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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9> 대교약졸(大巧若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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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3-22 21:09:44 수정 : 2011-03-22 21: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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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썼다는 봉은사 ‘판전’
겸재 정선이 70세 넘어 그린 ‘박연폭’
진정한 ‘대교약졸’의 경지에 이른 명작
진정한 고수는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 자기 분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사람, 혹은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대가 혹은 달인이라 부른다. 몇 년째 텔레비전의 코미디 프로에서 활약 중인 어떤 개그맨 덕에 그 말이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어떤 분야건 고수의 경지에 이르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기에 어쩌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매일 걸리는 이상하고 다양한 형식의 감기로 하루 걸러 소아과병원에 가야 했다. 그런데 병원 중에서도 소아과는 특히 자신의 증세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이들을 상대로 하기에 의사의 경험과 예지력이 없으면 진단과 처방이 쉽지 않은 과목이다.

◇단순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공간과 형상의 핵심을 표현한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의 라흐티 지역의 교회 스케치.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예방접종을 받으러 처음에는 집 앞에 있는 소아과에 갔었다. 그 병원 의사는 아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아이의 목이 조금 비뚤어졌다며 꼭 교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초보의 부모라면 다들 그렇듯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전전긍긍하던 우리는 마치 아이가 무서운 천형에라도 걸린 듯 안절부절못하며 주변 사람들과 상의를 했다. 그중 누군가로부터 인근에 자신이 어릴 적 다녔던 소아과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에 계시는 의사가 경험이 풍부한 분이니 한번 만나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며 찾아갔다.

화려한 화장과 의상으로 단장을 하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깍쟁이 아가씨 같은 요즘 식의 병원과 달리, 그 병원은 무척 오래된 냄새가 풍겨 나오는 곳이었다. 낡은 나무의자가 시외버스 터미널의 대합실처럼 놓여 있는 환자 대기실은 마치 푸근한 인상과 편한 복장으로 맞아주는 시장아주머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척 환자가 많았다.

오랜 대기시간을 지나 비로소 만나게 된 백발의 의사는 역시 무척 엄격해 보이는, 감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권위 그 자체인 분이었다. 여러 말도 못하고 간단하게 들은 바대로의 아이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자, 그 선생님은 물끄러미 들여다보시더니 당신이 보기에는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원래 태어나기 전에 오랫동안 웅크린 채로 있다가 나오기에 자세가 약간 비뚤어진 상태로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정상으로 된다, 장엄하게 일갈했다.

이후 우리는 그 의사를 주치의 삼아 들락거리게 되었다. 당시는 의약분업이 시행되기 전이어서 보통 처방전의 조제는 간호사가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의사는 3명 단위로 진단을 하고 약제실로 들어가 일일이 약을 한 알 한 알 쪼개며 마치 아주 섬세한 조각품을 만들듯이 정교하게 조제해주었다. 그래서 그 병원에서 진료와 처방을 받는 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약을 먹으면 신기하게도 아픈 아이들이 금세 나았기에 멀리서 와서 기다리는 환자들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의약분업이 된 후 근처 약국 약사에게 들어보니, “다른 병원은 약 한 알, 반 알 식으로 처방전이 나오는데, 그 선생님은 6분의 1, 8분의 1알 하는 식으로 정밀하게 양을 정해 처방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약만으로는 안 될 정도로 증세가 심하면, 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며 무척 미안해하곤 했다. 그 의사는 아이들이 걸릴 만한 모든 질병을 다 알고 있었다. 횟수는 줄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 병원에 다닌다.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자기 분야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갖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진정한 고수가 되나 하는 존경의 마음을 품고.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고수의 한 획

병원 이야기를 하는 김에 하나 더 하자면, 십 년 전까지 나는 고질적으로 허리가 안 좋아 침도 맞아보고 여러 가지 약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서울 근교 소도시에 용한 한의원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병원은 차가 씽씽 달리는 국도변, 아주 작은 건물에 주변의 잡초들 속에 섞여 있었다. 낡고 좁은 곳이었고, 역시 의사도 무뚝뚝하고 근엄한, 전형적 의사의 풍모였다. 이야기를 듣고 진맥을 하더니 불쑥 “목이 부으셨네요” 했다. 목이야 감기가 걸리면 붓고, 조금 떠들어도 붓지 않나 반문하자, 그 의사는 아주 건조한 음성으로 설명을 했다. 목이 부으면 위가 안 좋아지고, 위의 상태가 안 좋기에 허리가 아픈 것이다. 그러므로 목을 치료하자. 그리고는 1주일 분량의 약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어주었다. 그 후 20여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고질적인 허리 통증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라졌다.

