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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8>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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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3-08 21:10:06 수정 : 2011-03-08 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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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기술·아름다움 앞서 건축가는 사람을 바라봐야 건축가, 막연한 환상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건축가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진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영국 대성당의 사진을 방에 걸어놓고, 아이가 프뢰벨의 장난감을 갖고 놀며 3차원 조형의 감각을 익히도록 한다. 그 아이는 자라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당황스럽지만 그 말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만드는 뻔뻔하고 오만한 건축가가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이다.

당시의 유행을 거부하고 스승이었던 루이스 설리번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와 자연의 유기적 특성을 결합한 그의 독특한 건축세계는, 철학가이자 작가인 아인 랜드가 개인의 창조력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토대로 쓴 ‘마천루

(원제:The Fountainhead)’라는 소설의 강력한 소재가 된다.

◇사회적 억압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지키려는 건축가의 모습을 그린 아인 랜드의 소설을 영화화한 ‘마천루’(1949)의 한 장면.
나는 그 두꺼운 소설책을 갓 대학에 입학한 해 여름 눅눅한 습기가 가득한 장마철의 도서관에서 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에 개봉했던, 게리 쿠퍼가 주연을 맡고, 킹 비더가 감독한 영화의 몇 장면이 앞 부분에 멋지게 화보로 들어가 있었다. 전문적인 건축용어들이 중간중간 포진해 있어서 줄거리만 따라가기에도 버거웠던 그 책이 미국인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오로지 자유를 꿈꾼 작가의 이념이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개인의 이상으로 그려진 부분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하워드 로크가 보여주는 건축가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전형처럼, 건축가라면 그렇게 세상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펼치는 사람이라는 멋진 그림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자신의 설계가 왜곡되어 지어지는 건축물을 용납하지 못하고 폭파해버리는 극단적인 행동까지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만난 또 다른 건축가, 이집트 구르나 마을에서 ‘민중을 위한 건축’을 구현하고자 한 하산 파시(Hassan Fathy)는 사회 개혁에 기여하는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했고, 한편으로는 히틀러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그려낸 환상적인 계획들은 압도적이긴 해도 자신의 이상을 위해 독재자에 부역하기를 서슴지 않은 그 부도덕성에 할 말을 잃게 했다. 책에서 본, 그리고 세상에 나와서 만난 건축가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일종의 건축 지상주의를 숨기지 못했다.

나는 그런 대단한 건축가를 꿈꾸며 건축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건축을 전공한 건 실은 아버지의 뜻이었는데, “건축가는 멋진 직업”이라는 아버지의 막연한 믿음은 무슨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손재주가 있거나 그림을 곧잘 그리는 아이가 장래를 화가나 조각가로 꿈꿀 때, 걱정 속에서 대부분의 부모가 타협안으로 제시하는 직업이 건축가가 아닌가 싶다.

한동안 ‘빙점’ ‘설국’ 같은 일본 소설이 은근히 유행할 당시, ‘만가’라는 연애소설이 꽤 유명했던 적이 있는데, 주인공이 건축가였다. 원제는 하라다 야스코라는 소설가가 지은 ‘엘레지’였는데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60년대였고, 80년대에 고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다프네의 연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를 뒤져도 자취를 감춘 책이기도 하다.

내용은 지방 소도시에 살며 동네 연극 동우회에서 활동하는 레이코라는 어떤 젊은 여자와 가쓰라기라는 건축가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이다. 딱히 로맨스라 할 만한 일도 없고 별다른 사건도 없어서, 모양도 그럴 듯하고, 분위기는 착 감기는데 맛은 영 밍밍한 것이, 딱 일본 음식 같은 느낌이었다. 레이코는 가쓰라기를 사랑하지만, 그에게는 무척 예쁜 부인이 있고, 그 부인은 바람을 피운다. 레이코는 아련한 가슴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렇다고 가쓰라기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게 전부다.

그 소설에서 가쓰라기는 무척 멋있는 건축가로 나온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차도남’의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그러면서도 바람난 부인을 사랑하는 인간미까지 갖춘 능력 있고 마음 따뜻한 이미지의 가쓰라기는 많은 여자들의 가슴속에 건축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심지어 최근에 고희를 눈앞에 둔 어떤 건축과 선배로부터 자신이 고등학교 때 그 책을 읽었고, 그 책 때문에 건축과를 지망했다는 고백도 들은 적이 있다. 건축가란 그렇게… 아주 막연히 멋진, 마치 외투 깃에 가을바람의 냄새를 담고 문득 문을 열고 집안으로 불쑥 들어올 듯한, 환상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곤 한다.

