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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1〉 아우라

입력 : 2011-09-20 17:25:42 수정 : 2011-09-20 17: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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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 석탑의 ‘아우라’… 삼국통일 이룬 신라의 힘 물씬
감은사탑은 경주에서 감포 가는 큰 길가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아우라, ‘원본’만이 줄 수 있는 어떤 분위기

아우라(Aura)라는 말은 원래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되는 영적인 기운을 이르는 말이다. 마치 만화의 등장인물처럼 머리 위로 후광이 번지며 그 위로는 기묘한 의성어처럼 보이는 글자가 새겨지는 듯한, 그런 느낌일 것이다.

아우라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1892∼1940)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책에서 사용함으로써 유명해진 개념이다. 그는 아우라는 예술적 경험을 통해 전달되며, 예술작품의 ‘원본’만이 줄 수 있는 어떤 분위기라고 했다. 즉 그것은 사진이나 영화 같은 복제되는 작품에서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아우라는 종교의식에서 기원하는 현상으로 ‘가깝고도 먼 어떤 것의 찰나적인 현상’이다. 모든 예술이 종교적 제의였던 때의 예술은 작품과 인간 사이의 몰입을 통해 신비한 신적 체험을 맛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아우라의 구체적인 속성은 바로 그런 시·공간적인 현재성과 유일성이다.

벤야민은 르네상스 이후의 예술에서도 과거의 종교적 숭배가 세속적인 미의 숭배로 대체되었으므로 아우라가 존재했지만, 산업사회가 되자 예술이 기계를 통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그 아우라를 상실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종교적 숭배가 세속적인 미의 숭배로 대체된 아이팟이나 아이폰도 아우라가 존재하는 어떤 것인가… 라기엔, 아직은 좀 그렇다.

나는 아우라라는 말이 나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경주 감포에 있는 감은사 절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저 한 쌍의 탑이 떠오른다. 13m 높이의 검고 웅장한 3층석탑은 한없이 높아 보이며, 또한 한없이 넓어 보인다. 혹은 기운 센 바다 사나이의 굵은 팔뚝 같기도 하다.

1990년대 초였을 것이다. 팔자 좋게 경주를 돌아다니다가 고개를 넘어서 감포 쪽으로 갔다. 가다 보면 바다에 다 가서 감은사라는 절터가 있다는 이야기만 한 장 달랑 들고 한참을 갔다. 보통 절터라는 것은 큰길에서 꺾어져 들어가서, 발길이 거의 끊어진 산길을 넘어, 풀을 헤치고 한참 더 들어가서 감동적으로 만나는 것이 보통의 방법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큰길에서 살짝 비켜 들어가서 만나는 것이 보통이므로, 나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길을 계속 가고 있었다. 해가 거의 지고 어둑어둑해지고 있을 때였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길 옆 멀찍이 보이는 언덕에 덩치가 커다란 탑이 두 기 우뚝 서서 부리부리한 눈을 왕방울처럼 굴리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귀에서는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볼 것도 없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저것은 감은사탑이었다. 감은사 절터 3층석탑, 그 탑을 그렇게 만났다. 그때 처음 만났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건 돌로 쌓아 놓은 것이 아니라 무쇠를 달구고 한없이 두들겨서, 최고의 밀도와 최고의 강도로 만들어 놓은 조형물 같았다. 그 앞에 서면 가슴이 부르르 떨리게 만드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원본만이 줄 수 있는 감동,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는 감은사터 3층석탑. 통일을 이루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문무왕·신문왕 시대의 힘이 전해진다.
감은사, 새로운 역사와 질서의 집약체


