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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5〉 텔레비전

입력 : 2011-11-15 17:26:39 수정 : 2011-11-15 17: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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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대신하고 모아주고 안방이 되고 광장이 되어 일상의 시·공간을 지배 # TV는 가족이다.

“텔레비전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 (한때 텔레비전이 부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테레비가 가족을 침묵시키고 둘러앉게 한다/ 가족 중 테레비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테레비는 아버지처럼 맘도 넓다/ …(중략)…/ 어머니 테레비를 갖다가 버릴까요/ 독서가 잘 안 돼서 그러는데요/ 나는 요따위로 싸가지 없이 불효막심하게/ 말할 수도 없다 테레비가 정말 나의 아버지인가/ 그렇다면 나는 꼭 테레비를 모시고 있어야 한다/ 이 테레비 없는 후레자식/ 네 테레비가 널 그렇게 가르치디/ 요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성의 시대는 끝났다 잡성의 시대에/ 테레비가 없다면, 끔찍한 상상이지만/ 나는 무엇을 스승으로 삼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간지러움, 강제의 웃음이라도 웃을 수 있겠는가…(후략)”(함민복의 ‘오우가-텔레비전·1’ 중에서)

TV 보는 아이들(출처: http://collections.mnhs.org/).
일상의 삶은 출근과 퇴근, 일과 휴식이 끝없이 반복, 순환되며 흘러간다. 눈물 날 정도로 지겹고 지루하지만 그 일상 속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내가 있다. 그러니 쉽게 일탈할 수도 없다. 그러한 일상의 권태로움을 달래주는 가장 좋은 친구는 역시 텔레비전(TV)이다. 갓 말을 배운 아이부터 팔십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바보상자’는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즐거움을 나누어 준다. 아무리 쓸쓸한 방에서도 TV를 켜는 순간부터 나는 혼자가 아니다.

TV를 보는 방은 집의 중심이 되는 안방이었고, 거기서 ‘안방극장’이란 단어도 나왔다. 오랫동안 우리의 주거공간에서 거실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이유도 TV 때문이었다. 저녁이면 모두 거실 한가운데 늠름하게 자리 잡은 TV 앞에 모여, 모이를 나눠 주는 어미새를 바라보듯 그 조그만 상자가 보여주는 ‘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간혹 수신상태가 안 좋아지면 아버지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방송국 전파가 전해주는 ‘말씀’을 잡기 위해 안테나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리곤 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던 다른 가전제품과 달리, 사람들은 빨리 좀 더 큰 TV를 장만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고, 좀 더 큰 TV가 들어올 수 있는 큰 거실이 있는 집을 원하기도 했다. 눈 나빠진다는 꾸중에도 아이들은 점점 TV 앞으로 다가갔고, 뉴스와 야구중계와 드라마 사이의 채널 다툼을 피해 방마다 TV를 들여놓는 집들도 생겨났다. 이제 TV는 고속버스에서도, 택시에서도, 손 안의 핸드폰에서도 열심히 전파를 수신해 준다.

간혹 고속버스를 타 보면 마치 매뉴얼에 그렇게 되어 있는 듯 채널은 9번에 고정되어 있다. 감히 채널을 돌리자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여섯시 내 고향’과, 가족들끼리 화해하고 눈물 흘리는 다큐멘터리와, 주인공은 바뀌는데 줄거리는 늘 똑같은 일일연속극과 뉴스를 승객들 모두 졸다 깨다 하면서 본다. 그 순간만큼은 버스 안의 모두가 한식구인 셈이다. 

종로구 관철동 296번지에 있던 HLKZ-TV. 1956년 개국하여 하루 2시간씩 방송했다(출처: http://cafe.naver.com/mamj8836).
# TV는 광장이다.

TV를 일찌감치 들여놓은 우리 집엔 연속극을 할 때나 혹은 김일과 천규덕이 나오는 레슬링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네사람들이 마치 거실에 모이는 집안식구처럼 우리 집 마당으로 슬그머니 스며들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내 뒤통수 근처에 모여 있다가 유혈이 낭자해진 김일이 박치기를 하는 순간이나, 시작부터 맞기만 하던 천규덕이 마음을 바꿔먹고 당수로 상대를 제압할 때 어김없이 일심동체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 순간의 TV는 작은 화면이 아니라 사람들이 둘러싸고 놀이판을 벌이는 마당이자 광장이 되었다.

