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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32> 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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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5-09 23:32:09 수정 : 2011-05-09 23:3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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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배치는 땅의 장단에 맞춘 구성이며 땅을 이용한 說法 소리의 길

산조(散調)란 흐트러진 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19세기가 거의 저물어갈 무렵 이 땅에서 솟아오른 새로운 음악 형식이다. 기존의 음악이 주로 의식이나 의례를 위한 음악으로서 관념적이고 감성보다는 목적에 충실했다면, 산조는 인간의 감정과 생각 등이 음악의 내용으로 들어가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과 느낌을 중시한다. 그런 자유로움이 새로운 음악의 장르로 창조된 것이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찰로 범종루를 지나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올려다볼 때 무한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진양조엔 눈이 내리고, 중모리엔 봄이 오고, 중중모리엔 님이 찾아오고, 자진모리엔 희로애락이 담겨 있고, 휘모리에서 젊음이 가고 뒤풀이엔 만사를 정돈한다.”

당대의 풍류객이며 가야금의 명인인 서공철은 가야금 산조를 그렇게 풀어냈다. 최초의 산조는 1890년쯤 전남 영암 출신의 김창조에 의해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때는 500년가량 지속되던 조선이 기울어가는 시기였고, 신분제가 무너지고 봉건사회의 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이 솟구치던 시절이었다. 산조는 남도의 슬픈 소리인 계면조를 바탕에 깔고, 서민의 헛헛한 속을 달래주는 판소리의 장단과 무속의식의 반주음악인 시나위를 창조적으로 습합하고 발전시켜 만들어졌다. 즉 산조는 음악을 만들고 즐기는 민중의 사회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시대가 고스란히 투영된 무척 건강한 음악 형식이다.

부석사는 진입축과 안양루 오르기 전 꺾이는 두 개의 축을 갖는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접하는 그 익숙하고 오래된 소리를 그다지 즐기지도, 잘 간수하지도 못했다. 세속적이게도 촉촉한 마당과 정갈한 유리문이 달린 마루를 가진 고급 음식점이나 떠올리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우리 세대는 대부분 우리 문화에 접근할 올바른 통로가 없었고, 속도 위주의 근대화, 산업화 시기에 우리가 주입받는 것은 낡은 것은 없애고 새로움으로 생활을 채우자는 강박이었다.

산조는 느린 진양조, 보통 빠른 중모리, 좀 빠른 중중모리, 빠른 자진모리, 매우 빠른 휘모리 장단으로 곡을 짠다. 악장이 바뀔 때 연주의 속도뿐 아니라 장단 자체가 빠른 장단으로 질적 변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무언가를 향해 치닫는 속도감을 아주 강하게 느끼게 되고 점점 소리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반복하고 돌아드는 맛이 장중하고 완만한 도드리장단 없이 몰아치는 장단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진취적인 성향이 내재되어 있고, 사람들이 몰입하게 만드는 구성의 힘이 있다. 바탕에는 계면조가 깔려 있어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구성에서부터 19세기 말 독특한 변혁의 공기가 느껴진다.

‘살크당 다로당’ 하며 산조의 연주는 아주 조용히 줄을 고르며 시작한다. 손가락이 가야금 줄 위를 아주 가볍게 겅중거리며 건너다니다가 북을 잡은 고수가 추임새를 넣어주며 같이 문을 열어준다. 문이 열리고 마치 뒷짐을 지고 이곳저곳을 살피듯이 아주 진중하게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걸어다닌다. 그 부분이 진양조인데 초심자들에게는 무척 길고 지루해서 빨리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넘어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고, 수준이 높은 감상자들에겐 드넓은 초원이자 상상을 맘껏 펼칠 수 있는 커다란 도화지 같은 부분이다. 그래서 가야금의 고수들은 그 부분을 아주 정성 들여서 만들고 다듬어 나간다. 이윽고 소리는 고개를 들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북이 조금씩 떨리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 걸음은 곧 달음박질이 되고 사위를 뒤덮는 춤이 된다.

공주 마곡사는 도드리장단처럼 느긋하게 처음부터 목적지를 보며 들어가는 연역적 방식이다.
마음의 길


산조는 유파에 따라 그 장단과 구성이 조금씩 다르고, 연주가들의 개성이 음악으로 침투하여 지속적으로 또 다른 유파가 생성되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파악하면서 들으면 훨씬 흥미롭다. 손꼽히는 가야금 산조의 명인은 김죽파, 함동정월, 강태홍, 성금연, 김윤덕, 서공철 등이 있다.

