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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6> 만화

입력 : 2011-12-07 04:05:59 수정 : 2011-12-07 04: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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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이루어낸 갖가지 풍경들 만화 속에서 배워
시대 반영한 주인공들 애환 함께
여러 편견으로 천덕꾸러기였지만 미지의 시·공간 경험하게 해줬고 우리의 삶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국가 공인 만화방인 남산에 있는 ‘만화의 집’. 국내에서 출간되는 대부분의 만화책과 잡지, 관련 서적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 만화는 판타지다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일들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놀라거나 괴로울 때마다 위안 삼아 떠올리는 이 대사는 신일숙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지만, 뭔가 멋지게 들리지 않는가. 이 만화는 마치 고대 벽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하늘거리는 복장의 캐릭터들이 우글거리는 아르미안이라는 고대 가상왕국이 배경이다. 실제 존재했던 페르시아나 그리스의 역사와 교차되고, 신화나 성서, 역사 속 인물과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매혹적인 판타지로 창조된 한국 만화의 걸작이다.

주인공인 네 명의 왕녀는 사랑 앞에 무력한 여성으로서, 혹은 모성애도 억눌러야 하는 지배군주로서, 바람 같은 자유인으로서 각자 대비되는 삶을 살아간다. 해피엔딩보다는 비극에 가깝고, 완결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리는 바람에 수많은 독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순정만화의 상투적인 전개를 뛰어넘어 독립된 자아로서의 여성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 덕에, 딸들에게 꼭 한번쯤 읽혀야 하는 작품으로 회자한다.

나도 아이들에게 이 만화를 읽혀보려 했는데 잘 되지는 않았다.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다양한 인간관계와 얽히고설킨 복선과 페이지마다 가득한 지문 대신, ‘얍!’ ‘ㅋㅋ’ 하는 짧은 대사와 마치 게임처럼 한 단계씩 휘리릭 해결되고 넘어가는 단순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세상이 복잡해지는 만큼 생각은 단순해지는 것인가.

신일숙의 또 다른 판타지 작품 ‘리니지’가 게임화되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듯, 만화가 게임이나 드라마, 영화의 원작이 되거나 영향을 주고받는 건 이제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가령 인간이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는 세계관을 보여준 영화 ‘매트릭스’는 일본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영향을 받았는데, 만화적 상상력이 현실의 옷을 입고 과학으로 진화해가는 가능성의 단서가 아닌가 싶다. 

영화 ‘매트릭스’에 영감을 준 ‘공각기동대’.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를 오시이 마모루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고백하자면 나의 상상력을 키운 것도 “8할이 만화”다. 나는 글을, 역사를, 사람들이 살아가며 이루어낸 갖가지 풍경들을 만화에서 배웠다. 기억되는 시간 훨씬 이전부터 그 네모난 칸 안에서 울고 웃는 사람들의 표정과 움직임에 사로잡혔다. 고등학생 때 입시를 앞두고 전교에서 유일하게 사회과 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택했던 적이 있다. 그 바람에 사회시간마다 빈 교실에서 혼자 독학으로 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때 역사 참고서를 뒤적이던 시간이 그토록 즐거웠던 것도 역시 만화 덕이다. 아마도 ‘베르사유의 장미’를 보지 않았더라면,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배경을 그토록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종교개혁, 중국의 삼국통일 등등의 꽈배기처럼 꼬인 역사와 그 이면의 권력투쟁과 인간군상의 다양함을 ‘베르사유의 장미’나 ‘올훼스의 창’, 김혜린의 ‘북해의 별’ 혹은 고우영의 ‘삼국지’나 ‘수호지’ 등을 뒤적이며, 그 주인공들과 함께 만화 속 공간을 달리며 배워갔다. 학교와 집, 공부와 야간자습으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다른 취미라곤 알 수도 가질 수도 없었던 그때, 만화는 내게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방구였다.

