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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3〉 명동

입력 : 2011-10-12 05:01:47 수정 : 2011-10-12 05: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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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애환·낭만의 흔적 켜켜이… 명동은 예술의 바다였다
늘 사람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명동 거리.
층위, 여러 겹 쌓인 시간과 문화의 켜


층위(層位)라는 말은 지리학에서 지층이 쌓인 순서를 가리키기도 하고, 언어학에서는 어떤 종류의 언어 요소가 전체 언어 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치 즉, 음(音)에서 문장에 이르기까지 상·하위 요소 간의 밀접한 계층적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층처럼 여러 겹의 시간과 문화가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뜻으로 광범위하게 쓰인다.

그런데 그 층위는 단면으로 썰어 옆으로 볼 때는 압축된 시간의 켜로 보이고 위에서 볼 때는 모든 시간이 겹쳐져 형태를 짐작하기 힘든 하나의 복합체로 보여, 어떻게 보아도 그 각각의 의미와 각각의 존재방식을 읽어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때 필요한 도구가 바로 인간의 상상력인데, 상상력은 그저 치수를 통해 길이를 보고 깊이를 보고 높이를 보는 것보다 한층 높은 어떤 기준을 읽어내는 감각의 최고 지점이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단순한 조각들에서부터 완성된 시간의 모습을 상상력이라는 틀 안에서 집어넣고 휘휘 저어 복원한다.

대부분의 오래된 도시들이나 건물 등은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를 가진다. 문제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이 그 층위를 읽어낼 수 있는 감각이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럴 때 하는 말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았거나 살고 있는 곳이 거의 다 그렇듯, 서울에서 땅값이 아직도 제일 비싼 곳이라는 명동에도 수많은 문화적인 층위가 아주 두텁게 겹쳐져 있다.

한 켜를 걷어보면 일제강점기에 문화인들이 거닐던 길이 나오고, 또 한 켜에는 전쟁 후 우울한 문화인들의 길들이 나오고, 또 한 떼의 청바지를 입은 청년들이 쓸고 다니던 길도 나온다. 그리고 지금은 화려한 가게들과 국적불명의 간판들이 나부끼고,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남쪽 퇴계로와 맞닿은 늘봄다방 건물은 1층부터 4층까지 모두 다방이었던 명동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명동(明洞)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 5부(部) 49방(坊)의 하나인 명례방(明禮坊)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명동은 주택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고, 당시 가까운 충무로 일대가 상업지역으로 발전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다방, 카페, 주점 등이 번성한 상업지역으로 변하게 되었다. 해방 후 1946년에 ‘명동’으로 바뀌었다.

명동은 사방으로 각각 다른 대문이 있었다. 명동의 들머리에서 명동의 대문 역할을 하던 상징은 서쪽의 코스모스백화점 자리였다.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덩치 큰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며 그때그때 시류에 편승한 상업시설로 채워지면서 나날이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예전에는 자본주의의 시대가 열린다고 알리는 신호를 보여주었던 건물이다.

남산과 마주한 남쪽은 퇴계로 언덕에서 들어오는 길 변에 작고 다양한 건물들이 즐비했고, 어느 해에 지어진 늘봄다방이 간결하고 모던한 입면으로 우리를 맞아주기도 했었다.

저동과 맞닿은 동쪽으로는 멀리서도 우뚝했던 명동성당과, 건축가 김정수가 설계한 우리나라 유리 커튼 월의 시작이었던 성모병원이 있었다. 그리고 북쪽 을지로와 닿은 면은 예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고색창연한 건물이 우리의 식민지시대의 우울을 상징하고 있었다. 명동이라는 섬은 그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마치 만화경처럼. 

건축가 김정수가 설계한 우리나라 유리 커튼 월의 시작이었던 성모병원. 최근에 외벽교체 공사를 했다.
명동, 문화와 예술의 바다


명동의 북쪽, 지금의 을지로3가 근처가 내가 태어난 고향이고, 내가 처음 입학한 청계국민학교가 지금은 ‘페럼 타워’라는 멋없고 미끈하기만 할 뿐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건물이 들어선 수하동에 있었다. 학교 바로 앞에는 이상이 변동림과 결혼해 신혼생활을 하던 오래된 일본 아파트가 있었고, 조금 더 가면 조선 말기에 경복궁을 지을 때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목수 이승업이 지어놓은 한옥이 있었다. 주변으로 인쇄공장들이 차근차근 뽕잎을 갉아먹는 누에처럼 그 블록을 차지하고 있던 때였다.