TV가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기억나는 것은 1983년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다. ‘보통사람’이란 일반명사의 느낌이 누군가 때문에 좀 후텁지근해지기 전에 무척 유행했던 ‘보통사람들’이라는 일일연속극이 있었는데, 그 연속극을 ‘본방사수’하느라 우리 집 채널이 늘 9번에 고정되어 있던 무렵이었다.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원래 3시간 정도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전쟁 끝나고 3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이산가족을 찾는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7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가운데, KBS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5일 동안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애절하게 흐르고, 애타는 사연, 극적인 만남은 상관없는 사람들조차 눈물짓게 했다. 그때 방송국 마당에 줄을 섰던, 혹시라도 찾는 이가 나올까봐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TV 화면을 주시하던 사람들 속에 우리 가족도 끼어 있었다. 아버지가 해방 직후 헤어졌던 누님을 찾기 위해 우리 가족은 TV가 복음을 전해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끝내 만나지는 못했다.

TV는 그렇게 사랑을 싣고 오기도 하고, 온 국민을 한자리에 모으기도 한다. 평소에는 야구나 축구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국가대항전 중계만 있으면 나라를 구해야 하는 독립투사처럼 눈빛들이 형형해지며 TV가 있는 곳을 찾아 헤맨다. 2002년 월드컵 때가 절정이었다.

처음에는 식구들, 동네 사람들이 같이 응원을 위해 모였고, 역전이나 터미널에서 함성소리를 따라 지나던 발길을 돌려 모여드는 정도였는데,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며 모여드는 사람들을 건물이 감당하지 못하고 거리로 사람들을 토해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해일처럼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거리는 거대한 방, ‘광장’이 되었다. 대형 TV 아래 도시의 빈 공간을 새빨갛게 물들였던 ‘길거리 응원’에 참여한 사람은 한국-폴란드전 50만명에서 시작되어 한국-독일 4강전에는 650만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거리를 거대한 방으로 만든 월드컵 거리응원.
우리는 그때 광화문 바로 근처에 살고 있어서 매일 광화문 거리에서 들려오는 군중의 응원가를 생생하게 집안에 앉아서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월드컵이 시작되기 일 년 전부터 호들갑스럽게 시청 앞에서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이,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을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루로 자꾸만 불러들이는 행사처럼 느껴져 내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스로 땅을 파고 물을 퍼 올리며 오아시스를 만든 것이다. 자발적인 축제 속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당당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모두 즐거워했고, 흥분 속에서 이제 우리나라의 장밋빛 미래까지 활짝 열리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거기까지가 좋았다. 은근한 통제와 기업의 상업적 전략이 결합된 그 이후의 거리응원은 순수성을 잃고 시들해지고 박제되었다. 경제위기로 인해 움츠러든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거리의 대형TV는 다시 광고로 도배되었고, 광장은 다시 개인들의 주머니 속으로 회수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TV인 HLKZ-TV의 중계 모습.
# TV의 스마트한 진화

지금은 흔하디흔한 것이 TV지만, 한때 전자대리점 앞은 TV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극장이나 다름없는 명당자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TV 수상기가 등장한 것은 1954년 7월30일, 종로 거리 보신각 앞에서였다고 한다. 미국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사의 한국대리점에서 TV 보급에 대한 타당성을 알아보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당시 RCA사의 한국 대리점은 황태영이란 사람이 맡고 있었는데, 그는 정부의 의뢰로 라디오 자재 도입을 위해 미국에 다녀오며 수수료로 받을 돈 대신 TV 기자재를 받아온다. 그는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일본·태국에 이어 네 번째로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국 KORCAD(대한방송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9번 채널, 출력 0.1㎾, 호출부호 HLKZ를 사용한 HLKZ-TV의 등장이었다.

