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7> 예(禮)와 경(敬)

관련이슈 세계일보 창간 21주년 특집

입력 : 2011-02-22 21:04:17 수정 : 2011-02-22 21:04:1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엄격함과 규범·존중과 배려의 대조… 禮와 敬의 서원건축 질서와 원칙을 지키는 예(禮)의 공간

얼마 전 누가 “안동에 있는 서원을 같이 둘러보자”고 해서, 차 뒷자리에 앉아 점심도 얻어먹으며 실로 편안하게 하루 여행을 다녀왔다. 밥 중에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고, 답사도 남이 주관해주고 운전해주는 답사가 제일 재미있다. 여행하러 다니건 회사에서 일을 하건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점심을 먹는 일인데, 점심(點心)이란 본래 배고픔을 요기하며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으로, 사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점심을 먹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부터였다고 한다.

하루에 두 끼를 먹던 것이 농사기술의 발달과 그 밖의 생활여건이 좋아지면서 세 끼로 늘어났고, 배부르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식들의 공부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여러 형태의 교육기관을 통해 사대부 계층이 생겨나 세력을 키우게 되고, 급기야 그들은 새로운 나라, 조선의 건국을 뒷받침하게 된다.

◇규범적이고 질서에 입각한 예의 건축, 병산서원.
서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으로서 교육의 기능뿐 아니라 선현에 대한 제사의 기능도 수행하던 곳이었다. 그중 퇴계 이황을 배향한 도산서원과 서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은 여러 측면에서 비교해 볼 만한 재미가 있다.

누구나 한국건축의 백미로 꼽는 아름다운 서원이 병산서원이다. 안동에서 하회마을 쪽으로 들어가다 꺾어지는 좁은 길을 털털거리며 들어가다 보면 강을 마주하며 운치 있게 자리 잡고 앉아있는 병산서원이 멋지게 등장한다.

병산서원은 유성룡의 제자 우복 정경세가 지은 곳으로, 풍광이 아름답고 개개의 건물과 전체의 구성, 그리고 주변에 대한 해석과 적절한 배치가 무척 뛰어나 아주 각광받는 전통 건축물이다.

심지어 입교당 마루에서 본 만대루의 일곱 폭 병풍 안에 가두어진 병산과 낙동강의 경관은 수많은 건축가가 닮고자 하는 모습으로 회자한다. 나는 그 유기적인 기능구성이나 용의주도한 공간처리 수법에 무릎을 치면서도, 그런 식으로 자연을 가둔 채 주변을 누르고 버티고 앉아 바깥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평소에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맹추위 속 해질녘에 찾아간 병산서원은 무척 냉랭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들어갈 때 처음 만나는 곳은 복례문(復禮門)이다. 병산서원을 지은 유성룡의 제자 정경세가 당대의 예학 대가였으니, 당연히 예로 돌아가는 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이리라.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사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질서가 곧 예(禮)이다. 공자는 인간의 최고 덕인 인을 ‘자기를 이겨서 예로 돌아오는 것(克己復禮)’이라고 하였다.

정경세는 관직으로 바쁜 유성룡의 몇 안 되는 제자였다. 유성룡은 영의정까지 오르며 늘 정계의 중심에 머물러 있었으니 제자를 키울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상주에 잠시 부임했을 때 그 동네에서 수재로 꼽히는 정경세를 만나 제자로 삼았고, 정경세는 그 인연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스승에 충성했을 터이다. 옳고 그름, 앞과 뒤, 많고 적음을 반듯하게 가리는 ‘예’는 위계가 철저한 병산서원의 건축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병산서원은 의관을 단정히 정제한 선비처럼 반듯하고 엄격하다.

◇도산서원. 내면에 충실하고자 했던 경(敬)에 입각한 건축.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던 정경세는 서인이자 또 다른 ‘예학의 일인자’인 사계 김장생과 더불어 한 시절을 풍미했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정경세가 둘째 딸의 배필을 찾다가 김장생에게 가서 당신의 문하에서 쓸 만한 자가 있느냐 물었다. 김장생은 저쪽 방에 가면 세 학생이 있으니 그중에서 골라보라고 했고, 그들은 바로 이후에 큰 학자와 정치가로 이름을 남긴 송시열·송준길·이유태였다.

정경세가 가보니, 셋 중에 이유태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절을 했고, 송시열은 그냥 한번 쓱 보고는 모른 척하고 읽던 책으로 눈길을 돌렸고, 송준길은 옷매무새를 고치며 간단히 인사를 했다. 그래서 정경세는 중간 수준의 예의를 지킨 송준길을 ‘간택’했다. 이후 송준길은 정계에 입문하여 원만하게 정무를 수행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를 오가며 소통을 할 수 있었고, 특히 송시열을 끌어주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는 역할을 했다 한다.

