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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40〉 백제의 미학

입력 : 2011-09-07 04:17:16 수정 : 2011-09-07 04: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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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극적 아름다움…요절한 예술가의 천재성을 닮았다
왕궁리오층석탑은 목탑을 석탑으로 단순히 번안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돌 고유의 성질을 새로운 조형예술로 승화시켰다 안정감과 위태로움 공존하는 오묘한 미감…과연 백제 예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기단이 낮고 상대적으로 1층 탑신이 길어 수직성이 강조된 왕궁리오층석탑. 안정감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지닌 독특한 조형성이 돋보인다.
백제, 잊혀진 나라를 기억하는 일

지난 8월 중순 전주로 출장을 다녀왔다. 전주에 집을 한 채 설계할 일이 있어서 집 지을 땅을 보러 간 것이다. 전주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첫 번째는 오래전 사촌형 결혼할 때 형수 되실 분 집이 전주라서 결혼식 참석하느라 버스에 실려 단체로 간 것이 처음이었다. 그때도 팔월 어느 날이었는데 예식장 근처에서 밥만 먹고 땀만 흘리다가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엄밀하게는 이번에 처음 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실 도시에 대한 총체적인 체험은 없었다. 인터체인지 근처의 집 지을 땅을 보고 외곽에서 돌다가 집주인 될 사람들을 만나 전주비빔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다시 고속도로로 빠져나왔으니 지난번보다는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집 지을 땅에 들어갈 때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져 들어가다 갑자기 나온 언덕을 오를 때 본 폭신한 소나무 숲과 멀리 금산사와 귀신사를 품고 있는 모악산을 본 것, 그리고 대지 건너편에 펼쳐진 웅장한 월드컵 경기장을 본 것, 그 외에 조금 특별한 일이라곤 전설로만 들었던 제대로 된 전주비빔밥을 처음 먹어본 것 정도였다.

늘 그렇다. 우리가 무엇이건 경험을 할 때 그 인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다양한 감각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의 총체적인 합인데, 단지 부분만을 보고 어떤 대상을 평가하는 것은 마치 예전에 우리나라가 세상의 변방일 때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공항 트랩에서 내리자마자 마이크를 들이대며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총체적이고 다양한 단서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인상이 아니라 그냥 맥락 없이 순간적으로 들어온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의 인상은 오해를 낳기 쉽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몇 가지의 단편적인 인상만을 가지고 기억과 역사와 흔적이 거의 없어진 문화나 역사 혹은 도시를 기억해내고 복원해야 할 때가 있다. 가령 우리의 역사에서는 60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의 3분의 1을 차지했고 엄연히 실존했던 백제라는 어떤 나라를 기억하고 살려내는 일이 그러하다.

우리가 백제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백제는 섬세했어”라고 하거나 “백제는 낙천적이었어”라거나 심지어 “백제는 흥청망청했어” 하는 것도 마치 “하늘이 아름답습니다”처럼 약간은 무책임하고 하나 마나 한 인상비평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근거가 아주 박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란 것이 그렇고 문화라는 것이 그렇듯이 그것을 구성하는 태반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역사도 처음부터 확실한 근거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의 상상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근거로 이야기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가 처음에는 정말 그림일 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실체가 발견되며 점점 하나의 구체적이고 진실된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쪼개지고 바래지고 사라진 백제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1993년에 능산리 고분군 인근에서 발견된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예술품,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
상상력으로 그려보는 사라진 문화와 요절한 예술


전주를 빠져나와 익산으로 갔다. 익산에 간 것은 오랜만에 왕궁리 절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평야는 역시 기대했던 대로 무척 기분이 푸근하고 좋았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역시 사람이 드물었고 너른 터 한가운데 탑만 하나 우뚝 서 있었다. 나는 그 텅 빈 땅 한가운데 서 있는 탑을 보고 다시금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

그 정도로 강렬한 감동을 받은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경주 감포에 있는 감은사 탑을 봤을 때 받았던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힘, 서산 마애불을 봤을 때 느껴졌던 무척 자애로우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돌이 숨을 쉬는 듯한 생동감이 주는 감동, 그리고 경주에서 성덕대왕 신종을 봤을 때 느꼈던 천상의 소리, 즉 눈으로 소리를 들었던 아주 특이한 경험 등…. 그리고 바로 왕궁리 절터에서 섰을 때 탑이 주는 아주 오묘한 비례의 미감과 무한히 펼쳐진 듯한 평평한 땅의 느낌이었다. 역사적인 어떤 시간의 정신이 마치 강렬한 전기가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것이 ‘아우라(Aura)’라고 생각하는데 그 강렬함은 시간이 몇 백 년, 몇 천 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런 감동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사가 강우방 선생은 “백제예술은 참으로 경쾌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하고 때로는 극적이어서 모차르트의 음악 같다. 백제미술은 요절한 나라의 미술이다”고 했다. 사라진 문화와 요절한 예술…. 우리는 여기저기 조금씩 뿌려진 조각들을 꿰맞춰서 부분이 모여 만들어진 황홀한 전체를 상상만 할 뿐이다. 우리가 아는 백제의 조각들은 진흙 속에서 찾아낸 용봉향로의 화려하고 정치함과 충청남도 서산 산속에 숨어 있다가 나무꾼이 찾아낸 서산 마애삼존불의 천진하면서도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미소, 금동 반가사유상의 미려하고 날렵한 매혹, 그리고 땅속을 뒤지다가 벽이 무너지며 찬란하게 구조된 무령왕릉의 고상하면서도 치밀함 정도일 것이다.

