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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36> 스타일

입력 : 2011-07-13 00:28:26 수정 : 2011-07-13 00: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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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처럼 고정관념과 맞설 때 새 스타일 만들어져

비틀스, 스타일을 창조하다

비틀스(The Beatles)! 그 이름은 하나의 ‘스타일’을 상징한다. 또한 이제는 어떤 정신을 대표하는 이름이며, 일종의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나중에 보면 별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혁신적인 것이어야 하고 과단성을 필요로 한다.

비틀스가 ‘캐번’ 클럽 애플 레코드사 옥상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하는 모습.
비틀스는 싱글 ‘I Feel Fine’에서 피드백 주법을 최초로 시도했고, ‘I Need You’에서 ‘와와 페달’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Yesterday’에서 대중음악 최초로 현악 4중주를 사용했으며, 1965년에 역사상 최초로 대형 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다. 또한 앨범을 히트곡 모음집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을 깨고 앨범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여기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었으며, ‘Rain’은 테이프를 역회전시키는 백 마스킹을 최초로 사용한 노래였다. 이 외에도 비틀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했던 십 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그들이 만들어낸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시도는 이루 헤아릴 수 없도록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틀스가 위대한 것은 현대 대중음악에서 록(Rock)이라는 장르가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했고, 예술성을 가미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별개로 여겨지던 가수와 밴드를 합쳐버렸고 가수와 작곡가를 통합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그 모든 것을 20대에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천재적이며 얼마나 대단한 예술가인가를 알 수 있다. 20세기의 대중음악은 비틀스가 지배했다.

내가 어렸을 때 비틀스는 정점을 찍고 있었고,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비틀스가 영국의 여왕에게 훈장인가 작위인가를 받고 궁에서 나오는 장면이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팬들은 열렬히 환호하고, 비틀스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네 명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그들이 해체된 것은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이었는데, 그때 내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갖게 된 그들에 대한 인상은 작위나 훈장과는 상관없이 바가지 머리를 한 채 소리를 왝왝 질러대고, 젊은 처자들을 꼬여 환장하게 하는 퇴폐의 상징이었다.

지금 지나간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의 당시 매체들은 비틀스에게 무척 비호감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금세 해체할 것이라는 둥,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길 수 없는 그냥 지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둥…. 나는 오히려 그들이 해체한 몇 년 뒤 고등학생 때 동네 레코드가게에서 비틀스의 명곡을 17곡만 모아놓은 두 장짜리 빽판(해적판)을 사면서 비틀스라는 깊은 바다에 풍덩 뛰어들게 되었다.

그 레코드에 실린 노래들은 너무나도 흔한 ‘Yesterday’ ‘Let it be’ ‘Hey Jude’ ‘Michelle’ ‘Girl’… 그런 곡들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보편적 정보의 세상이 아니었으므로 비틀스에 대해 알고 싶어도 알 방법이라곤 라디오 방송을 열심히 듣다가 주워듣는 조각정보들이 전부였고, 접할 수 있는 노래들도 대부분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곡들이었다.

리버풀의 후미진 주점에서 노래하던 네 명의 젊은이가 능력 있는 레코드 가게 주인을 만나 본격적 쇼 비즈니스를 하며 유명해지고, 그들을 키워냈던 매니저는 과로로 사망하고, 혼란에 빠진 그들이 심오한 정신세계를 가진 명곡들을 만들어냈더라는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어떤 팝 칼럼니스트가 쓴 작은 비틀스 해설집을 구입하면서였다. 인쇄 상태와 지질이 무척 거칠었던 그 책에는 윤곽이 희미한 흑백사진들이 가끔 인심 쓰며 한 장씩 들어가 있었는데, 나는 그 책을 갑자기 종교에 빠진 신도가 경전을 보듯 꼭 안고서 읽고 또 읽었다. 말하자면 팬덤의 가장 기초인 종교적 승화다. 나중에 비틀스 관련 인물과 연도와 곡을 줄줄 외울 정도였는데, 그때 외웠던 많은 정보들은 ‘A day in the life’ ‘Revolution# 9’ 같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곡들에 대한 것이었다.
 
