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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8> 골목

입력 : 2013-03-16 16:24:52 수정 : 2013-03-16 16:2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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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미로 같이 엉킨 골목길…공동체 만들어 안전과 휴식 제공
차 들어오며 골목길 사라지기 시작
두부 가르듯 진행되는 재개발로 600년간 숙성된 서울의 멋·향 파괴
# 수선전도, 산과 물을 담은 서울을 그리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1820년대 전후 서울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목판으로 만들어지고 대량으로 인쇄되어 널리 퍼졌다.
우리 집 벽에는 커다란 지도가 한 장 붙어 있다. 지도 상단에 ‘수선전도(首善全圖)’라고 크게 쓰여 있는 그 지도는, 사실 만들어진 시기나 제작자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법이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선생이 만든 것이 거의 확실한 서울의 지도이다. 제작 시기는 대략 1824년에서 1834년 사이라는 설이 있고, 지도에 자하문 밖에 있던 ‘총융청’의 명칭이 ‘총신영’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40년대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1820년대 전후 서울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헤아려보면 대략 180∼190년 가까이 된 지도이다. 당시는 지도들이 아주 귀하던 때였는데, 이 지도는 목판으로 만들어지고 대량으로 인쇄되어 꽤 널리 퍼졌었다고 한다.

그 지도의 원본인 목판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는 종로에 있는 지도사에 들렀다가 한지에 인쇄해서 파는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한 장 사서 액자에 끼워 식탁 옆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식사할 때마다 혹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들여다보며 오래전의 서울로 들어가곤 한다. 그런데 그 여행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한번 들어가면 헤어나질 못하고, 심지어 가족들에게 같이 들어가 보자고 꼬드기기도 한다.

수선전도는 지도이기 이전에 아름다운 그림이다. 서울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산과 바구니 안에 담긴 것처럼 아늑하게 들어서 있는 옛 서울의 시가지, 그리고 그 안에 굵고 가는 선들로 표현되어 있는 길과 물과 집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복잡하고 잘 읽히지 않지만, 마치 어두운 곳에 들어가 잠시 후면 눈이 익숙해지는 것처럼 점점 시선이 구체적인 공간의 이름들로 옮아간다. 다양한 궁궐과 관청 그리고 동네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다리들이 서울의 내용을 채워나간다.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의 골목이 그 안에서 활발히 지나가고, 우리가 커다란 길로 알았던 곳이 예전에는 물길이 흘러내리던 곳이었고, 경복궁에는 전쟁의 참화로 주춧돌들만 어지러이 남아 있다. 서울이 아주 복잡하면서도 나름의 질서를 가진 도시라는 것이 읽혀지고, 지금의 길들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 길들의 연원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지를 알게 해준다.

물론 사대문안이 자세히 표현된 것에 비해 성문 밖으로 나가면 중요도에 따라 생략되고 함축된 모습에서 예전의 지도가 정확성을 담보로 하는 지금의 지도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마치 사람들의 말투가 지금과 다른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이지, 진실 여부가 다른 것은 아니다. 조금은 어눌하게 그려놓은 그 지도를 볼 때마다 내가 깜짝 놀라는 것은, 기계적인 정확성은 없지만 한없이 진실에 가깝고 감정이 들어 있고 관계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오래된 도시들이 다 그렇지만 서울은 특히 산이 많고 물이 많은 도시였다. 그리고 그 물들 주변으로 동네와 골목길이 형성돼 있다. 그 하나하나의 골목들이 모여 전체 서울의 표정을 주고 냄새를 만들어준다. 그것은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이며 인간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와 욕망들이 뒤엉키며 그 사이에 아슬아슬한 합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통의동 한옥 골목길 스케치(2002).
# 골목,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골목이란 가장 강력한 건축이다. 골목에서는 보이지 않는 경계와 규칙들이 살아있으며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 안에서는 안전이 있고 협동이 있고 휴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국 도시란 그런 단위 공간들을 어떻게 엮어 나가느냐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고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인데,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는 모든 도시들은 나름의 독특한 구성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줄곧 살아온 나에게 골목이란 무척 중요한 인자이다. 어릴 때 나의 놀이는 문만 열면 나오는 동네의 골목들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미지의 정글을 헤치고 다니는 것이나 미로를 탐험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나는 지금의 을지로3가 뒤켠에 있는 입정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는데, 지금도 내가 살던 골목이 그대로 남아있다. 차도 들어가지 못하고 어딘가 슬럼한 것이 쉽게 들어가지지 않는 어떤 배타적인 영역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 서울의 모든 골목들이 그런 스케일과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평평한 땅위에 집들이 불규칙하게 들어서 있고, 골목이란 것이 밖에서 볼 때는 도저히 계속 이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정도로 짧아 보인다. 그러나 그 안은 무척 길고 또 길다.