◇병산서원 만대루의 일곱 폭 병풍 안에 가두어진 병산과 낙동강의 경관은 건축가들이 닮고자 하는 모습으로 회자된다.
겸손하고 삼가는 자세로 임하는 경(敬)의 공간


조선시대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의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서원의 존재는 늘 논란거리였다. 영조 시절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했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는데, 고종 때 대원군은 아예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거두고, 도동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 등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57세 되던 해에 짓기 시작해 60세에 완성했다는 도산서당 일원에서 시작한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공부하는 공간과 제자를 가르치는 공간, 그리고 그 사이에 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서가공간과 부엌공간으로 이루어진 4.5칸이라는 애매모호한 크기의 집이며, 옥골선풍의 아주 단정하고 고귀한 풍모의 집이다.

또한 예전 천원권 지폐에 새겨졌던 한국 건축의 고전이다. 나는 늘 그 천원권을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건축을 이야기할 때, 특히 집을 이야기할 때 꺼내서 보여준다. 그리고 “집이란…” 하면서, 정신의 가치와 검소하고 경건한 건축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모델하우스 역할을 해주는 고마운 집이다.

이황은 ‘거경궁리(居敬窮理)’에 충실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항상 몸과 마음을 삼가며 바르게 가지는 일이며,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바른 지식을 얻는 일을 뜻한다. 즉 그는 진리에 이르기 위해 늘 겸손하고 삼가는 자세로 임하는 성실성을 가장 높은 덕목으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이황이 만들어놓은 공간은 작지만 겸손하고 조용하며 경건하다. 도산서당과 제자들의 기숙소인 농운정사, 역락서재의 배치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특히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비슷한 높이의 능선에 올라타고 있으면서도 앞뒤로 벌어져 있어, 거리와 위치는 가까우면서도 시선 상으로는 각자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다. 그럼으로써 공간들끼리 지나치게 억누르지 않고 조곤조곤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게 여느 서원 건축과는 다른 자유로운 공간적 융통성이 드러나는 도산서원은 마치 당시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아마도 이황의 학문에 대한 자세와 제자를 대하는 방식이 반영된, 이황이 추구한 경의 실체가 아닌가 싶다. 

◇정신의 가치와 검소하고 경건한 건축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지만 큰 공간, 이황의 도산서당. 뒤쪽으로 펼쳐진 도산서원은 맏제자인 조목의 작품이다.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 한다(內明者敬, 外斷者義).”

이황이 70세가 되는 해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은 숙의를 거듭한 끝에 도산서당 근처에 스승의 영혼을 모시는 사당과 스승의 유지를 이을 서원을 건립하기로 한다. 그때 책임을 맡은 사람이 이황의 맏제자인 월천 조목이다.

이황은 1501년생이고 조목은 1524년생이니 이황과는 20여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조목은 이후 이황의 좌측, 수제자 자리를 놓고 견주었던 학봉 김성일, 유성룡보다도 훨씬 연장자였다. 김성일과 유성룡은 각각 1538년생, 1542년생이었으므로 조목에게 깍듯하게 선배대접을 했다. 그는 평생을 스승의 곁에 머물렀기에 누구보다도 이황에 대해서는 많은 애증이 있었을 것이고, 도산서원을 설계하면서도 스승의 사상을 담기 위해 궁리했을 것이다. 삼가고 삼가며 진리를 깨닫고자 하던, 내면의 충실하고자 했던 경(敬)에 입각한 건축. 조목은 그런 스승의 생각을 옮겨놓기 위해 내면적으로는 엄격하나 겉으로 드러남에 있어서는 실질적이며 겸손한 태도를 건축에 불어넣었다.

도산서원은 앞에서 바라보면 그저 산 아래 좌우로 펼쳐진 건물들의 집합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면 산의 능선을 타고 층층이 배열해놓은 깊은 공간이 느껴진다. 서원의 기본을 이루는 강학공간과 부속공간들, 그리고 스승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공간 등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담으로 공간의 구획은 지어졌지만, 칼로 무를 썰 듯이 금을 그어 놓은 것이 아니라 슬쩍슬쩍 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교당 마루에 앉으면 호쾌한 경관보다는 아늑한 느낌이 먼저 들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간적인 두런거림이 들린다.