을지로 입구,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의 낮은 고개는 원래 구리개(仇里介)라고 불렸다. 황토흙으로 된 땅이 몹시 질어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그 의미를 따서 이 동네를 ‘황금정(黃金町)’으로 불렀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되어 주변의 땅이 황금보다 비싼 곳이 되었으니……. 이곳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일본의 자본이 활발하게 생육을 하던 곳이다. 종로 일대가 화신을 비롯한 민족자본이 번성하였던 것과 비교되며,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가 심어졌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일본인들이 많이 찾아온다. 

조선시대 음악과 무용을 가르치던 장악원 터에 지어졌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 있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며 늘 건너다보았던, 지금의 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내무부 건물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악명이 드높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그 국적불명의 의사(擬似)고전주의적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장악원(掌樂院)이라고,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지금의 국립국악원쯤 되는 기관이 있었다. 조선시대 한성(漢城)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인 『한경지략(漢京識略)』궐외각사조(闕外各司條)에 의하면, 장악원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몹시 터가 세고 불길한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음악을 공부하는 기관을 두고 그 억센 기세를 눌러보려 했다고 한다. 장악원에는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도성에 들어왔을 때 그 일부가 악생들을 내쫓고 주둔했고, 이후 일제강점기 그악한 수탈의 대명사인 동양척식회사가 들어섰다. 그 모든 시간의 층위들 위에 지금은 음악 대신 자본이 흘러다니는 은행이 들어섰지만, 몇 백 년 동안 악공들과 예인들이 밟고 다녔을 명동의 지층에는 그 문화와 예술의 기운이 여전히 꿈틀거린다.

어릴 때 나는 누이들의 손에 이끌려 일주일에 한 번 명동성당에 다니느라, 길을 건너 사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명동 한복판을 가로지르곤 했다. 그때도 명동의 기억이란 오로지 사람들이었고, 언뜻언뜻 건물들이 바다에 떠있는 섬처럼 솟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인 시공관이나 명동성당, 그리고 중간에 있었던 백화점들… 득시글거리는 사람들과 섬과 같은 건물들, 그리고 동네 끄트머리 중국대사관 맞은편에 도열한 희귀하고 화려한 장정이 눈에 띄는 외서들이 즐비했던 책가게, 그리고 만두가게들이 둥둥 떠 있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복판 동방싸롱 옆의 술집에서 박인환이 작사하고 이진섭이 작곡한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마담은 “이리도 눈물 나는 노래를 어쩔라고 지었냐”며 타박을 하고 박인환은 못 먹는 술을 자꾸만 더 달라하고, 나애심과 테너 임만섭이 즉석에서 흥얼거리며 그 노래는 곧 명동 술자리에서 꼭 불리는 주제가가 된다. 그들, 박인환과 이봉구 등의 문인, 예술가들이 명동을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층위일 것이다.

전쟁을 겪으며 황금색이 퇴락한 음울한 시절이었지만, 명동은 후미진 구석구석에서 호롱불처럼 가늘게 새어나오는 불빛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던 예술의 바다였다. 시가 자라고 소설이 꽃을 피우고 연극과 가곡이 타오르며, 소비가 아닌 생산과 창조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긴 머리에 검고 큰 눈동자를 굴리며 모나리자 다방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던 전혜린이 있었고, ‘3·1로 창고극장’에서 ‘빨간 피터의 고백’을 공연하여 한국 연극계에 모노드라마 붐을 일으켰던 추송웅이 있었다. 그리고…사람은 가고, 옛날만 남아 있다. 