무언가를 아는 과정은 마치 골목길을 헤매는 것과 비슷하다. 잘 알지 못하는 길로 들어가 무작정 헤매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알고 있는 길과 만나게 된다. 그렇게 헤매다 보면 길들의 연관성을 알게 되고, 어느 길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디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며, 가장 재미있는 길은 어디이고…하는 나름의 체계가 생긴다. 그것은 지식이 쌓이고, 내 안에서 체계가 생기고 깊어지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그런 동네 골목들이 차가 들어오면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앉아있거나 아이들이 뛰어놀던 골목이 차가 지나가고 주차하는 공간이 되면서 알게 모르게 공동체의 영역이 변형되었다. 편리가 안전을 위협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던 골목이라는 기본적인 도시공간이 상실되게 된 것이다. 

끊길 듯 끊임없이 이어지는 통의동의 좁은 골목길. 차가 들어오지 않는 넓이라 오롯이 사람만을 위한 길로 남아 있다.
2000년이 시작되는 무렵, 나는 우연히 통의동이란 동네에 갔다가 우리가 알고 있던 예전 골목들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그 풍경에 정신을 빼앗겨 훌쩍 이사가서 살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90년대에 불어 닥친 건설 붐으로 서울의 많은 주거지역이 다세대, 연립, 다가구주택 등 다양한 이름의 주택들로 과밀해지며 동네라는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던 때였다. 한 세대가 들어서 있던 땅이 서너 배 이상 용량을 키우며 동네의 밀도는 높아지고, 때마침 불어온 ‘마이카 붐’에 힘입어 동네에는 사람뿐이 아니라 차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사람 수는 늘어났지만 평균 거주기간이 짧아지며 익명성이 켜졌고, 미약하나마 가지고 있던 공동체의식이 사라지며 동네 인심이라는 말이 들어가 앉을 구석이 없어졌다.

그 와중에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곳은 대부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였다. 이를테면 도저히 차가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입지가 불리한 산동네이거나-물론 토목기술의 발달과 과도한 아파트 건설 붐으로 그런 산동네마저 중장비가 밀고 들어가 거대한 토목옹벽을 거느린 아파트로 개발되기는 했다- 정치적 군사적 이유로 개발을 원천적으로 막아놓은 곳이다. 통의동은 후자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그 주변은 청와대와 청와대를 보조하는 여러 숨은 기관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이라 심하던 때에는 청와대 방향이나 대로변으로는 창문도 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박정희 정권 초기 몇 년 동안은 청와대를 개방하기도 해서 집안 어른들과 손잡고 구경 가기도 했었는데, 1968년 1·21사태와 유신정권으로 접어들며 정권이 점점 삼엄해지고 살벌해지며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동네가 마치 냉동상태로 보존되었다가 어느 날 어느 시에 해동된 인간처럼, 무언가 오래된 시간이 들어있고, 낡은 패션을 하고 있으나 지금 보기 힘든 인간의 맛이 나서 그에 매혹되었다. 

