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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37〉 영향의 불안

입력 : 2011-07-26 17:51:11 수정 : 2011-07-26 17: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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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스승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존재 확인” 영향에 대한 불안

“내가 니 앱이다.” 사람들과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서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앱을 자랑하다가 불쑥 튀어나온 농담이다. 요즘은 앱이 애비 노릇을 하는 세상이니…. “아임 유어 파더!” 영화 ‘스타워즈’에서 다스베이더가 디젤기관의 증기소리처럼 거친 숨소리를 뿜으며 자신의 아들 루크에게 한 짧지만 잊히지 않는 명대사,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대사가 아니던가. 지금 생각해 봐도 엄청난 반전이었다.

내가 네 아버지다.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다. 생물학적이든, 정신적이든 아버지를 통해 자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단 생겨나는 것도 그렇고, 이후에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를테면 역할 모델로서의 아버지는 마치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데 그 밑에서 은은히 깔려 있는 밑그림처럼 존재한다. 커다란 그늘처럼 바탕을 만들어주는 기초처럼 ‘아버지’라는 존재는 하나의 거대한 ‘영향’이다. 그런데 그런 영향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한다.

건축가 홍순인의 ‘대한출판문화회관’. 역사성과 간결함을 내재한 외양으로, 일본을 통해 이식된 서양 근대건축으로부터 오는 영향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세 명의 ‘블룸’을 알고 있다. 반지의 제왕에 남자 요정으로 나왔던 나이스하고 활 잘 쏘는 요정계의 새 바람 올랜도 블룸과,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과, ‘영향의 불안’을 이야기한 해럴드 블룸이 있다.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은 미국의 문학비평가이다. 그는 저서 ‘시적 영향에 대한 불안(The Anxiety of Influence)’(1973)에서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론을 모델로, 예술가들이 영향의 불안을 벗어나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뛰어난 선배나 스승의 영향을 폄하하고 부인하려는 속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즉 자신에게 영향을 준 스승을 심리적으로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부친 살해’와 같은 인간적인 모순과 야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불안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지인데, 영향의 불안을 극복하는 과정은 다음의 6개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먼저 ‘궤도 이탈’은 후배 시인이 선배 시인으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는 단계로 시적 기만행위에 해당한다. ‘깨진 조각’은 후배가 선배의 영향력을 성취한 후 이를 점차 극복하는 단계이며, ‘자기 비하’는 후배가 선배와 자신을 비교한 후, 자신의 역량을 바로 인식하는 단계로서 자기 표현의 반복과 선배로부터의 단절이 이루어진다. 그다음 ‘악마화’는 후배가 선배의 장엄화에 대응하는 반장엄화 단계이며, 이후 ‘금욕적 고행’을 통해 선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독한 상태를 지향하여 마침내 ‘환생’으로 후배가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해럴드 블룸은 책의 서문에 “자신의 창조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창조자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모습의 원형에 대한 질투, 혹은 자신의 원형이 들킬지도 모른다는 수줍음 등등의 이유로 그걸 지우고자 하면서 ‘영향의 불안’이라는 심리적인 메커니즘이 형성되고, 그것을 지우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에 대한 불안과, 그런 불완전하고 대체가 가능한 존재에 대한 불안이 겹쳐지면서 기묘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대표적인 신라 토기의 하나인 토지대부장경호(둘레가 크고 주둥이가 긴 모양의 토기 항아리).
영향에 대한 불안의 극복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영향을 받지 못함’에 대한 불안이 있다. ‘병적 동일화(pathological identification)’라는 것으로 ‘as if(마치∼인 것처럼)’ 성격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이상적인 인물의 이미지에 붙어 공생하면서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힘을 누려보려는 자아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무언가 강한 힘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옮겨가면서 모방하고 붙어서 안정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동일화도 일시적이고 과정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내 상대방이 힘이 없어졌다고 느끼면 병적 동일화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힘센 사람의 행동을 흉내 냄으로써 자신도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현실에 적응하는 행위는,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이 없고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경험도 없으며, 자신의 주관이 없는 기회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런 심리의 밑바닥에는 자신이 텅 비어 있다는 느낌, 즉 자기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다.