엄희자 차성진 김동화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원수연 이정애 권교정 고우영 이상무 허영만 이두호 이현세 장태산 박봉성 등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이 줄줄이 기억난다. 서정적인 그림체와 잔잔한 성장담이 감동적이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로 데뷔하여 ‘내 이름은 신디’로 당시 여고생들에게 대단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김동화, 우주적 스케일 속에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SF대작 ‘레드문’, ‘별빛 속에’를 그린 황미나와 강경옥, ‘루이스 씨에게 봄은 오는가’ 등에서 유쾌한 지적 유희를 선보인 이정애…. 나의 세상은 그들이 창조한 판타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희재의 ‘새벽길’(1988년 2∼4월 발표). 상계골이 아파트촌으로 개발되던 무렵 아이를 연달아 잃은 한 가장의 이야기다.

# 만화는 추억이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도 어린 시절, 글을 배우기도 전부터 만화방에 들락거렸다. 물론 지금도 아이들은 글보다 그림을 먼저 접하게 되고 그림을 통해서 글을 익히는데,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만화라는 형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만화는 단순한 취미 혹은 심심파적의 여가를 즐기는 소일거리를 넘어서, 생활에 밀접하게 붙어있는 필수 불가결한 어떤 것으로 자리 잡은 지 꽤 되었다.

만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누나들을 따라서 예전에 살던 입정동 어느 후미진 골목의 만화방에 갔었던 것이다. 그 집은 가겟방에 나무의자를 놓고 만화가 진열되어 있던 일반적인 형식이 아니라 그냥 온돌방으로 신발 벗고 들어가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벽에 등 기대고 쭉 앉아서 입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각자 손에 든 만화에 푹 빠져서 보고 있었다. 그때 누나를 꼬여서 읽어달라고 하고 그 내용을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네모난 칸 안에 들어있는 그림들을 열심히 따라갔었다. 간혹 드나들었던 만화방의 그 거친 지질의 만화책과, 꼬리꼬리한 냄새와 따뜻한 아랫목이 기억난다. 그 컴컴한 기억이 집에 있는 빛이 잔뜩 들어가고 누렇게 변색된 흑백사진처럼 희미하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내가 스스로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막상 나는 만화를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다. 다른 놀거리가 없을 때 보는 정도였는데, 주변의 친구들은 만화만 보면 열광을 했다. 심지어 그 안에 있는 내용에 감정을 이입해서 재현을 해주곤 했는데, 사실 나는 그게 조금 웃겼다. 어차피 지어낸 이야기였고 어찌 보면 뻔한 내용인데, 아이들이 마치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이나 자기가 사는 곳 어디선가 일어났던 일을 되뇌듯이 열을 올리며 몸동작까지 섞어가며 설명하는 것이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집합소였던 만화방, 컴컴한 가게 바닥에 주인이 먼지 날리지 말라고 가끔 물을 뿌려 대고, 나무판자로 엉성하게 만들어놓은 긴 의자와 벽에 묶어놓은 고무줄 안에 얇고도 색들이 건성으로 칠해져 있는 만화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그 아래 상고머리, 빡빡머리 남자아이들과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철모같이 머리를 동그랗게 깎은 소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각자의 생각에 취해서 싱글거리며 책에 빠져 있었다. 주인아저씨나 아줌마는 매의 눈으로 아이들을 감시하고…. 만화를 열심히 보지도, 아주 좋아서 미치는 것도 아니면서도 거기 가면 봐도봐도 늘 모자란 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 앞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만화방 세 군데 중 한곳이 ‘10원에 하루 종일’이라는 광고를 했다. 거의 혁명적인 상황이었고 아이들은 야호∼하며 달려갔는데 단, 나갔다 들어오면 무효라는 매정한 규정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냥 땡이나 꺼벙이가 나오는 만화 같은, 이를테면 명랑만화를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하루 종일 보라고 해도 볼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무협이나 탐정물 등등 내용도 복잡하고 긴 만화를 좋아하는 내 친구들이 환호하고 신나게 보는 모습에, 덩달아 나도 왠지 흐뭇하고 푸근했다.