1956년 5월12일 7시30분에 선보인 첫 시험방송은 궁중 연례악 ‘취타’와 국악 합주곡 ‘수제천’이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화신백화점 앞과 서울역, 시내의 주요 상점 등에 설치된 TV를 통해 시청할 수 있었다. 방송은 하루 두 시간 정도 나왔다고 하는데,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인기가수가 출연한 쇼프로 등도 방송됐다. 당시 시중에 TV 대수는 불과 250대 정도였다고 한다. 쌀 한 가마니가 1만8000환이던 시절 14인치 TV 한 대값이 34만환이었으니, 일반인들에게는 다시 없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방송국은 보신각 옆 서울 종로구 관철동 296번지의 동일빌딩에 있었다. 원래는 1924년 한일은행 본점으로 지어진 건물로, 옥상에 모자처럼 얹혀 있던 돔 부분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다 한다. 광고영업이 영 여의치 않던 이 최초의 TV방송국은 1년 만에 운영권이 한국일보에 넘어갔다가, 1959년 화재로 사옥과 방송기재가 전소됐고, 부지는 이후 보신각이 확장되면서 보신각 마당으로 편입되었다. 채널 9번은 국영방송으로 회수되어 KBS TV의 개국으로 이어진다.

TV의 꽃은 역시 일상 같지만 일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을 다루는 드라마다. 잘나가는 드라마를 안 보면 사람들과 대화가 어려운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고현정과 이정재를 톱스타로 만든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기 위해 직장인들이 일찍 퇴근해서 ‘귀가시계’로 불리기도 했는데, 요즘은 반대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TV 앞으로 달려가는 것을 일컫는 ‘본방사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제시간에 방송을 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우리 집에서 본방사수의 원칙을 세운 프로그램은 ‘무한도전’뿐인데, 그나마도 다른 스케줄에 밀려서 못 보더라도 고화질의 동영상을 몇분이면 다운받을 수 있으니 도무지 긴장감이란 없다.

그러니 이제 함민복의 시에서 ‘테레비’는 조만간 ‘컴퓨터’ 혹은 ‘인터넷’으로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상에 들어온 이후 사람들은 TV의 ‘말씀’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입맛대로 골라 볼 수 있는 수십 개의 케이블 채널, 손안의 TV DMB, 눈 돌리면 어디든 TV가 있다. 다양한 선택권이 생긴 TV는 똑똑해지는 대신, 사람들을 모아 주었던 광장으로서의 역할은 잃어가고 있다.

거기다 지상파와는 달리 하루종일 방송을 할 수 있고, 중간광고도 허용되는 종합편성채널, 이른바 ‘종편’이 12월 개국을 앞두고 있다. 뉴스나 오락 등 단일 장르만 방송하는 케이블TV와 달리 모든 장르를 아우르고, 가입한 가구만 시청할 수 있다지만 이미 국민의 80% 이상이 케이블이나 위성TV를 시청하고 있기 때문에 지상파에 비해 불리할 것도 없다. 사업자로 허가된 4개 방송국은 모두 거대 언론사 계열이라 편향된 시각의 방송에 대한 우려도 크다.

사실 작년 최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평균 시청률은 우리나라 역대 드라마 중에 평균 시청률 1위를 기록한 ‘사랑이 뭐길래’(1991)나 ‘첫사랑’(1996)의 거의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방송사마다 나날이 멀어져 가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가족관계를 이리저리 꼬고 19금 영화를 방불케 하는 막장 드라마가 서슴없이 난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족을 대신하고, 가족을 모아주고, 방이 되고 광장이 되어 일상의 공간과 시간을 지배했던 ‘테레비’의 힘에 대한 믿음은 과연 아직도 유효한가? 텔레비전(Television)이란 원래 그리스어로 ‘멀리’를 뜻하는 ‘tele’와 라틴어로 ‘본다’를 뜻하는 ‘vision’이 합쳐진 단어다. TV는 인간의 감각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멀리,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해주던 가장 근대적인 공간 실천의 수단이었다. TV가 가고 있다는 ‘스마트한 진화’의 방향은 우리의 일상을 또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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