이 대거 강남 압구정동 근방으로 옮겨갔다. 세운상가 상업부분은 전자산업의 메카로 오랜 명성을 유지했지만, 상층부의 아파트는 점차 가치가 떨어졌다. 최근에는 여러 가지 산업의 재편구도 속에 전자상가들마저 운을 다하고 있고, 결정적으로 서울시에서 그곳을 재개발하기로 했다.

1770년대 고지도에 나타난 서울의 길과 옛 동네들, 도시환경정비사업 등의 개발사업으로 인해 서울의 정체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 30년 전의 재개발구역, 도심을 지배하다


그 재개발의 명분은 ‘녹지축의 복원’이었다. 서울에 있지도 않았던 녹지축을 ‘복원’한다고 해서 한참 웃었는데, 알고 보니 노후화된 세운상가를 허물고 재개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세운상가를 포함한 주변 네 개의 블록들을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를 현대식 주상복합건물로 대체한다는 황당하고도 어마어마한 일을 꾀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무식해서 용감한 것인지, 용감해지기 위해서 무식한 척하는 것인지. 주변에 입정동, 주교동, 예지동 등 비록 주거지역이 아닌 상업지역으로 변했지만 600년 넘게 예전의 도시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동네들이었다. 그 속의 크고 작은 도로들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필지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양은도시락처럼 네모반듯하게 건물을 올린다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해, 국제 현상을 거쳐 외국 건축설계사를 선정하고 계획안을 받아놓고 기다리고 있다. 말하자면 죽을 날을 받아놓은 시한부 인생처럼 600년 고도의 명예로운 주름을 어느 날 말끔히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 일대가 이른바 ‘세운상가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이미 30년 전인 1982년의 일이지만 그동안 개발사업이 추진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오세훈 전 시장이 서울을 입체 도시로 정비한다며 세운상가를 비롯해 종로·을지로 3∼4가 일대의 여섯 개 블록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2015년까지 단계별로 차츰 정비할 예정이었지만 경제적, 시행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사업은 거의 중단된 상태다. 처음부터 종묘 코앞에 수십 층의 고층 빌딩을 즐비하게 세우고 센트럴 파크 같은 공원을 남산까지 이어 이른바 녹지축을 연결하다는 구상 자체가 심각한 무리수였던 것이다. 

도시환경정비사업에 의해 잘려나간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의 옛 건물들.
언제부터인가 도시의 한 블록을 통째로 개발하는 일을 환경미화도 아닌 ‘환경정비’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비’란 흐트러진 체계를 정리하여 제대로 갖춘다는 뜻인데, 2010년에 발간된 ‘서울특별시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에서 도시환경정비(도심재개발) 사업의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당시 서울의 중심부는 조선시대부터 유지된 전통적 도시구조 하에서 한국전쟁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난개발로 인해 도로·공원 등 기반시설과 건축물 등 물리적 상태가 상당히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정부는 취약한 기반시설과 열악한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도심부를 안전, 위생, 미관 등의 관점에서 치유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1971년 도시계획법 속에 도시재개발사업에 관한 조항이 생겼고, 1973년 최초로 소공·장교·다동 등 11개 지역이 도심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서울 사대문 안의 조각보처럼 불규칙한 필지들과 좁은 도로들은 무조건적인 ‘정비’의 대상이었고, 전면적인 철거·재개발만이 해법이었다. 수백 년 된 길과 역사의 층위에 세워진 집들을 쓸어버리고 도로, 주차장, 공원 등 기반시설을 확보하면서 대규모 고층건물을 건설하는 것이 근대화되고 현대화된 도시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정비구역이 대대적으로 지정된 것은 70년대였지만, 실제 사업은 80년대부터 활발하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잠시 주춤했다가 2000년대 이후 사대문 안 도심부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보존하는 것을 고려하겠다며 잠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듯했으나, 이명박 전 시장 재임 시절인 2005년 수립한 기본계획에서는 미시행 사업지구의 정비를 촉진하는 파격적인 혜택들이 등장한다. 사선제한 완화, 높이 추가(20m), 용적률 인센티브(200%) 등의 규제 완화와 청계천 복원 등으로 인해 이 무렵 총 26건의 사업이 인가됐다. 이전 기간의 거의 4배에 이른다니 성과라면 성과다. 그 결과 현재 청계천 주변과 청진동 일대는 온통 가림막을 두른 채 사람 대신 중장비들만 들락거리는 공사 현장이 득시글거린다.