아무튼, 나와 만화는 그저 그런 관계였다. 그림체가 비장하다든가 내용이 복잡한 것은 피하고 주로 임창이나 신동우, 길창덕 풍의 그림을 선호했다. 어릴 때 본 만화 중에 그래도 나에게 강렬한 기억을 준 만화는 세 권짜리 길지도 않은 분량의 ‘오뚝이 대행진’인데, 최근에 일본 만화가 원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형사라서 늘 집을 비우고, 자상한 어머니와 대학 다니는 큰딸부터 갓난아이인 막내까지 무척 많은 아이들이 복작거리며 사는 그냥 일상의 이야기를 다룬 담담한 내용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작은 거실에 놓여 있는 탁자 위에 따뜻한 차를 내어준다. 가끔 불쑥 집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아버지도 늘 아이들과 자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심심한 만화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만화가 제일 좋다.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라서였는지,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작은 에피소드들 때문이었는지, 소도시와 허름한 아파트가 만들어주는 공간감과 스케일이 좋아서였는지, 혹은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만드는 느낌인지…. 그러나 그 만화는 물론 절판이 되었고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종적을 알 수는 없다. 

‘만화평론가 선정 해방 이후 좋은 우리만화’ 1위에 뽑힌 이희재의 ‘간판스타’(1986년 10월 발표).

 # 만화는 현실이다

돌이켜보면 만화의 주인공들은 시대를 반영하며, 독자와 함께 성장해왔다. 전쟁 후 아직 시절이 어려웠던 60∼70년대 만화 주인공들은 주로 고아거나 잃어버린 부모나 형제를 찾으러 다니곤 했다. 그때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만화영화도 무척 히트했었는데, 대체 엄마는 왜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꾸만 다른 곳으로 떠나는지, 어린 마르코가 하염없이 엄마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가슴 졸이며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엔 압축성장시대의 반영이랄지, 스포츠 만화나 캔디 스토리처럼 자수성가하거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담 같은 것들이 많아졌다.

그런 대부분의 만화가 아동용이던 청소년 시절을 지나 대학에 다닐 무렵이 되자 성인들도 즐겁게 볼 만한 만화들이 많이 나왔다. 이현세 박봉성 허영만의 만화는 탄탄한 줄거리와 치밀한 구성,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환상적인 그림으로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희재 오세영의 작품처럼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모습과 슬픔과 기쁨을 진실한 시각과 가감 없는 내용으로 기록한 리얼리즘 만화가 등장하게 된다. 특히 그중 이희재 선생이 만들어낸 단편집 ‘간판스타’는 압권이다.

3년 만에 귀향한 이씨네 딸 경숙은 온 동네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답답한 시골을 탈출해 서울의 번듯한 회사에서 돈까지 다달이 부쳐주는 효녀인 그녀는 동네의 간판스타다. 모두가 동경하는 그녀는 알고 보니 서울에서는 동백섬 주점의 간판스타이기도 하다.

“리얼리즘! 우리 삶의 겉자락 속에 감추어진 현실의 참모습을 들춰주는 부유하는 의식을 있어야 할 자리에 갖다놓는, 바로 그런 작품에 붙여지는 영예로운 이름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예술에서 추구해왔던 가치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희재를 발견함으로써 우리 만화에도 비로소 이 기준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박재동, ‘만화! 내 사랑’ 중에서)

이희재의 ‘간판스타’는 1997년 미술전문지 ‘가나아트’에서 발표한 ‘만화평론가 선정 해방 이후 좋은 우리 만화’ 중에 첫손에 꼽히기도 했다. 그다음으로 허영만의 ‘오! 한강’, 이두호의 ‘임꺽정’,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 박수동의 ‘고인돌’,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고우영의 ‘삼국지’, 박재동의 ‘목 긴 사나이’,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그리고 김수정 ‘날자! 고도리’ ‘아기공룡 둘리’, 김혜린 ‘불의 검’이 이어진다.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간판스타급 작품들이지만, 안타깝게도 몇몇 작품은 이제 절판되어 볼 수가 없다.

그간 여러 가지 편견으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천덕꾸러기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지만,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가보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해주고, 미래의 모습도 그려주며 김치의 속 양념처럼 생활 속에 스며들어 우리의 일상을 풍성하게 해주는 만화. 우리는 만화로부터 세상을 배우고 만화를 통해 스스로 일으켰으면서도, 만화의 존재를 애써 부정했었다. 일본만화의 공습과 스캔본으로 무너진 유통과정, 열악한 창작환경 속에서 늘 위기를 겪지만 고맙게도 만화는 계속 나온다. 만화산업 진흥과 저작권 보호 등을 위한 만화진흥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www.kcomics.net/love)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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