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7> 세상에서 가장 큰 집

입력 : 2011-12-21 01:46:16 수정 : 2011-12-21 01:46:16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인 남명
지리산 천왕봉 잘 보이는 곳에 집 짓고 후학양성하며 생 마감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 뜻처럼 세상에 큰 울림 주는 듯 꼿꼿이…
# 큰사람, 조식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퇴계와 같은 해(1501년)에 태어나 학문적인 깊이와 높이를 서로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대학자였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은 처사(處士)로 산 사람이다. 처사, 은사(隱士), 유일(遺逸) 등은 모두 초야에 묻혀 공부에 매진하는 명망가들을 이르는 말인데, 조식은 졸기에서도 ‘처사‘라 불릴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심지어 퇴계가 자신의 묘명에 은사라는 말을 쓰고 싶어 한 것을 비판하고 자신과 같은 사람도 은사라 부르기엔 부족하다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

“삼동(三冬)에 베옷 닙고 암혈(岩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난, /서산(西山)에 해 지다 하니 눈물계워 하노라.”

중종이 승하하자 남명이 읊은 시조이다. 내, 너에게 받은 것은 하나도 없고, 받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는 나대로 살았지만 네가 세상을 떴다 하니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뭐 그런 의미가 아닐까. 남명의 기개가 느껴진다.

조선시대에 나라를 뒤흔든 몇 명의 여성 중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있다. 첫 왕후의 소생인 인종이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죽고, 자신의 아들인 명종이 열두 살에 왕이 되자 수렴청정하며 권력을 쥐게 된 사람이다. 문정왕후가 외척인 윤원형과 그 첩인 정난정, 승려 보우 등과 함께 을사사화 등을 일으키며 반대파를 숙청하고 국사를 어지럽힌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하다. 명종 10년(1555) 그 서슬 퍼런 시절, 재야에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아 여러 번 천거된 조식을 명종이 단성현감에 임명하자, 조식은 곧바로 사직상소문을 올린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자신을 고아로, 모후를 과부로 단정한 이 과격한 언사를 명종은 매우 불쾌해 했지만 차마 처벌하지 못했다. 당시 권신들로 인해 언로가 막히고 어지러운 정치상황으로 인해 숨은 인재들이 관직에 나오려 하지 않는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한 조식의 글을 성균관 유생 500여명을 비롯한 많은 대신과 사관들이 옹호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조식 졸기’에 의하면 그는 평생토록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한다. 조식의 학문은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고,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배우는 자들이 공부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 그의 제자 중에 곽재우, 정인홍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이 많은 것도 실천을 중요시한 그의 가르침 덕분이다.

단속사 터의 정당매(600년), 남사마을의 원정매(700년)와 더불어 산청삼매로 불리는 남명이 심은 매화나무(500년)와 최근에 단청을 입히고 주변을 정비한 산천재.
#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 산천재


얼마 전 지리산과 가깝고 가야산과도 가까운 의령에서 일을 보고, 동지가 다 되어가는 계절의 짧디짧은 해를 잡아 늘이며 지리산 쪽으로 달렸다. 해는 이미 졌지만 생미량을 지날 때쯤 멀리서 지리산의 느려터지고 육중한 윤곽선이 보였고 그 위로 이미 들어가버린 해의 마지막 자취가 아주 붉게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국도에 남은 그 감동을 진하게 맛보며 달려갔다.

이상하게 지리산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리산에 가면 그냥 코가 찡해진다. 그 덩치가, 그 느림이 감격스러우며, 그 골격이 감격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싫은 내색, 좋은 내색 전혀 없이 사람을 턱, 안아주는 품이 감격스럽다. 그래서 지리산 근처에만 가도 마음이 푸근해지며, 사람으로 태어나 이왕이면 지리산의 품 정도는 되어야지, 스스로 다짐해보곤 한다. 그리고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남명의 집 산천재가 있다.

조선 집 중 최고는 산천재이다. 물론 자로 재거나 저울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닌 나의 개인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산천재는 내가 본 제일 큰 집이고 제일 좋은 집이다. 건축이라는, 집이라는 것은 그냥 지붕 있고, 벽 있고, 바람 막고, 비 피하는 그런 껍질이라는 의미 외에도 자기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짓는 이의 사고와 철학이 담는 하나의 조형물이며 영조의 산물이 바로 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산천재가 그렇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천재의 주인 남명은 그런 집을 지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산천재(山天齋)라는 이름은 주역의 대축괘(大畜掛)에 나오는 말로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이다. 어떤 하늘이 산속에 담길 수 있으며 어떤 산이 하늘을 담을 수 있을까.