청진지구 일대 도시환경정비사업의 경과를 보여주는 위성사진(출처:위-다음 지도, 아래-네이버 지도).
# 사람이 사는 도시를 위하여


몇 년 전에 철거되기 직전의 청진동 일대를 기록할 일이 있어서 한여름 장마 한복판의 쭈글쭈글한 날씨에 열심히 기웃거렸다. 생선구이나 낙지집, 해장국집, 한정식집 등 주로 식당 이름으로 알고 있던 건물들의 간판을 걷어내니 서까래와 주춧돌과 우물 등 조선 집의 흔적들이 조금씩 드러났지만, 이미 그때 그 동네는 북쪽에서부터 차근차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이 먹혀드는 중이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데 발부터 서서히 지워지는 것처럼 그 안은 아주 또렷했다. 청진2, 3지구라고, 전략적이고 전술적이며 슬픈 이름으로 재편성된 그 동네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점령군들에게 거의 접수되어 말갛게 증발되고 있었다.

작년에는 선배의 소개로 도시환경정비사업의 여파에 이상하게 건물이 잘려서 내장이 드러난 건물을 수습해주는 일을 하나 맡게 되었다. 이번에는 청진 12-16지구 바로 위쪽 동네였다. 무슨 수하물번호 같은 그런 숫자로 한 덩어리가 된 그 동네는 르 메이에르로 이사한 후 묘하게도 맛이 변해버린 청진옥이 원래 있던 자리 부근이었다. 종로에 수평으로 그어댄 것이 분명한 굵직한 선에 의해 난도질당한 몇 개의 건물이 폭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건물처럼 처량하게 서 있었다.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배울 때 30cm 자를 가져다놓고 쭉 그으면 그게 개발지구가 되고, 고속도로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기에 설마 그 정도겠냐고 웃었던 적이 있다. 농담이 진담 된다고, 청진지구 일대 역시 1970년대에 지정된 선에 의해 이루어진 개발이었다. 청진동 일대를 포함한 서울 도심의 도시환경정비의 근거가 되는 ‘건설부고시 제428호’는 1979년 11월 22일 발표된 것으로, 청진구역, 명동구역, 회현구역 등의 재개발구역 결정 내용을 담고 있다. 청진12-16지구는 5개 지구를 통합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제 종로구청 아래부터 종로 위쪽 청진동 일대에서 아직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은 공원 예정부지와 상대적으로 소규모로 지정된 지구 몇 곳뿐이다.

이미 화신백화점 자리에 지어진 종로타워나 제일은행 본점, 르 메이에르 빌딩 등이 가뜩이나 종로의 스케일과 맞지 않아 번잡스러운데, 익숙한 종로의 스케일을 지우고 ‘정비’를 통해 등장할 건물들이 조만간 거리를 메우게 될 것이다. 마치 ‘고스트 바스터즈’에 나오는 우멍하고 미련한 느낌의 괴물이 달려드는 듯 괴롭다. 서울의 뒷골목까지 천편일률적으로 강요당하는 도시 스케일의 압박은 마치 십수 년 전 5시가 되면 건물 밖으로 나설 수 없었던 삭막한 도시 시카고처럼 서울이 재편되는 것 같아서 헤아릴 길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세계화, 정보화 시대라며 급속도로 모든 것이 변화하는 시대에 유독 도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왜 수십 년 전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서울 도심에 도시환경정비사업을 통해 지어진 건축물의 총 연면적은 약 726만㎡(약 220만평)이고, 이 중 70% 이상이 업무시설이다. 강남이고 강북이며 대형 사무실들의 공실률이 높다는 데도 끊임없이 공급된다. 사람들은 점점 서울 외곽으로, 밖으로 떠밀려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신도시로 향하는 급행버스나 전철에 몸을 싣는다. 서울의 도심을 오랜 시간 쌓아온 연륜과 역사의 기억을 지우고, 낮에는 가득 찼다가 밤에는 텅 비어버리는 어둠의 도시, 다만 값비싼 주상복합의 몇몇 불빛만이 찬란한 도시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꿈꿔온 진정한 서울의 모습은 결코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나연 '깜찍한 브이'
  • 나연 '깜찍한 브이'
  • 시그니처 지원 '깜찍하게'
  • 케플러 강예서 '시크한 매력'
  • 솔지 '아름다운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