오랜 시간 이 땅에 실존했던 백제는 오로지 소문과 전설로 존재한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에서 내려온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서 건국한 나라이다. 이후 공주와 부여를 거치며 660년 의자왕대에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패망할 때까지 600년이 넘는 시간과 30대가 넘는 왕이 집권했고, 일본은 물론 동남아까지 식민지를 경영하던 대 제국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기의 문화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가장 발달했고 화려했던 나라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자료들과 기록들은 백제의 패망과 더불어 전승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버려져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익산은 백제의 30대왕인 무왕의 꿈이 서린 곳이다. 무왕은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버지이고 40년 넘게 집권하며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활발하게 외교정책을 펴서 국제적인 위상을 높인 왕이다. 그의 자취가 이곳 익산에 남아 있는데 바로 미륵사 절터와, 무왕과 그의 부인이 묻혔다는 쌍릉과, 우리가 찾아간 왕궁리 절터이다.

우리에게는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으로 더욱 잘 알려진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익산 금마라는 곳 연못가에서 일찍이 남편을 여읜 과부가 용과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데 그 아이가 바로 무왕이다.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말대로라면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신라 진평왕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는데 그때가 서기 600년 무렵이었다. 무왕은 30년 정도 부여에서 집권한 후 익산으로 천도하기 위한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미륵사를 만들고 이곳 왕궁리에 대규모 행정복합타운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는데, 1989년부터 이어지는 발굴조사에서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유물과 기록들을 어렴풋이 찾아냈다고 한다.
초층기단이 낮고 상대적으로 1층 탑신이 길어 수직성을 강조하여 안정감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독특한 조형성이 돋보이는 왕궁리오층석탑.
안정감과 위태로움이 공존하는 독특한 백제의 미감

그 사이 밭 사이에 탑만 한 기 우뚝 솟아 있던 모습에서 주변이 말끔히 정비되었고 예전에 관청과 금당이 있었던 자리도 발굴됐지만 땅위로 솟은 구조물은 여전히 탑 한 기가 전부였다. 그 사이 동네를 얼마나 열심히 갈고 닦았는지 주변에 널렸던 밭이고 집이고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그저 우주에서 뚝 떨어진 모노리스(Monolith)처럼 탑이 더욱 오똑해져서 두 손을 내밀며 반기고 있었다.

탑이라는 용어는 원래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 네모난 무덤(方墳)이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와 팔리어인 투파(thpa)를 한자로 음역하며 솔도파(率堵婆)와 탑파(塔婆)로 표현하던 것이 탑(塔)으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예배의 대상이 필요했던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돌아가시자 그의 유골과 유골에서 수습한 사리를 벽돌로 만든 반구형 봉분에 안장하고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종교의식을 행했다. 그러던 것이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며 다층다각의 누각형식을 지닌 목탑의 형식으로 변한다. 탑은 후에 예배의 대상이 불상으로 옮겨지고 불상 모셔지는 곳인 금당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불교건축의 중심기능을 수행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때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는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그때 만들어졌던 목탑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대표적인 목탑으로는 경주 황룡사에 만들었다는 9층목탑과 익산 미륵사에 만들었다는 9층목탑 그리고 부여 군수리 절터에 만들었던 탑 등이 있다.

이후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에 석탑이라는 우리만의 탑의 양식이 만들어지는데 그때가 백제 말기인 7세기로 추정된다. 그 시원은 백제 무왕이 건립한 익산 미륵사 석탑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양식은 한국의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된다. 당연히 나무보다는 돌이 훨씬 다루기 어려운 재료라는 걸 감안하면, 단단한 화강석으로 건축조형을 본떠서 만든 석탑의 제작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양식적으로 굉장한 추상의지와 조형감각, 그리고 당시 백제가 가지고 있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문화적인 역동성과 탄탄한 건축기술이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의 석탑은 목탑의 모습을 단순히 돌로 번안한 것이 아니라 돌이 가진 고유의 성질을 살려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고, 그 조형물에 미적 가치를 부여하여 새로운 조형예술로 승화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미륵사 석탑은 목탑의 지붕을 받치는 구조물인 공포를 층굽받침으로 번안하고 지붕과 기둥을 돌로 형식화하여 창조해낸 백제의 발명품이다. 공포라는 3차원의 구조물을 2차원의 선으로 환원하고 처마의 곡선을 돌을 살짝 들어 올림으로써 표현한 것이다. 석탑의 양식은 이후 정림사, 감은사, 고선사 등을 거쳐 불국사 석가탑에서 절정에 이른다.

왕궁리 탑을 볼 때 늘 신묘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정면에서 볼 때와 측면에서 볼 때의 모양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지고 발전된 신라의 탑들, 고선사탑이나 감은사탑은 어느 면에서 볼 때나 안정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는데 반해, 왕궁리 탑은 정면에서 볼 때는 수직적인 느낌이 강한데, 측면으로 돌아가며 모서리 지점에 이르면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며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탑을 받치는 기단부가 낮고 초층 탑신이 길어서 약간 위태한 비례감을 준다. 그리고 길쭉한 일층 탑신 위로는 몸돌의 변화가 아주 적은 반면 지붕돌의 끝부분이 얇고 경쾌하게 들어올려져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 탑이 과연 백제탑인지, 혹은 통일신라나 고려탑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는데, 그런 식으로 안정감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 독특한 조형은 백제 것 외에는 없다. 탑을 받치고 있는 땅, 왕궁평 역시 허허로움과 풍요로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땅이다. 왕궁평의 너른 벌에 서있는 느낌만 있고, 다른 생각 할 수 없도록 무언가 강한 전파를 보내는 것이 마치 말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난수표를 읽듯이 귀에 담기만 했는데, 그것이 아직도 귓가에서 울리는 듯하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탑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땅은 처음이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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