진정한 고수의 한 수였다. 고수의 한 번의 몸짓은 장황한 서론도, 실속없이 주렁주렁 달리는 부연설명도 없이 단순하게 그러면서도 정곡을 꼭 집어서 찌른다. 우리는 모두 고수의 한 획을 숨을 죽이며 기다린다. 그처럼 증세를 보되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감춰진 뒤를 보는 것, 현상을 넘어선 그 뒤에 있는 진실을 보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그러므로 형상 너머의 것을 도라고 하고 그 아래의 것을 ‘기’라고 한다. 천지의 도리를 본받아 세상에 적용함에 도리에 적합하게 재량껏 변경해서 씀을 일컬어 ‘변’이라고 하고, 그 변용이 막힘이 없음을 ‘통’이라고 한다. 그 변통의 일을 크게 일으켜 세상에 이롭도록 베푸는 것을 일컬어 ‘사업’이라고 한다.”(是故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化而栽之謂之變/ 推而行之謂之通/ 擧而措之天下之民謂之事業 (周易 繫辭傳 上 제12장)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말이 있다. 훌륭한 기교는 도리어 졸렬한 듯하다, 혹은 아주 교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천하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평생 극심한 ‘왕자병’에 시달리며 정치적이지도 못하고 어른스럽지도 못해서, 가진 재능에 비해 평생 큰 도량을 베풀거나 보여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늘 한 번 다녀온 청나라를 그리워했고, 붓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는 잡히기 직전 긴장으로 뻣뻣해진 쥐 수염으로 만든 붓과 최상의 종이로 글씨를 썼다. 그는 귀양도 자주 다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글씨 독촉에 시달리며 전형적인 천재의 길을 걷다가, 지금이야 강남의 한복판이지만 예전에는 뚝섬까지 나가서 배를 타고 건너서 들어와야 했던 삼성동 봉은사에 앉아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그가 71세 때 세상 떠나기 보름 전에 썼다고 전해지는 글씨가 봉은사 ‘판전’의 현판이다. 그 현판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의 서예 작품이 가진 장중하고 기품 있는 필선이 아닌 듯 보였다. 무언가 어눌하면서도 거칠고 무척 큰, 마치 예전에 할아버지가 달력을 찢어 그 위에 볼펜으로 빠르게 메모한 듯한 그 글씨, 모든 획들이 낱낱이 분해되어 획 간의 유기성은 전혀 찾을 수 없던 그 글씨…. 서예의 최고 대가가 최후로 썼다는 절필이 어째 저 지경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붓글씨 공부를 했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 석봉 한호의 글씨 등을 보며 몇 바퀴를 돌아 다시 판전의 현판으로 갔다. 그 글씨는 변함없이 무척 크고 거칠었는데 이번에는 무언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추사가 평생을 돌고 돌아서 어린 시절 창의궁 근처에 살 때 입춘첩을 쓰던 시절, 처음 글씨를 쓰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고 마치 우리에게 최후통첩을 하듯이 써 내린 글씨였다. 정말이지 명작이다.

그림으로 그 정도 되는 것이 겸재 정선의 ‘박연폭’이다. 이 그림도 겸재가 70이 넘은 나이에 최고의 경지에 오른 때 그린 것이라고 한다. 겸재는 알다시피 화원도 중인도 아닌 어엿한 양반이며, 왕까지도 호를 부를 정도로 나름 사회적인 위치가 높았던 분이다. 뿐만 아니라 평생 부족하지 않게 아니 풍족하게 살았으며, 귀양 한 번 가지 않았던 그야말로 최상급의 복 받은 인생이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럼에도 그가 최고의 예술가로서, 단지 그림 잘 그리는 정도가 아니라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였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실험을 거듭하였다는 것이다.

그중 최고가 말년에 그린 ‘인왕제색도’와 ‘박연폭’이라고 한다. 겸재는 개성의 박연폭포를 자신이 보았던 실경을 마음속에 담아 와서 그 느낌대로 그렸는데, 폭포를 길게 늘이고 바위를 거칠게 긋고 주변을 극단적으로 평면화시켜서 대담하게 바꾸었다. 일흔이 넘은 노 대가의 진정한 포스가 느껴진다. 그가 이전에 그렸던 ‘박생연’이라는 똑같은 소재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소나무의 표현이나 위치, 바위의 표현, 물의 표현들…. 진정한 대교약졸의 경지이다.