예와 경의 공간을 꿈꾸다

조목 또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월천서당’을 만들었다. 기록에는 이 서당이 1539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조목이 1524년생이니 그러면 15살 때 서당을 지었다는 것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대목이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조목이 15세 때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고 하니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월천서당은 조목이 스승을 위해 지은 도산서원의 건축문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손바닥만 한 동네에 땅을 오목하게 그러모아 집을 높게 앉혀서 제법 위압적이긴 한데 그렇다고 겁을 주지는 않는다. 껑충한 대문이 허리에 담을 끼고 서 있고, 그 안에는 한 채의 건물이 서 있고, 그게 전부다. 왜 저렇게 높이 쌓아올리고 담을 둘렀나 싶게 싱거운 구성인데, 건물의 한쪽에 스승 이황이 훤칠하게 써서 주었다는 ‘월천서당’이라는 현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조목은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봉화현감을 끝으로 학문에만 열중했다고 하는데, 정치적으로 북인에 속해 있어서 광해군의 몰락과 더불어 학맥이 끊어졌다.

◇책과 사람과 더불어 문화가 흐르는 곳, 진정한 예와 경으로 이루어진 현대적 서원의 풍경을 보여주는 길담서원 (출처:http://cafe.naver.com/gildam).
월천서당 앞에는 나이가 450살이라고 써 붙어 있는 은행나무가 있다. 그 나무를 올려다보며 오래되었다 감탄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더니, 그 앞에 앉아서 묵묵히 무언가를 모아서 묶던 동네 할아버지가 “그게 말이야 저 나무가 450년을 산 것이 아니라 그 자식으로 이어져서 450년이야…” 하면서 쥐어박았다. 사람의 인연은 끊어졌어도 나무는 이어졌구나…. 아직도 한참 더 배워야 하는구나….

우리 건축의 주된 관심은 땅과 사람, 땅과 건물,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소통 방식에 있다.

어떤 경우에는 어른과 아이처럼 엄격하고 규범적이고, 어떤 경우에는 위아래는 있지만 서로 귀 기울여주고 각자의 의사를 존중해준다. 병산서원이 전자의 방식이라면 도산서원은 바로 후자의 방식이다. 공간들은 각자 엄격한 자기의 역할이 있고 입장이 있지만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되 격리된 채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주고 지긋이 바라봐 준다.

밖에서는 높고 아득한 느낌이 들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한눈에 들어오도록 모든 공간이 단정하게 도열해 있는 ‘예’의 건축 병산서원과, 무척 깊게 들어가면서도 밖에서 볼 때 그런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 ‘경’의 건축 도산서원.

예로 만든 공간은 일방향의 소통구조를 가지고 있고, 경의 공간은 쌍방향의 소통구조를 가지고 있어 수용자의 자세에 반응을 하는 열린 구성을 보여준다. ‘경’은 내부를 지향하고, ‘예’는 외부를 지향한다. ‘예’와 ‘경’은 서원건축이 던져주는 복잡한 함수를 풀기 위한 두 개의 단서이자, 교육공간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지켜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본래 ‘교육(敎育)’이란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행위나 과정을 뜻하는데, ‘맹자(孟子)’의 ‘得天下英才而敎育之(천하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다)’란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교육이란 그런 배움을 얻고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시험문제를 빨리 잘 풀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며 마치 사다리를 타듯 남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내가 올라가기 위한 서바이벌 경기처럼 치부되고 있다. 교육 공간인 학교나 학원 또한 오로지 한 방향의 지식 전달을 위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고,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지 아득하기만 한 문제다.

인왕산 아래 통인동 골목 안쪽에 ‘길담서원’이라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다. 잘 팔리는 책보다는 좋은 책이 있고, 커피도 내려주고 작은 갤러리도 있고 어느 날은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공간이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자판만 두드리면 다음날 바로 집으로 책이 배달되는 세상이다 보니, 예전 동네 골목마다 있던 서점들은 다들 문을 닫거나 참고서와 문제집을 파는 가게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책을 펼쳐 책장을 넘기며 간택을 하는 과정은 책을 살 때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호사인데, 이곳은 우리에게 다시금 그런 소소한 행복을 느끼도록 이끌어준다.

특히 원서로 고전을 읽거나 철학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어,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철학 모임에서는 학생이 되기도 하는 등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어 따뜻하게 바라보고 교류하고 있다. 60∼70㎡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갓 스물이 된 예비대학생과 70대 노교수가 나란히 앉아 서로 존중하며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사람의 온기로 채워진 공간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준다.

서원지기인 박성준씨는 서원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작은 공간 하나를 그저 ‘열어놓은’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공간이든 나름의 힘, 나름의 숨결과 향기를 가지고 있다. 또 공간은 사람들을 보듬는 ‘품’이기도 하다. 그 품 안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공간의 힘, 숨결, 품은 어느 한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것이고, 그 공간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더불어 만들어가는 것이다.” 책과 사람과 더불어 문화가 흐르는 곳, 진정한 예와 경으로 이루어진 현대적 서원의 풍경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나연 '깜찍한 브이'
  • 나연 '깜찍한 브이'
  • 시그니처 지원 '깜찍하게'
  • 케플러 강예서 '시크한 매력'
  • 솔지 '아름다운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