문제는 불안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자신을 되찾으면 해결된다. 결국 아주 고리타분한 결론에 다다른다. “자신을 되찾자.” 이 말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며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정신적인 장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대부분 나는 나이고 나의 인생을 살고 있으며, 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늘 남을 의식하고 흉내 내고 심지어 남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성형외과 기술이 매우 발전하여 얼굴을 감쪽같이 고쳐주어서, 얼굴로 인한 이런저런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구원해 주고 있다. 나아가 연예산업을 부흥시키고 있으며 성형 한류의 바람마저, 아니 바람이 아니고 태풍이라고 할 정도로 확산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길을 가다 보면 조금 전에 보았던, 수많은 복제된 얼굴들이 50m마다 다시 만나게 되는 그런 메멘토(Memento)적 혼란을 겪게 된다.

‘자신을 되찾자가 아니라 자신을 지킵시다(제발!)’, 그런 구호를 외쳐야 할 판이다. 존재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향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자신을 부정하고 이상행동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되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청자와 백자 사이에 등장하여 유례없이 독특한 미감을 보여준 우리 고유의 자기, 분청사기.
‘분청사기’라는 도자기가 있다. 무척 귀한 도자기인데, 사실 어딘지 허술하고 랜덤하며 또한 탁하다. 이게 뭔지, 이런 도자기가 뿜어내는 기운은 무엇인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한다. 혹자는 청자를 만들기도 하던 대단한 우리의 문화가 몽골의 침략과 여러 가지 민족적인 문제로 인해 쇠퇴하여 저런 어눌하고도 치졸한 작품으로 내동댕이쳐졌다고, 무식하고도 단순하며 심지어 식민지사관에 기대어 있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런 건 다 헛소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런 시각은 문화의 자발성과 창조성을 지극히 낮은 인자로 생각하는 편협한 역사결정론의 오류로도 보인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가 쇠해지는 14세기 말에 나와서 15세기 말까지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우리나라 고유의 자기이다. 자기의 역사는 고려가 건국하던 10세기부터 시작된다. 토기가 주류였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중국, 특히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자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1세기 고려 문종부터 12세기 고려 인종 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때 고려의 비색이 완성되며, 도자기의 형태도 미려하기 이를 데 없는 절정의 곡선을 만들어내고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문양으로 세계 도자기사에서도 견줄 데 없는 명품들이 생산된다.

이후 몽골의 침략과 더불어 국력의 쇠하던 시기에 나온 것이 분청사기라는 특이한 도자기이다. 물론 고려자기의 쇠퇴와 장인들의 부족 등이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꼭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분청사기는 그런 쇠퇴기의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의 영향 아래 도자기를 만들던 우리의 장인들이 영향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원료를 사용한 우리 고유의 자기로,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와 자발성으로, 자신의 그릇을 만드는 재미와 자신의 표정과 색을 담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이나 일본 자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독특함과 심지어 현대적으로 보이는 디자인으로 인해 20세기 자기가 이룰 것을 먼저 보여주었다는 극찬을 듣기도 한다.

인사동의 ‘통인가게’. 전돌과 ‘장경호’의 곡선을 응용한 디자인은 묵직하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인사동의 모습과 빼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영향의 불안을 극복한 자기 얼굴 찾기


건축은 시간이 완성하는 예술이다. 어떤 건축은 시간의 냉정하고도 엄격한 자정작용에도 풍화작용을 거치지 않고 살아남아 있고, 어떤 건축은 지어질 당시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쓸쓸히 사라지거나 경박하게 분칠되어 슬프게 거리에 앉아 있기도 하다. 건축가에게는 자신이 만들어낸 건축물이 지어진 본래의 모습으로 오랜 시간을 땅에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쁨이며 영광일 것이다.