김죽파는 산조의 문을 연 김창조의 손녀로 1911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난초이다. 조부와 조부의 제자 한성기에게 가야금을 배웠는데, 당시 여자가 가야금을 연주한다는 것은 기생이 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다. 12세에 권번에 들어갔다가 그녀의 연주에 반한 사람과 결혼한다. 22세인 1932년부터 60년대 후반까지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연주를 시작했고, 68세가 되던 1978년 가야금산조의 인간문화재가 된다. 45세 무렵 그의 가야금 산조에 세산조시(단모리 장단으로 짜여진 가락)를 짜 넣음으로써 김창조-한성기로부터 이어진 가락을 집대성하여 ‘김죽파류’를 완성한다.

흔히 김죽파의 연주풍을 여성적 산조라고 한다. 조부는 죽파에게 “가야금은 재주로 타는 것이 아니라 혼이 손에 떨어져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작 패듯 하여서는 안 되고 잔잔한 호수에 잔물결 치는 소리로 나가다가 별안간 물속에서 용 못된 이무기가 한 번 용틀임하여 솟아올랐다가 내려가 막 물이 출렁거리고 거품 내듯 해야 한다”고 했다.

김죽파의 연주는 무거우면서 부드럽고 너른 전라도의 땅에 누워 있는 느낌이 나고, 함동정월의 연주는 달콤하면서도 쇠의 기운이 있고 가슴을 뛰게 한다. 마치 붉은 기가 도는 전라도 땅을 내쳐 달리는 기분이 든다.

함동정월은 1917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함금덕이다. 아버지와 오빠 모두 악공이었으나 사회적 멸시를 받는 예인 생활을 포기하고 농사짓던 중 점점 생활이 곤궁해져 11세에 광주 권번에 든다. 시조와 승무·검무 등을 익히며 음악과 인연을 맺고, 김창조의 제자이며 6촌 형부인 최옥산을 만난다. 줄을 팽팽히 당겨서 남성적인 연주를 하는 최옥산류의 가야금을 계승하여 승승장구하며 19세 때는 판소리대회에 입상하여 일본에서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한다. 이후 서울의 조선 권번에 들어 활발히 활동을 하다, 21세 때 정씨라는 부자의 5번째 부인이 된다.

‘물은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알거든’(함동정월 구술, 김명곤·김해숙 편집,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 시리즈, 1991).
그 이후 그녀의 화려한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집안의 몰락과 연이은 자식과의 사별로 괴로움을 헤매다 결국 남편과 헤어지고, 다시 가야금을 잡고 어렵게 연주자의 생활을 하던 중 53세에 고수 김명환을 만난다. 전남 옥과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북에 미쳐 평생 북을 잡고 살다 전쟁 때 집안이 몰락하여 피폐해진 김명환과, 비슷한 처지의 함동정월은 장년의 나이에 만나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된다. 둘이 만나 악기를 잡으면 끝이 나지 않았고, 둘의 연주는 거의 ‘신접’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끈질긴 가난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고 4년 만에 둘은 헤어진다. 함동정월은 나중에 인간문화재에 올랐으나 그녀를 평생 누르고 있던 불행과 켜켜이 쌓인 한을 품고 변두리의 가난한 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녀가 산조는 악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담는 것이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의 기막힌 인생은 정도가 심하기는 했지만 그 시기를 보낸 이 땅 사람들, 특히 여인들의 보통 삶이 아니던가. 그녀를 기록한 김명곤은 지금도 함동정월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말한다.(‘물은 건너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 봐야 알거든’, 뿌리깊은 나무, 1991)

그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인데, 그나마 다행히 ‘뿌리깊은 나무’에서 김죽파와 함동정월 등의 연주를 담은 레코드를 만들어 놓았다. 김명환이 북을 치고, 함동정월이 팽팽히 당겨놓은 줄을 어르는 그 연주는 백지 위에 커다란 붓으로 마구 휘두르며 그려대는 신들린 그림 같다. 그 그림은 여러 갈래로 애끓게 흘러가는 그들의 마음이며 소리의 길이다.