비틀스가 데뷔당시 공연했던 ‘캐번’ 클럽.
비틀스는 영원하다

비틀스의 시작은 1957년 당시 17살이던 존 레넌이 밴드 ‘퀘리멘(QuarryMen)’을 구성하면서부터이다. 존 레넌보다 두 살 어린 폴 매카트니가 ‘퀘리멘’에 합류하고, 그해 연말에 조지 해리슨이 가입한다. 1959년 학교를 중퇴한 세 사람은 멤버를 보강하여 ‘실버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리버풀과 함부르크를 오가며 연주하기 시작한다. 대단한 성공은 아니었어도 그 사이 비틀스는 꽤 알려진 밴드가 되었는데, 결정적인 성공의 계기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이라는 사람이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부터이다.

영국 북부에서 커다란 레코드점을 경영하던 엡스타인은 우연히 어떤 고객이 비틀스의 음반을 찾으면서 비틀스와 인연을 맺는다. 당시 비틀스는 ‘캐번’이라는 클럽에서 연주했는데 대중적으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아 매장에 비틀스의 레코드가 없었다. 완벽성을 추구하던 상인 엡스타인은 수소문하다 급기야 비틀스가 연주하는 캐번을 찾는다. 그때가 1961년 11월 9일이었다고 한다.

비틀스의 연주를 보고 들은 엡스타인은 그들, 특히 존 레넌에게 반해서 매니저가 되기로 한다. 리버풀 지하 클럽에서 연주하던 20대 초반의 4인조 밴드 비틀스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비틀스의 옷차림, 무대 매너 등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실행시킨 엡스타인의 매니지먼트 덕에 비틀스는 승승장구하여 1964년에는 미국까지 정복하는 기염을 토한다.

미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나아가 세계의 비틀스가 되고 있을 즈음, 그들은 세계 각국에서 공연할 때마다 엄청 유명해졌고, 특히 필리핀에서는 이멜다의 초청에 불응했다가 봉변을 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1966년 3월 4일 존 레넌은 이브닝 스탠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틀스는 그리스도보다 위대하다”는 말을 했다가 커다란 물의를 빚었다. 당시 엄청난 여론의 역풍을 맞고 급기야 기자회견에서 사과하기에 이르는데, 이를 계기로 그들은 음악여행에 의욕을 잃는다. 그간 승승장구하며 잠시의 휴식도 없이 내달려 심신이 이미 지칠 대로 지쳤던 터라 여러 가지로 그들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젊음과 혁신의 아이콘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다가 잠시의 침체기에 빠진 비틀스는 고난이 닥칠 때 오히려 예술적으로 더욱 승화되는 전형적 천재의 모습을 보이며, 아티스트의 길로 들어섰다는 신호탄과 같은 ‘Revolver’ 앨범을 낸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온 것이 ‘Sgt. Peppers’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이다.

알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 중에 나보다 더한 비틀스 마니아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정말 부럽게도 비틀스의 앨범 모두를 영국과 미국에서 제작된 원판으로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집에서 비로소 전설로만 알았던 ‘Sgt. Peppers’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을 구경할 수 있었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는 ‘A day in the life’도 들을 수 있었다.

앨범의 디자인과 그 안에 담긴 노래는 환상적이었다. 1967년에 만들어진 그 앨범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반으로 꼽힌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사운드와 깊이 있는 가사, 그리고 음악적 실험은 언제 들어도 놀랍다. 명작이 지닌 영원한 현재성을 가지고 있는 앨범이다.

전체 구성은 지금은 많이 쓰이는 방식이지만 그 당시에는 처음 쓰였던 연주회 형식이었다. 공연이 시작된다는 알림이 있고, 관객들의 환호가 들리고, 연주가 시작된다. 사이키델릭하면서도 교향곡의 무게를 지닌, 인도의 신비로움이 들어 있기도 하고 가벼운 재즈의 선율이 흐르는 음악이 차례로 나오다가 마지막을 알린다. 관객이 열광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장중한 ‘A day in the life’가 나온다….