◇나치의 사상에 동화되어 히틀러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건축가 슈페어(오른쪽).
오해와 이해 사이


한동안 건축학과 신입생들에게 자기소개를 시키면서 건축과에 오게 된 계기를 물어보면, 많은 학생이 일요일마다 방영되었던 TV 인기프로그램 ‘러브 하우스’를 보고 지망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예전에 가쓰라기가 건축가라는 멋진 이미지의 전형을 만들어주었다면, ‘러브 하우스’는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직능의 가능성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금 과장되고 희화된 것이 못내 아쉽지만…. 그런 식으로 건축과에 학생들이 몰릴 때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배경에는 건축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TV 드라마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어떤 직능이나 예술명 뒤에 가(家)라는 글씨가 붙으면 그 직능이나 예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건축가’라는 말 역시 화가나 음악가처럼 예술적 활동을 한다는 의미로 쓰이며, 그 직능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은 국가로부터 공인된 면허를 갖는 자라는 한정된 의미의 ‘건축사’라는 용어와는 엄격한 선을 긋는다. 심지어 굉장히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건축가란, 아주 구체적인 건축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 건축물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지만 그 한계는 사실 모호하다. 건축물이라는 것이 이미 만들어진 것을 수요자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에서 시작되지만, 그 과정에서 건축가와 땅이 적극 개입하게 되고 그 셋의 묘한 화학반응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건축가의 몫인가에 대한 이견으로 자주 충돌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 어떤 이가 경기도 화성에 집을 짓겠노라고 청하기에 두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를 달려갔다. 작은 호수를 끼고 있는 곳으로 경관도 좋고 땅의 상태도 집을 짓기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나를 부른 사람이 이것은 현상설계이며 이른 시일 안에 설계안을 제출해주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내가 그에게 무슨 빚을 진 것도 아니고, 특별히 계약상의 의무로 묶인 것도 아닌데 대뜸 설계안을 내놓으라니….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 얼마 전에 집을 지은 경험이 있는 선배에게 듣자하니, 경기도 파주에 대단한 주택들이 들어선 동네에 유명한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했던 그 선배가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기면 돈이 많이 들고, 결정적으로 불편한 집이 나오므로 여러 명에게 경합을 붙여 설계안을 받아보고 그중에서 고르라는 다소 황당한, 소비자 위주의 조언을 해주었다 한다. 나는 그 오해를 어디서부터 따지고 풀어야 할지 답답했지만, 그러지 마시고 처음에 이야기한 건축가와 잘 상의하고 타협하면서 집을 지으시라고 좋게 이야기하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는 심란한 금요일의 퇴근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건축가의 역할이란 이렇듯 잘못하면 남의 잔치에 끼어들어서 눈치없이 실컷 자기 좋아하는 노래만 불러서 판을 깨는 사람처럼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선배란 사람은 남의 집 짓는 일에 자기의 흥만 실컷 내고 사라진 건축가에 대한 원망을 그런 식의 조언으로 거두절미하고 던져 준 모양이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요즘 무척 잘나가는 작가가 쓴 ‘행복의 건축’이라는 책에도 그런 식의 건축가에 대한 저주가 절절히 나온다. 그는 책에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누이의 집을 지어보고 “철학이 어렵다고 하지만, 훌륭한 건축가가 되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한 말을 인용했는데, 건축가들, 특히 이른바 현대건축의 거장들이 이끄는 건축에 대한 불만을 은근히 비꼬기 위한 것이지 싶다. 행복한 건축을 생각하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내내 불편했다. 그의 말이 구구절절 틀린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르 코르뷔지에, 라이트와 더불어 현대 건축의 문을 활짝 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
이상과 현실 사이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멋진 이름을 가진 건축가는 독일에서 태어나 활발히 활동을 하다가 바우하우스 교장을 하기도 했으며, 나치 집권 후 미국으로 이주해서 시카고를 중심으로 독특한 학풍을 만들고 영향력을 발휘하며 현대 건축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르 코르뷔지에와 라이트와 더불어 현대건축의 3대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또한 코르뷔지에나 안도 다다오가 그러하듯 건축대학을 통해 전문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학습을 하고 개안을 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한다. 최고의 건축가가 되려면 건축을 전공하지 말라고….

“모든 것은 건축이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한스 홀라인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혹은 “모든 사람은 건축가이다”로 이야기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집을 짓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얼마 전 서울대 철학과 게시판에 그 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중학생이 올린 글과, 그에 대한 철학과 학생의 답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철학과에 가고 싶다면 고등학교 때 철학을 공부하면 안 된다….”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그 말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 혹은 전문가집단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준 것 같았다.