정신의 길

절은 들어가는 곳이다. 여러 개의 문을 열고, 여러 개의 계단을 오르며, 인간이 보다 높은 수준의 존재가 되기 위해, 혹은 현실의 괴로움을 건너기 위해, 단계를 거치며 깊이깊이 들어가는 곳이다. 절을 구성하는 가람배치는 그 의미를 건축적으로 승화한 것이다. 가람이란 범어의 상가라마(sangharama, 승가람마·僧伽籃摩)에서 나온 말로 중원(衆園) 혹은 원림(園林)으로 번역되는데, 뭇 승려들이 즐겨 보이는 곳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불교에서는 세상에 10개의 계단(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 성문, 연각, 보살, 불)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걸 하나씩 오르게 되는데 부처를 믿는 것, 절로 가는 것이 그런 의지의 현실화이다. 그래서 절은 오른다. 천천히 오르며 마음에 얹혀 있던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절을 지은 건축가들은 관념과 현실을 불경과 땅이라는 눈에 보이는 객체에 투영하고, 마치 장엄한 음악처럼 건축이 완성된다.

가야금산조 명인 함동정월(1917∼1994). 최옥산류의 가야금에 자신의 삶을 얹은 연주는 전라도 땅을 내달리는 듯 가슴을 뛰게 한다.
석사는 무척 깊은 절이다. 일주문에서 시작해서 천왕문을 거치고, 범종루·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 앞에서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면 소백산의 연봉이 구물구물거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어지간히 올라왔구나!” 그런 소리가 절로 난다. 그 일련의 흐름은 한편의 드라마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치며 오늘날의 가람배치가 완성된 부석사의 모든 건축과 조경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맞추어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초입에서 10개의 석단을 오를 때 만나는 계단은 아랫부분이 넓고 윗부분이 좁게 만들어져 강력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석단의 간격도 가지런한 것이 아니라 완급이 있다. 사람들은 저절로 위로 몰아가는 그 장단을 타게 되고, 두 개의 석탑이 시립하고 있는 곳을 지나, 범종루 아래를 지나 무량수전을 만나는 지점에서 머리에서 들리는 ‘쿵’ 소리를 듣게 된다. 마치 자진모리, 휘모리를 듣는 것 같다. 왜 그 지점에서 감동을 받는 것일까?

부석사는 통일신라의 사상적 배경을 만들어준 화엄종의 종찰인데, 화엄종의 주불은 비로자나불이고 그를 모시는 법당은 대적광전이다. 그러나 부석사에는 대적광전이 없고, 대신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인 무량수전이 있다. 그래서 범종각을 지나며 나오는 영역이 예전에 대적광전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추정만 해볼 뿐이다.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부석사를 이루고 있는 축이다. 일주문-천왕문-범종각을 거치는 곧은 진입 축은 안양루 아래에서 끝나고, 그 자리에서 사선으로 교차하는 새로운 축이 시작되어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관통한다. 두 개의 축이 교차하면서 생기는 마당에 서는 순간, 빨리 달리던 물체가 갑자기 끼∼익 소리를 내면서 정지하고 나서의 정적과도 같은 존재의 영원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속도는 소거되고 방향도 바뀌면서 생기는 공간감! 그것이 가슴과 머리를 쿵 하며 때리는 감각으로 우리에게 치환되는 것이다.

부석사가 몰이의 장단이 주가 되는 산조 같은 형식이라면, 마곡사는 도드리장단처럼 느긋한 절이다. 신라 말 창건된 마곡사는 ‘춘마곡추갑사’라고 봄에 특히 좋은데, 백범 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 잠시 기거하신 곳이다. 매표소를 지나 큰 개울을 끼고 들어가다 보면 대뜸 건너편으로 진입의 종점인 대웅전과 대광보전이 보인다. 그러나 바로 건널 수는 없고 S자로 크게 돌아가야 비로소 해탈문, 천왕문을 통해 처음에 옆모습을 얼핏 보았던 대광보전과 대웅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깊이 들어가는 형식은 같지만 부석사가 직진형이라면 마곡사는 우회형이다. 부석사가 끝을 모른 채 계속 끌려들어가는 귀납적 방식이라면 마곡사는 처음부터 결론을 알면서 가는 연역적 방식이다. 모두 땅의 장단에 맞춘 구성이며, 정신의 끝자락인 진리에 이르는 길에 대한 땅을 이용한 설법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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