감은사터는 1993년 무렵 유홍준 교수가 ‘나의문화유산답사기’라는 엄청난 선풍을 불러일으킨 책에서 표지로 썼고, 본문에서 입으로 낼 수 있는 말을 모두 동원한 찬사를 들이부어서 필수 답사코스가 되었다. 사람들은 관광버스채로 실려 와서 그 앞 널찍한 주차장에 부려지고, 우르르 몰려 올라가서 한바탕 장바닥을 만들고는 우르르 내려오는 장관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 감은사터에 갔을 때는 그보다 조금 전이었다. 감은상회라고, 감은사터 아래에 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 허허벌판에 밥을 먹을 곳도 마땅찮아서, 나는 ‘길을 가던 배고픈 과객’의 꼴로 컵라면을 하나 집어들었다. 무료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뜨거운 물을 얻어서, 뚜껑을 열고 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컵라면의 딱딱한 면이 물에 불어나는 시간이 얼마나 긴 지는 물을 부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하릴없이 기웃거리며 그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던 그 아주머니가 공깃밥 두 그릇과 김치 한 보시기를 얹은 쟁반을 들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 그야말로 천사강림이었다. 종일 돌아다녔는지 흠뻑 먼지를 뒤집어쓰고 무척 배가 고파 보이는 ‘과객’들이 안되어 보였나 보다.

“여긴 뭐 하러…?” 뭘 보러 왔냐고 물어보는 이 질문은 그 당시 답사를 다닐 때 늘 듣는 질문이다. 일은 안 하고 이런저런 산천경계 구경 다니는 팔자 좋은, 그러나 쫄쫄 굶고 다니는 처량한 한량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진정으로 ‘너희들이 돌아다니는 그 이유가 궁금하다’인지도 몰랐다.

하긴 그때 감은사 도착하기 직전에 기림사에 가서 대적광전 앞 아담한 석탑을 스케치하고 있었더니, 스님이 지나가다 보시더니 나에게 험상궂게 뭐하는 작자냐고 다그쳐 물어보았다. 이미 늦은 오후였고 인적이 별로 없는 곳이니, 수상한 시간에 수상한 젊은 놈 둘이 뭔가를 조사하는 것이 혹시나 문화재 도적질하는 놈들로 보는 것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하다 싶었다. 지금은 답사가 많이 보편화되어 나 같은 한량들이 불어나서 그런 오해는 없지만, 아무튼 그때만 해도 그랬다.

“탑 보러 왔는데요.” 아주머니는 아주 허탈해하며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표정으로 피식 했다. 칠월칠석에 만난 견우와 직녀처럼 나는 밥과 아주 반갑게 해후를 하고 있었는데, 무료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의 그 아주머니가 심드렁하게 “하긴, 어떤 교수도 여기 줄창 오는데…”하고 이야기했다. 그 교수가 바로 유홍준 교수였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만든 절이다. 나는 감은사를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가 끝나며 한반도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정의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시점에 만들어진 하나의 정신의 집약체라고 생각한다. 신라가 잘했건 못했건 정의롭건 비굴하건 삼국을 통일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문무왕 김법민이 있었다.

문무왕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 문희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삼국유사에서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을 사고 ‘야합’하여 밴 아이가 바로 김법민이다. 김춘추는 진흥왕의 대를 이은 진지왕의 손자다. 진흥왕에게는 큰아들 동륜과 둘째아들 금륜이 있었는데, 동륜이 궁 담을 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래서 금륜이 진지왕이 되지만 황음으로 쫓겨나고, 그 집안은 성골에서 진골로 내려앉는 족강을 당한다. 그래서 왕위는 진평왕으로 넘어가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 김춘추의 집안은 절치부심하며 열심히 왕을 보필한다. 마침내 ‘준비된 김춘추’는 왕이 되고 그의 아들 법민은 왕세자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왕위계승의 문제가 아니라 신라의 정치 지형에 전기가 되는 큰 변곡점이었다. 구세력으로부터 패망한 가야의 세력과 연합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된 것이고, 그 중심에 김춘추 부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부자에 의해서 삼국통일이 완성된다. 한반도는 고조선 이후 삼천 년 만에 하나의 국가로 통일이 된 것이다.

