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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사람]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정창화 감독

입력 : 2011-10-04 17:22:03 수정 : 2011-10-04 17: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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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데뷔… 해외진출 감독 1호
“빠르고 힘있는 액션영화 한 편 더 찍는 게 꿈”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 정창화(83) 감독은 한국 영화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지만 지금 관객들에겐 다소 낯선 인물이다.

정 감독은 해외에 진출한 한국 영화감독 1호다. 홍콩에 가서 만든 첫 작품 ‘천면마녀’(1969)는 홍콩 영화로는 처음으로 유럽에 수출됐고, 맨손 대결 위주의 권격영화 트렌드를 이끈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은 아시아 영화로는 처음으로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그를 알면 알수록 놀라움도 커간다. 한국영화계의 ‘어른’인 임권택 감독이 그의 연출부 출신이다. 임 감독은 “나는 정창화 감독님의 ‘장화홍련전(1956)’에서 제작부 똘마니로 처음 영화 일을 시작했고 그 뒤로 오직 정 감독님 문하에서 영화의 모든 것을 배웠다. ‘장군의 아들(1990)’ 같은 내 액션영화에 정 감독님의 영향이 나타나는 건 당연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고 유현목 감독도 그의 조연출로 출발했다. 한국영화의 계보를 써나간다면 정 감독은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감독 등과 더불어 ‘원조’로 분류될 인물이다.

‘장화홍련전’(1956)
포연이 사그라지지 않았던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데뷔한 정 감독은 1977년까지 연출자로, 1996년까지는 제작자로 한국과 홍콩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약했다. 정 감독은 ‘순간은 영원히’(1966) 홍콩 로케이션 촬영 때 쇼브라더스 란란쇼 사장의 눈에 들어 1968년부터 전속 계약을 맺고 홍콩에서 영화를 만든다. 이후 레이몬드 초우가 설립한 골든하베스트로 옮겨 히트작을 내며 승승장구한다.

“쇼브라더스에는 전속감독이 50여 명이나 됐어요. 그들의 실력을 가늠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 그들의 작품을 다 봤죠. 하루 3시간만 자면서.”

‘천면마녀’는 쇼브라더스사에서 소속 감독들의 액션영화 교재로 쓰일 만큼 격찬을 받았다.

“액션영화 장르에서는 탄탄한 입지를 가지게 됐지만, 제 밑천을 드러낸 이상 저도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넣어야 했어요. 역발상에 착안했죠. 중국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협장르에 도전한 겁니다. 중국의 고유 전통 분야라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여협 매인두’(1970)를 시작으로 ‘아랑곡’(1970), ‘래여풍’(1971) 등 연거푸 히트 시켰죠.”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
이 시기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미국에서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물리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그를 최고 감독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리샤오룽(이소룡)과도 영화를 찍을 예정이었으나 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이소룡은 ‘당산 대형’(1971) ‘정무문’(1972) 등을 통해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어요. 그는 연기자라기보다는 무술배우에 가까웠죠. 보여줄 게 바닥난 상황에서 마약에 손을 댄 겁니다. 제게 ‘더는 보여줄 게 없다’면서 감독님이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만들었으니 저와 함께하면 무언가 새로운 영화가 나올 것 같다’고 제안하는 거예요. 의기투합해서 같이 영화를 하기로 했는데, 돌연 사망한 거죠. 안타까웠습니다.”

약 10년간 홍콩에서 작품 11편을 만들며 대다수를 성공시킨 정 감독은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1977년 ‘파계’를 끝으로 화려한 홍콩 생활을 접고 귀국한 뒤 1979년 화풍영화사를 설립한다. 한국에 선진화된 제작시스템을 도입해야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꾼과 장사꾼들의 야합으로 철옹성이 된 현실의 거칠고 단단한 벽은 생각보다 너무 가혹하고 높았다.

특히 5공 전두환 정권의 문화 길들이기 정책은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협조’를 거부한 괘심죄의 대가는 심한 가위질이었다.

“30분 분량을 잘라내버리더군요. 곳곳에서 줄거리가 끊기고 앞뒤가 맞지 않는 영화가 되고 마는 겁니다. 화풍에서 총 29편을 만들었는데 단 한 편도 성공할 수 없었어요. 난 군사정권에 야합하기에는 대쪽처럼 강직했고, 흐느적거리며 내 영화정신을 소진하기에는 너무 고지식했어요. 아내가 미국행을 제안했습니다. 홍콩 체류 시절 향수병을 경험했던 터라 안 가려고 했었습니다만 인생 전부를 가위질당한 심정으로 태평양을 건넜어요.”

정 감독은 낯선 타향인 미국 땅에서는 영화를 잊고 살았다. 세월과 함께 잊혀졌던 정 감독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되면서부터다. 2005년에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칸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서 상영되며 세계에서 주목받기도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세계영화사 걸작 베스트 10’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꼽고, 자신의 영화 ‘킬빌’에 오마주했다.

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정 감독은 2003년 이후 해마다 9월 중순 한국을 찾아 10월 초 부산국제영화제를 둘러보는 등 한 달 남짓 머물다 돌아간다.

“선배로서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LA한국국제영화제가 그 답안으로 나온 거죠.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에 진출하도록 교두보 역할을 할 겁니다. 기술제휴 추진도 목적이고요.”

그가 되찾은 영화 일은 할리우드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이다. 지난해 LA한국국제영화제를 만들고 집행위원장을 맡은 그는 류승완 양익준 등 후배 감독들을 불러들여 영화제 기간 동안 관객과의 대화 자리 등 각종 행사를 진행했다.

정 감독에게 영화는 여전히 꿈이자 삶의 원동력이다.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니 “액션영화 한 편을 더 찍는 것”이라고 답한다.

“뭔가 하나 남기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소재가 좋아야 하고 탄탄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신중하게 구상하고 있어요. 과거에 만든 것보다는 훨씬 다이내믹해야죠. 그야말로 빠르고 힘있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83살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60대 초반으로 보인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할까?

“매일 1시간씩 트레킹합니다. 굴곡 있는 코스를 택해 평속으로 걷다가 빨리 걷기를 되풀이해요. 젊을 때는 안 좋은 일이나 충격을 받곤 하면 그게 마음속에 오래 남더라고요. 툴툴 털고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에요. 지금은 금세 잊어버립니다. 날마다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심신을 다스리는 데 좋아요. 젊은 영화인들과 갖는 대화는 내 몸과 마음을 젊게 만들어 줍니다.”

국내 원로 영화인들을 향한 충고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선배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죠. 뭘 바라요? 마음을 열고 후배들과 교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화를 봐야 해요. 원로들이 영화를 안 보면 되겠어요? 남궁원 윤일봉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무료 출연해야 합니다. 그게 건강 유지에도 도움이 될 테고.”

여든 셋 나이에도 현역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열정적인 삶을 연출하는 그의 이름 앞에 ‘청년’이란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다. 청년 정창화, 그는 이제 ‘세계 액션영화의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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