“대축(大畜)이란 크게 저축한다는 뜻이다. 대축괘는 간괘(艮卦)와 건괘(乾卦)로 구성되는데 간괘가 산(山), 건괘가 천(天)을 나타내 ‘산천(山天)’이란 용어가 생겨난다. ‘山天’으로 꾸며지는 이미지는 ‘하늘이 산 가운데 있는 모습’이다. 또한 주역에서 산은 ‘멈춘다(止)’, 천은 ‘창조적인 힘’이란 속성을 갖는다. 이 둘의 속성을 다시 합성해보면 ‘산속에서 창조적인 학문의 힘을 키운다’는 뜻이 된다. 산천재란 바로 그와 같은 집을 말한다.”(김두규 우석대 교수, ‘주간동아’ 473호)

산천재를 처음 간 것은 1990년대 말 어느 겨울이었다. 그 전에 몇 번 구형왕릉, 대원사, 율곡사 등 근처를 지나가기도 했고, 남명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지만, 덕산에서 시천으로 들어가는 어귀 큰길 변에 있는 그 집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산천재에 대해 이렇다 할 감동적인 설명을 들은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건축을 형태로만, 혹은 그저 건물들로 둘러싸인 공간으로만 파악하고 양식적이고 미학적인 접근만 하는 우리의 건축, 특히 전통건축 공부의 한계가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산천재의 깊이를 모르고 남간정사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사무실 내고 처음 받은 일이 지리산 한복판에 집을 짓는 일이었다. 일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어 그 사이 더 늦게 시작한 집이 먼저 지어지기도 했지만, 지리산의 모든 계절과 모든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집의 설계가 거의 끝나고 산청군청에 허가를 내던 무렵, 늘 그렇듯이 외지인이 남의 동네에 건물을 지을 때 겪어야 하는 이런저런 불편함과 퉁명스러움을 견뎌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산천재 대문으로 진입하면 너른 마당과 덕천강과 천왕봉이 겹쳐보이도록 집을 살짝 비껴서 배치하였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고, 산속의 추위는 장난이 아니었다. 일 중간에 두어 시간 여유가 생기자, 문득 몇 번 들어가려다가 말았던 산천재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곳에 갔다.

남명을 연구하고 기념하는 작은 집이 한 채 있고, 너른 마당에 90도로 꺾어 만든 길을 참하게 걸어 들어가자면 낮은 담 가운데 문이 하나 서 있다. 문을 들어가면 흙무더기 위에 삐쭉 나무가 서 있고 뒤로 큰 산의 윤곽이 보인다. 옆으로 비켜 서 있는 또 하나의 건물을 조금 벗어나면 기단도 낮고 폭도 세 칸밖에 되지 않는 팔작지붕 낮은 집이 한 채 서있다. 그걸로 끝이다.

절묘한 공간의 구성도 없었고 아름다운 건물의 집합도 없었고 조선집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다양한 마당조차 없었다. 그냥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처럼 흙무더기 위에 매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무언가를 기다리는지 낮고 꼿꼿한 건물이 한 채 있을 뿐이다. 나는 집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긴 담을 죽 살펴보았고 나왔다. 남명이 그 집에서 기다린 것은 무엇일까? 

지리산 인근에서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라고 일컬어지는 산천재 뒷마당.
# 세상에서 가장 큰 집


산천재는 남명이 61세에 지은 집이다. 그는 평생 산해정, 뇌룡정 등 여러 채의 집을 지었는데, 마지막으로 지리산이 맘에 든다며 지리산에 가까운 덕산으로 들어와 생을 마칠 때까지 산천재에서 살았다.

“덕산에 터를 잡고 德山卜居/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겠냐만, 春山底處無芳草/ 하늘 가까운 천왕봉이 마음에 들어서 只愛天王近帝居/ 빈손으로 왔지만 먹을거리 걱정하랴? 白手歸來何物食/ 십리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銀河十里喫有餘”

나는 등산을 그리 즐기지 않아 배낭 메고 지리산을 오른 적도 없고 단지 지리산이 키워놓은 여러 가지 집들과 절들을 구경하고 기껏 집을 짓는다고 무릎 정도에 올라가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주로 지리산 언저리를 빙빙 돌며 옆이나 앞모습,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지리산이라는 산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어디서 보건 어디에 앉건 커다란 울림을 준다.

백두산의 흐름이 한반도의 척추를 타고 내려와 소백산에서 크게 꺾고 바다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큰 용틀임을 하는 곳이 지리산이다. 그리고 누구든 어려운 사람, 슬픈 사람이 찾아가면 받아주고 숨겨주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한없이 자애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척 엄하고 좋건 싫건 내색을 하지 않는 무척 어려운 분이다.

지리산은 그런 산이다. 남명은 그 기개와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집을 짓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점을 찍었다. 마치 고수의 한 획처럼 지리산과 덕천강 사이에 한 점을 찍은 것이다.

그래서 집은 덕천강의 흐름을 담으며 그 사이에 텅 빈 마당을 두고 작고 당당한 집을 한 채 지어놓고 지리산을 베고 누워 있다. 산속에 하늘을 담기 위해 산이 얼마나 커야 하며 산속에 하늘이 담기기 위해서 하늘은 얼마나 유연하고 숙여야 하는가. 남명은 하늘을 담는 산이었고 산에 담기는 하늘이었다. 스스로 삼가는 경(敬)을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실천하면서, 안으로만 갈무리하지 않고 세상에 큰 울림을 주는 의(義)로 행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세상의 이런저런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산과 하늘처럼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유연한 모습으로 살고자 했던 진정한 처사의 집이 바로 산천재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 『작은 집, 큰 생각』공동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나연 '깜찍한 브이'
  • 나연 '깜찍한 브이'
  • 시그니처 지원 '깜찍하게'
  • 케플러 강예서 '시크한 매력'
  • 솔지 '아름다운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