탑의 양식이 건축에서 조형으로 변해 가는 과정. 왼쪽부터 정림사지 5층석탑, 감은사터 3층석탑, 불국사 석가탑. 건축을 석탑으로 변형시킨 백제의 탑에 비해 신라의 탑은 조형성이 강조되면서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예고하고 불국사 석가탑에서 완성된다.
건축에서 조형으로, 감은사탑이 보여주는 새로운 문화의 힘


단재 신채호 선생과 같은 분은 신라의 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하고 이룬 것이기 때문에 정당성이 없고, 또한 고구려 고토의 상실로 인해 한민족의 활동범위가 줄어들어 우리 민족에게는 커다란 손실이라고 본다. 물론 그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삼국이 한반도라는 지역과 민족 동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지금과 같은 확장된 민족개념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결과론이 아닌가 하는 반론도 있다.

김춘추는 오랜 인내와 준비 끝에 그 당시로는 무척 늦은 나이인 51세에 왕위에 오르지만 통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재위 8년 만에 왕위를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을 완성하고 사천왕사를 지었다. 그리고 동해에 빈번했던 왜구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 위해 절을 짓기 시작하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밀접한 나라였으며, 백제 패망 후에도 수많은 백제 부흥세력이 있어서, 신라에게는 동해를 지키는 것이 무척 큰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다고 했다. 그것이 대왕암이라고도 불리는 문무대왕릉인데, 아들 신문왕이 그 수중릉이 보이는 이견대에 올라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절은 문무왕 사후 2년 뒤에 완성되고, 신문왕이 절의 이름을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로 지었다. 금당 바닥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감은사 탑에는 그런 정신과 역사와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그 이후로 나는 틈만 나면 감은사에 갔다. 늘 경주로 가서 황룡사를 보고 분황사를 보고, 불국사에 가서 석가탑을 보고 만다라의 도상을 보고, 석굴암 본존불을 보고 하루를 묵는다. 다음날 고개를 넘어 기림사에 갔다가, 장항리 절터로 기어올라가 기형적으로 남았으나 스폰지처럼 폭신한 탑을 보고, 마지막으로 감은사로 가서 하염없이 탑을 보면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처음에는 혼자 가다가 결혼하여 신혼여행으로 둘이 가다가, 그리고 셋에서 넷으로, 그렇게 수를 늘리며 차곡차곡 감은사를 기억 속에 쌓아 올렸다. 그동안 나에게 공기밥과 김치를 적선하였던 감은상회 아주머니는 우리 식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탑과 함께 지켜 보았다. 우리도 그 집 아이가 그늘 아래 평상에 엎드려 숙제하던 꼬맹이 초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고, 취직을 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가면 뛰어나와 반겨주고, 나올 때는 과자 몇 봉지를 억지로 안겨주며 마치 친형제처럼 환대해 주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탑보다 감은상회 때문에 가게 되었다.

백제에서 처음 만들어진 석탑의 양식은 신라로 넘어오면서 처음에 건축적이던 구성이 점점 조형성을 띠게 된다. 석탑의 몸돌과 지붕돌을 여러 개의 판석을 조합해서 만드는 구축의 수법은 이어받았으나, 자세히 보면 구성이 다르다.

백제의 탑은 건축물로서의 목탑을 순수한 석탑으로 변형시킨 것이라 기단이 낮고, 1층 탑신이 높으며 2, 3층 탑신은 일정한 크기로 일층에 비해 현저히 낮다. 그에 비해 신라의 감은사탑은 상승감과 양감을 살리기 위해 기단을 높이고, 일층 탑신이 기단보다 낮으며, 일정한 비례로 탑신이 줄어드는 체감률을 사용한다. 그것은 건축에서 조형으로 석탑의 변화를 시도한 것이고, 또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조형성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완성된다.

그래서인지 감은사 탑 앞에만 서면 무언지 모를 힘이 나를 징하게 옭아매고, 감전된 것처럼 몸이 울리고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진다. 그 힘이 바로 삼국을 통일하던 힘이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던 힘인 모양이다. 그 힘이 땅을 들어올리고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감은사 석탑인 듯하다. 원본의 힘을 경험하는 아우라, 그 신비한 교감은 공간적 만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가는 시공간의 동시적 현재성을 경험하게 해준다.

가온건축 공동대표· ‘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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