“나는 오늘 좋은 운을 타고나 크게 성공한 사내가 나오는 신문기사를 읽었어….”(I read the news today oh, boy/ About a lucky man who made the grade)로 시작되는 그 노래는 일상과 환상이 기묘하게 뒤엉키며 도도히 흐르다가, 마지막에 커다란 급류가 되어 의식 너머로 장엄하게 흘러간다.
‘데 스틸’의 이념과 모던 스타일의 삶을 담아내 20세기를 대표하는 주택으로 손꼽히는 ‘슈뢰더 하우스’.
스타일, 시대를 말하다

1969년 겨울 비틀스는 기록영화 ‘렛잇비’ 촬영 말미에 런던에 있는 애플레코드사 옥상에 올라가 공연한다. 소란스러워지자 경찰이 오고, 미처 모르던 주변 사람들이 멀리서 그 공연을 지켜본다. 비틀스는 마지막으로 ‘Get Back’을 부르며 공연을 마친다. 존 레넌은 노래를 끝내고 “이로써 우리는 오디션을 멋지게 통과하였습니다”라는 농담을 남기고 내려간다. 그것이 비틀스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1970년 4월 폴 매카트니의 탈퇴 선언을 계기로 그들은 10여년의 활동과 13장의 앨범을 남기고 해산한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음악은 지금까지도 20세기의 음악을 대변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18세기에 독일 고대미술사가 빙켈만은 예술을 생활 형식과 관련지으며 ‘Stil’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영어로는 스타일(style)인 이 단어는 원래 고대인이 초를 칠한 널빤지에 글자를 쓸 때 사용한 뾰족한 철필(鐵筆·라틴어의 stilus, 그리스어의 stylos)을 뜻한다. 이것이 ‘서체’ ‘문체’ ‘양식’ 등의 의미로 확장되고, 나아가 모든 예술 분야에서 각각의 작가나 장르, 시대 등의 고유한 특징적 표현구조를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즉 스타일이란 예술적 생산물, 텍스트, 의복, 그림, 건물, 차 등 광범위하게 사물을 분류하는 기준으로서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적 입장이 타협되고 표현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건축, 미술, 문학 등의 분야에서 어떤 시대를 규정하거나 전환되는 지점을 부를 때 로맨틱 스타일·고딕 스타일 하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단순히 개인의 복식이나 머리 따위의 모양을 가지고 ‘스타일이 좋다, 나쁘다’를 평가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 가져다 붙여도 어울리는 아주 유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아예 이 말을 이념으로 표방한 디자인 조형 운동이 ‘데 스틸(De Stijl·1917∼1931)’이다. 네덜란드 화가 되스부르그(Doebsurg)와 몬드리안(Mondrian), 건축가 오우트(Oud)와 리트펠트(G Rietveld) 등은 “자연의 목표는 인간이고 인간의 목표는 양식”이라고 선언한다.

‘데 스틸’의 이념을 반영해 기계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리트벨트의 의자 디자인.
비틀스의 전신인 ‘퀘리멘’이 결성되기 40여년 전인 1917년 무렵, 유럽 각 도시의 예술가 그룹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전통과 편견에 맞선 각자의 이념을 내세우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미 큐비즘, 퓨리즘, 표현주의 등이 널리 알려진 가운데, 되스부르그를 리더로 한 데 스틸은 같은 이름의 잡지를 출간하면서 장식을 배제하고 단순 명확한 기하학적인 형태-심지어 이들은 대각선의 사용 문제로 결별하기도 한다-를 통한 미학을 탐구했다.

몬드리안은 단순한 직선으로 면을 분할하여 적·청·황·백·검정색으로 화면을 구성했고, 리트벨트는 수평 판재로 3차원의 형태를 만들고 적색과 청색으로 칠해서 나무의 결을 숨기고 기계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레드 앤드 블루 체어’와 그런 회화적 이념을 건축에 반영한 ‘슈뢰더하우스’를 디자인했다.

1924년 지어진 슈뢰더 하우스는 바로 이웃한 전통적 형태의 집들과 비교해 보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보아도 충격적이다. 내부지향적이며 폐쇄적이던 공간개념으로부터 벗어나 공간을 자유롭게 구획하는 가변형 벽체와 외부 공간을 향해 열린 개방성 등, 실제 사용자의 요구를 깊이 고민하고 반영했다는 점에서 ‘모던 라이프’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택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비틀스가 그랬듯이 젊은 예술가들이 고정관념과 편견에 맞서며 부딪칠 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이 창조된다. 그리고 그것이 보편성을 얻을 때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히 기억되며 그 시대를 말하는 증표가 된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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