건립 당시의 유네스코 회관
유네스코회관의 건축가, 배기형을 기억하다


명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물은 한때(1948∼1961) 서울시의 공관으로 쓰여 ‘시공관(市公館)’이라 불렸고, 60년대 그 빛나던 시기에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며 골목골목 그득했던 카페와 술집, 소극장들의 중심이 되었던 곳, ‘명동예술극장’이다. 원래는 1936년에 ‘메이지좌(明治座)’라는 이름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진, 일본인들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던 곳이었다. 1976년부터 금융회사 사옥으로 사용되며 철거 위기를 겪기도 하다가 2003년부터 서울시에서 다시 극장으로 복원했다. 맞은편 유네스코회관의 옥상 정원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꽃잎처럼 덧붙여진 건물의 모양새가 화려하게 드러나는데, 명동에 다시금 문화의 꽃을 피우겠다는 굳은 결의가 느껴진다.

명동의 수많은 인파와 건물들에 가려져 한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지만 지어질 당시 한국 최초의 초고층(?) 건물이었고 지성의 궁전이었던 ‘유네스코회관’은, 한때 그 스카이라운지에서 피자를 먹고 오면 큰소리 좀 칠 정도로 명동의 랜드마크였던 건물이다. 1959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휴전 이후 황폐화됐던 한국의 문화예술계의 중흥을 위한 터전으로 삼고 교육, 과학, 문화의 보급과 교류 사업을 위해 세웠다.

설계경기를 통해 선정된 건축가 배기형(1918∼1979)의 설계로 건립된 유네스코회관은 지하 1층, 지상 13층 규모의 대형 건물로서, 극장과 유네스코 본부 등의 문화시설, 백화점과 스카이라운지 등의 상업시설, 그리고 사무소 등이 복합된 명실상부한 ‘문화센터’였다. 본래 사무실 및 500석 규모의 회의장, 객실을 갖출 계획이었으나 공사 도중 호텔 개념의 객실은 사무실로 용도를 바꾸었고, 회의장으로 쓰려던 3∼5층은 극장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외벽의 전체를 기둥이 보이지 않는 유리벽으로 만드는 것을 ‘커튼 월’ 방식이라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기술적으로 해결이 어려웠던 이중 유리로 된 알루미늄 커튼 월을 성공적으로 사용한 것은 배기형의 건축이 탄탄한 구조 설계 능력을 기반으로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동의 문화적 랜드마크였던 유네스코 회관, 유리 커튼월이 돋보이는 건물로 건축가 배기형이 설계했다.
건축가 배기형. 60∼70년대 한일은행 지점들과 피카디리극장, 삼성계열 공장들 등 대규모 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건축가지만 지금은 잊혀진 이름이다. 그는 김해에서 태어나 부산공립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건축수업을 하고 돌아와 1946년 구조사 건축기술연구소를 창립한다. 그리고 1954년 김희춘, 정인국, 김창집, 함성권, 엄덕문과 함께 신건축문화연구소를 창립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건축활동을 시작한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제도판을 직접 잡고 흔히 보는 일반도면이 아닌 고난도의 철골구조 상세도를 그리곤 했다고 한다.

내가 건축을 처음 배울 때 존경하는 선배 건축가로부터 “도면은 구조사 도면이 최고야. 디테일이 무언지 알게 해주는 도면이야.”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구조사’라니, 이름이 그래서 구조설계를 하는 사무실을 연상했고, 어떤 건축가가 운영하는지는 몰랐다. 그냥 ‘도면은 구조사’ 하면서 입으로 몇 번 되뇌어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아직까지 구조사의 도면을 본 적이 없다. 어떤 도면일까? 궁금하다.

그리고 최근에 어떤 선배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분이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사무실이 바로 구조사였으며, 그 사무실을 운영하던 건축가가 바로 배기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듣기로 배기형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성질이 급하고, 도면에는 완벽을 기하는 건축가였으며, 그의 광교 사무실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모여서 저녁에 바둑을 두며 밤늦게까지 건축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는 아주 낭만적인 그림까지 얻었다. 그리고 옥인동 지하에 보관해 두었던 그 전설의 도면들은 여름에 꺼내어 온종일 햇빛에 말리곤 했다고…….

건축을 하는 데 형태를 만들고 모양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를 이루는 그 안의 골격을 생각하고 공간을 열고 닫게 해주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던 깐깐한 건축가 배기형이, 선배를 통해서, 그 선배와 기울이는 소주잔을 통해서 혼백처럼 피어올랐고, 나는 그가 만드는 건축의 풍경에 취해서 비틀거렸다. 어쩌면 사람도 이름도 추억도 건물도 영원하지 않다. 다만 예술은 영원하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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