종로에서 인사동길로 접어들어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 오른편에 ‘통인가게’가 보인다.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정작 알 수 없는 이 건물이 내가 인사동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물이다. 가로 면에서 차분하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여유로움도 그렇고, 얼핏 올려다보면 6층이라는 실제 규모에 비해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 외관의 디자인도 40여년 전에 지어진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기품이 있다.

생활 공예품 및 고가구 판매점과 화랑을 겸한 전형적인 인사동식 상업시설인 통인가게는 1973년 9월에 기존에 있던 2층 일본식 건물 자리에 지어졌다. 1·2층의 외벽은 유리창이 있지만, 3층 이상에는 고가구들이 햇볕을 많이 받으면 뒤틀리는 등 손상될까봐 창이 거의 없는 벽으로 처리되어 시각적인 대비를 이룬다.

특히 6층의 가로로 길게 난 창은 양끝이 둥글게 말려 올라간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장경호’라는 옛날 가야·신라시대의 목이 긴 토기의 형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외벽의 주마감재로 쓰인 전돌의 어두운 색감과 투박한 질감 또한 토기가 가진 특성을 응용한 부분이다. 덕분에 통인가게는 전체적으로 풍기는 묵직하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인사동의 모습과 빼어난 조화를 이루면서, 전통 상점거리로서의 가로 성격을 반영하는 상징적 건축이 되었고 이후 주변에 지어진 쌈지길 등으로 그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이 건물이 지어진 1970년대는 전쟁의 상흔을 지우며 점차 서울의 도시풍경이 자리 잡아가던 시기이고, 외부로부터 파도처럼 밀려온 근대건축의 세례를 받은 건축가들에게는 60년대에 국립민속박물관·부여박물관 등의 건립 과정에서 치열한 전통 논쟁을 겪으며 한국의 건축, 우리 고유의 건축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코르뷔제나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유럽의 근대건축의 영향은 두 손 모아 다소곳이 긍정하면서도 일본건축의 영향은 철저히 부정하던 이중적 불안의 시기였다.

특히 그 논쟁에 있던 김수근이 1971년에 발표한 원서동 공간사옥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 중 하나였다. 그는 건물의 주위환경이 비원의 고궁을 비롯해 기와로 덮인 한옥들로 둘러싸인 점을 감안하여, 서양식 벽돌이나 콘크리트 대신 궁궐 담장에 주로 쓰이던 전돌을 사용하여 색상과 질감에서 주변 맥락을 반영하고자 했다.

경복궁 앞 동십자각 너머, 그 시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시간의 풍화작용에 쓸리지 않고 사간동 들머리에 남아 있는 단아한 전벽돌 외벽의 ‘대한출판문화회관’ 또한 건축의 시대성과 장소성에 대한 현명한 자세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반복되는 돌출창과 고전적인 아치의 묵직한 구성은 오래된 궁궐의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건물의 장소성에 대한 건축가의 고민을 반영해 주는 듯하다.

1975년에 준공된 이 건물은 종로코아빌딩, 이마빌딩 등을 설계한 건축가 홍순인(1943∼1982)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설계한 첫 작품이다. 삼각형 대지에 지은 4층짜리 건물로서 정면은 까만 전돌에 박힌 독특한 창으로 구성된 3개 층의 상부와, 아케이드를 통해 가로와 만나는 1층으로 구성된 고전적 입면과 모던한 매스로 구성되어 있다.

연속된 아치와 돌출된 유리창은 현대건축의 어법이지만, 배경으로 선 전돌 벽은 한국적 재료에서 오는 친숙함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건물은 여러 가지 양식적인 고민을 안고 작업을 했던 당시 한국 건축가들의 고민을 아주 현명하게 풀어나간 작품으로 평가된다. 역사성과 간결함을 내재한 외양으로 인해 두드러지지는 않으나 볼수록 깊은 맛이 있는 담백한 건축의 전형이며, 일본을 통해 이식된 서양 근대건축으로부터 오는 영향의 불안에서 벗어난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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