대학에 갈 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두 갈래 길, 즉 처음부터 자신의 꿈을 키워서 자신의 길을 가든가, 시험 점수에 맞춘 대학과 학과 중에서 선택하여 미래를 결정하든가 하는 방법 중에 불행히도 나는 후자의 경우였다. 남자가 문과에 갈 경우 특히 내가 원하는 국문과나 사학과에 갈 경우 대부분 미래가 아주 어둡다. 그러므로 이과에 가서 보장된, 탄탄한 미래의 길로 접어들라는 가족들의 강력한 조언이 있었다.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마치 정략결혼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이과에 갔더니, 정작 문제는 입시 때 내가 하고 싶은 전공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결국 성적에 맞추어 처음 들어간 곳이 화공과였는데 적응하지 못하고 일 년도 되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도저히 일생을 그 화학식과 분자기호와 보내는 것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대학시험을 치러 두 번째 선택을 하려는데 어느 대학 건축과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자고 해서 만났더니 대뜸 “너 김중업 아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안다고 하자 그 친구는 너도 아는 그 유명한 건축가가 그 학교 교수였었다고 했다. 다음 “김수근은 아느냐?”고 물어봤다. 역시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름은 들어봤다고 했다. 그러자 역시 그도 그 학교 교수였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정도로 괜찮은 학교이며 역사와 전통이 어떻고 향후 취업 전망까지 상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다. 도대체 이 친구가 무슨 이유로 나를 이렇게 꼬드기는 것일까? 동창이기는 하지만 무척 데면데면한 사이라, 망설이다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를 꼬드긴 이유를 밝혔다. “건축과에 다니려면 제도판 세트가 필요한데, 너 우리 학교에 입학해서 내 걸 사라.” “그럼, 너는?” “사실 나는 만능제도판을 사려고….” 아무튼 나는 그 친구의 소원대로 그 학교에, 이전에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았던 건축과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토록 그 친구가 원했던 제도판 세트 구매는 하지 않았다.

◇이집트 농촌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 하산 파시가 계획에 참여한 구르나 마을.
멋지거나, 혹은 따뜻하거나


나에게 건축이란 그런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건축과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고 미리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냥 건축과를 졸업하면 안전모 쓰고 안전화 신고 현장을 돌아다니는 단 한가지의 영상만이 내 머릿속에 있었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의 물리적인 면만을 본 채 대학에 들어가니 수업시간 내내 이전에 내가 아는 바와는 다른 정신적인 면, 문화적인 면들을 이야기하는 통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결국 건축에 대한 건축가에 대한 개념을 세우지도 못하고 졸업하고 바로 설계사무실로 들어갔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설계라는 것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도제식의 전통이 있어서 처음에 설계를 시작할 때는 무척 힘이 든다. 더구나 구조, 전기, 시공 등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공동의 작업을 해야 하므로 그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은 심지어 일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될 만큼 커질 때도 있다.

그 괴로움이 무척 커지던 어느 날, 나는 퇴근길에 동네 버스정거장 앞에 있는 헌책방에 들렀다가 예전부터 한번 봐야 할 텐데 하고 벼르던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샀다. 알다시피 20여권이 되는 대단한 분량의 소설인데, 헌책방에서 사다 보니 권마다 다양한 버전의 책들이어서 책꽂이에 일렬로 꽂아놓으면 볼 만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장엄한 스펙터클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그물은 넓고도 촘촘해서, 한번 들어가니 괴로움, 즐거움, 혹은 지루함이고 하는 모든 감정이 소거된 아주 적막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살아본 중에서도 아주 행복하게 보냈던 한 계절이었다.

거기에 윤보 목수라는 홀아비인지 총각인지 모르지만 독신에 얼굴을 얽어 우락부락해 보이고 말씨는 투박한 동네 목수가 나온다. 그는 솜씨가 무척 좋아서 평사리뿐만 아니라 타도에까지 그 기량을 인정받은 대목수로서,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며 혈혈단신으로 어디에도 속한 곳이 없이 방랑하며 자유롭게 일한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동네에서 낚시질을 하며 미스 마플처럼 사람들을 살피기도 한다. 농민도 아니면서 동학운동에도 가담했으며,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혹은 처지가 어렵게 된 사람들을 돌봐준다든가 하는 다양한 일을 한다. 가쓰라기처럼 차도남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마음이 훈훈해지고, 못 하는 것이 없어 든든한 모습이다.

그때부터 존경하는 건축가를 이야기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윤보 목수를 꺼내든다. 물론 그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고 가상의 인물이고, 건축가라고 하기에는 다소 직능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이 바로 짓는 일이고, 만드는 일이고,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이라는 견지에서 나는 그가 건축가, 그것도 훌륭한 건축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이 인간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건축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건축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적인 현란함이나 숙련도에서 나오는 미학적인 아름다움이나 혹은 부가가치 창출의 의미가 아니라 직업의 윤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건축가로서 가져야 할 직업의 윤리란 바로 사용자의 편의와 사용자와의 교감이 아닐까? 무엇보다 건축가의 눈은 사람을 바라봐야만 한다. 그것이 오랜 역사를 갖는 직능임에도 늘 오해가 가시지 않는 건축가라는 이름, 예술가와 건축업자가 혼성교배된 집 짓는 일의 안내자로서 건축가가 언제나 지켜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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