90년대 전후 연립주택들 건립 붐이 일면서 동네 골목의 인간적 스케일과 공동체가 사라졌다. 사진은 서울 녹번동 연립주택.
# 사라진 골목, 사라진 동네


우리 집을 빙 둘러싸며 길이 나 있었는데, 특히 집 뒤편의 골목으로 들어가면 얼핏 막다른 골목처럼 짧아 보이지만, 길 끝에 도착해 꺾어지면 또 어슷하게 길이 이어지고, 그 길은 다시 짧게 구부러져 있는데 들어가면 또 어슷한 길로 이어진다. 골목의 폭이 한 길도 되지 않아 어떤 자동차도 들어올 수 없어서, 동네 아이들이 그 안에서 여전히 뛰고 있었고, 동네 할머니들이 여전히 부채로 바람을 휘휘 일으키고 있었다. 여전히 골목은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걷다 보면 큰길 건너 동네는 창성동이 되고, 다시 효자동이 되고…. 어느새 그 동네에서 제일 큰 집인 청와대에 도착하게 된다.

거기 사는 동안 우리 식구는 평생 산보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처럼, 기갈이 든 채 밥상을 받은 사람처럼 허겁거리며 열심히 산보했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열심히…. 그러다 보니 예전에 을지로에서 시작해서 광화문까지 골목으로 다니던 생각도 나고 해서 인근을 헤매보기 시작했다.

적선동, 사직동, 수송동, 청진동, 관철동…. 동네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블록 전체가 뭉개지고 그 자리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거대한 비석 같은 건물로 치환된 곳들도 있었지만 골목들은 어렵사리 살아남아 있었다.

마치 땅이 꺼지면서 지상으로 드러난 단층처럼 쌓인 많은 시간의 수고와 노력과 기쁨과 슬픔들이, 골목 안에서 나에게 한번 읽어보라며 몸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단층들에는 어떤 역사책이나 사진이나 그림에서도 담을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역사가 입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읽을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맛을 볼 수도 있으며, 결정적으로 한꺼번에 열려 있는 우리의 모든 감각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역사의 지층이 깊은 오래된 도시에 가면 우리는 감동을 받고 쓰러진다. 그러나 그 감동의 실체를, 그 감각의 낱낱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눈으로 본 장소에 대한 기억만 되살리며, 좋다든가 훌륭하다든가 감동적이라든가 아주 오래되었구나 하는 식의 통상적인 감상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도시란 역사를 담고 있는 도시란 그렇게 간단히 계량하는 것이 아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맛과 향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데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문화로 대변되는 여러 가지 정신적인 물리적인 기술과 지혜가 쌓여야 하고, 독특한 장소성이 가미돼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단지 재료의 혼합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이 만들어지는 숙성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서울이라는 도시는 훌륭한 재료들과, 600년이란 시간으로 숙성된 맛과 멋과 향기를 뿜어내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귀중한 인류의 자산이다. 문제는 그런 인식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특히 도시를 맡아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도시의 효용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서울이라는 도시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도시가 어떻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자각도 없다.

그들은 도시를 반듯하게 두부 가르듯이 갈라서 재개발이라는 명목의 도시 파괴를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한국전쟁 당시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땅에 관심이 없는 외국의 군인들이 지도를 펴고 자를 하나 꺼내 와서 남과 북을 반으로 쭉 썰어 38선을 그어내었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자하문길과 경복궁 서쪽 길 사이에 차가 들어갈 수 없던 좁은 골목이 하나 있었다. 차는 빙 돌아가야 했고, 아이들은 놀이터 대신 거기서 날아다녔지만 사실 오래전 이미 인왕산 아래까지 직선으로 건너갈 수 있는 도로가 계획되어 있었다. 어느 날 그 ‘선’대로 도로는 넓혀졌고 사람들은 늘 그렇듯 또다시 골목을 빼앗겼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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