◇겸재 정선이 개성의 박연폭포를 보고 마음속에 담아 와서 그린 ‘박연폭’. 노 대가의 힘이 느껴진다.
마지막에 이르는 곳, 자기 자신을 만나다


건축가들 또한 스케치를 많이 남긴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이런저런 구상들을 옮겨놓는 스케치는, 말하자면 이상 속의 건축적 개념과 구체적 현실로서의 건축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그림을 많이 그린 건축가로는 화가임을 내세우는 르 코르뷔지에도 있고, 미국 건축가 스티븐 홀도 있고, 무척 강한 선을 구사하는 루이스 칸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의 스케치를 무척 좋아한다. 그의 스케치는 연필로 종이에 스윽스윽 긋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단순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장식을 빼고 그가 하고자 하는 공간과 형상의 핵심만 표현하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단순하지만 인간적이고 힘이 있는 그림의 전범(典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토는 사람들이 그를 국제주의 건축가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건축을 핀란드에서 하고 싶고, 핀란드에서 건축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국제주의가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다른 방식이며, 만일 배경을 형성하는 것, 지역에 뿌리내린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라고도 했다. 핀란드 내륙 라흐티(Lahti)의 지역 건축가로서 출발하여 핀란드의 유력 건축가로, 나아가 세계적 건축가로 알려진 그는 유명해진 이후에도 지역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자신이 발 디딘 곳보다 먼 곳, 내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와 이름 외우기에 몰두하는 지금의 우리 모습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알토의 건물은 들어가는 사람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그런 위엄과 가슴을 열게 하는 그런 따뜻함이 공존한다고 하는데, 다만 나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의 작품집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그의 스케치를 통해 그 느낌을 읽었다. 그의 그림은 심을 곧추세우고 종이에 아로새긴 것이 아니라, 연필을 느슨한 각도로 세우고 종이의 결대로 슬슬 긁어댄 것 같다. 마치 고승이 세상의 진리를 한마디로 농축시켜 토해내듯이 그의 그림은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본질에 접근한다. 그렇게 그려진 공간의 이미지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짝 놓인 듯 자연스럽고 따뜻하다.

치장을 걷고 시공간을 가로질러 한순간에 본질에 접근하는 그 느낌, 그런 영화를 찍는 감독도 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1912∼2007)는 2007년에 94세로 사망한 이탈리아의 천재적인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줄거리가 극도로 생략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그를 둘러싼 풍경과 공간을 통해 표현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치열한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다. 나는 그를 중학교 때 우연히 만나면서 영화에 눈을 떴다. 대사도 없고 음악도 별로 나오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사건의 진행도 한없이 미뤄지는, 말하자면 스틸 사진이 그냥 무성의하게 연결된 듯한 데도 무언가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열심히 그의 영화를 찾아다녔지만, 당시에 그의 영화를 볼 기회란 도통 없었다. 영화 잡지 속에서의 조각 지식 혹은, 가끔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영화들, ‘태양은 외로워’ ‘욕망’ ‘정사’ 등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영화들은 모두 어김없이 졸렸지만, 어김없이 감동적이었다.

그의 영화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전통 위에서 만들어졌지만, 마치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처럼 어느 누구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심오하며 눈부신 성찰로 가득했다. 그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마지막 작품은 뜻밖에도 15분 남짓의 흑백 단편영화 ‘응시’(Eye to eye, 2004)이다.

노 감독은 그 영화에서 스스로 높고 단순한 색과 질감만 남은 고색창연한 박물관의 실내로 들어가, 르네상스의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모세를 쳐다본다. 미켈란젤로가 미켈란젤로를 그윽하게 쳐다보는 것이다. 눈과 눈이 교차하면서 서로 바라보는 그 모습은 흑백이지만 무척 강렬하다. 거기서 그가 바라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는 마지막 작품에서 아주 단순하고도 단순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대가들은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을 바라보고, 그것을 가장 단순한 언어와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때 보는 것은 현상의 본질로서의 자신이다. 큰 기교를 흉내 내기는 쉬워도 졸(拙)함을 흉내 내기는 쉽지 않다. 아니 일부러 졸함을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졸함이란 미숙함이 아니라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자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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