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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6>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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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2-08 21:34:44 수정 : 2011-02-08 21: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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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아닌 외침만 있는 세상… 대화·타협이 진정한 소통 문화 부재의 문화특구

설 연휴 직전 막 사람들이 서울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하던 날, 동숭동 대학로에 연극 ‘대머리 여가수’를 보러 갔다. 오후 8시 공연이었는데 혹 길이 막혀 늦을까봐 열심히 달려갔더니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남는 시간 동안 빈틈없이 이런저런 업소들로 채워지는 ‘문화특구’ 대학로를 새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대학로는 중학교 때 통학을 하면서 버스로 매일 지나치던 곳이었다. 당시에는 ‘쎄느강’이라고 부르던 개천이 흐르고 중간 중간 다리가 놓여 있던 서울대학교가 있었다. 1975년 서울대 캠퍼스가 관악산으로 옮겨가면서 마로니에공원과 문예진흥원 및 전시·공연 관련 시설들이 하나씩 들어서고, 1985년부터 문화예술의 거리로 불리며 주말이나 휴일에는 차 없는 거리가 되기도 했다. 명동과 종로, 충무로 등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젊음’과 ‘문화’와 ‘예술’을 하나의 이름으로 그러모으자, 대학로는 출구를 못 찾던 혈기와 낭만들의 인위적인 해방구가 되었다.

한 차 가득 실려 온 ‘젊음’들은 밤늦도록 쏘다니며 신장개업을 알리는 사람 모양의 바람풍선처럼 이리저리 나부꼈다. 문화란 원래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인데 억지로 이름붙이고 박제해놓는 바람에, 마치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어항 속에 모두 갇혀 있는 듯 답답한 모양새였다.

오랜만에 찾아간 대학로는 여전히 뭔가 부자연스럽고 칠이 벗겨지기 시작한 철문처럼 가련해 보였다. 이제는 그때의 ‘광기’가 많이 수그러든 대신, 자본주의의 깃발들이 뾰족하게 나부끼고 있다. 마치 무당의 주술처럼 건물마다 가득한 글씨와 이상한 기호들이 저마다 무언가를 외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이상한, 소통이 되지 않는 문화가, 골재를 잔뜩 싣고 와서는 빈 땅에 대책 없이 부려놓듯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저들이 하고자 하는 말들은 무엇일까. 저 ‘문화’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인간의 말을 하지 않고 단말마의 비명들만 질러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비명들이 문화라고 떠받들어지고 있다.

간혹 문화란 것은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 내가 머릿속에 만들어놓은 관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홍익대학교 앞에 가서 ‘누가화방’이 없어졌고, ‘누나네’나 ‘우리마당’이 없어졌고 ‘흙과 두 남자’와 ‘일렉트로니카’, 길 변에 있던 고즈넉한 집들이 없어졌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회고 취미의 발동이 아닐까, 쓸쓸하게 혼자 규정해 보는 것이다.

그들을 밤새 상대해주느라 초췌해진 그 문화의 영토를, 한동안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푸석한 아침의 풍경 속을 뚫고 다니곤 했다. 마침 대학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설계사무실이 대학로 한가운데 위치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대학로를 건너다니며 보았던 연극 중에 ‘대머리 여가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배우 박정자씨가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음성으로 처연하게 허무맹랑한 대사를 읊조리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도 대학로에는 늘 이 연극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다시 보고 싶었으나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해 보려고 하면 끝나버리곤 하는 사이 이십 년이 휙 하고 지나가버렸다.

◇독일 국회의사당은 돔 구조로 된 관람석에서 일반인들이 언제든 의회의 진행을 관람할 수 있는 열린 구조다.
사회 속 개인들, 소통을 꿈꾸다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는 ‘부조리연극’이라는 장르를 창시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범상치 않은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1909∼1994)는 어느 날 어학용 레코드를 듣다가 언어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지 못함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이 인간끼리의 소통의 근원적 불가능성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고, 그것이 생의 불완전성으로 뻗어나가 만들어진 무척 뜬금없는 연극이 바로 ‘대머리 여가수’다. 1950년 관객 세 명이 앉아서 보았다는 초라한 첫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그나마 세 명 중 두 명은 이오네스코와 그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알베르 카뮈 등 문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점차 분위기는 반전되어, 1957년 이래 파리의 위셰트 소극장에서 계속 공연되고 있다.

내용은 단순하다. 영국에 사는 스미스 부부와 그들의 가정부, 마틴 부부와 소방관이 출연자의 전부이고, 줄거리 없이 그냥 단조롭고 반복적이며 무의미한 대사를 연발하다가 끝난다. ‘대머리 여가수’는 1963년 반도호텔에서 ‘민중극단’에 의해 한국 초연되었고, 이후 굉장히 오랫동안 사랑받는 레퍼토리가 되어 명동 ‘카페 테아트르’에서 장기 공연되었다.

이번에 본 공연은 안석환이라는 배우가 새롭게 각색과 연출, 출연까지 맡았다. 예전에 본 공연은 원전에 충실하면서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2011년 버전의 ‘대머리 여가수’는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심지어 촬영도 허가하는, 상당히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스미스씨는 서씨가 되었고, 셜록 홈스를 자처하는 가정부는 모델 같은 몸매의 섹시한 여인으로 변했고, 시작과 끝에 랩과 마임을 삽입해놓아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러다보니 원래 극의 주제였던 소통의 부재 혹은 언어의 비극성이 조금 약해진 감도 없지 않았으나, 그런 상황 또한 더욱 부조리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소통(疏通·communication)이란 사전적 의미로 막히지 않고 잘 통하거나,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고 소통하기 위해 말을 하고, 글을 쓰고,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고, 메신저를 클릭하곤 한다. 다만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생각이 전달되는 과정에서의 ‘간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주 완벽하게 서로 ‘뜻이 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현대사회라는 예측할 수 없는 밀림 속을 어렵게 헤쳐나가는 각각의 개인들 사이의 소통이란 더욱 어려운 문제다.

예전에 소통은 주로 가족이나 친구, 회사 동료 등 제한된 관계 사이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개인적 영역에서의 생활은 오히려 축소되고 직업이나 취미, 기타 등등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온·오프라인의 커뮤니티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 웹상에서 지인이나 새로운 인맥과 소통하고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비스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NS)이다. 빠른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정보공유까지 할 수 있어서 1인 미디어 혹은 1인 커뮤니티라고도 불린다.

얼마 전 구글(Google)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터넷 강자로 떠오른 페이스북(Facebook)의 젊은 창업자를 소재로 한 ‘소셜 네트워크’라는 영화를 보았다. 하버드에 다니는, 약간은 ‘왕따 스타일’의 유태계 젊은이가 우연한 기회에 인맥을 연결해주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만든다. 그것이 하버드에서 시작해서 동부의 몇 개 대학, 미국 전역,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박진감 있게 그리면서,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얻는 대신 현실세계에서의 친구를 잃게 되는 주인공의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려서 보여준 인상적인 영화였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메리칸 드림이랄지 그런 것이, 이 사이에 남아 있던 음식찌꺼기처럼 불현듯 잘게 씹혔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영국 의사당은 여당과 야당이 서로 마주 보도록 늘어서 있는 의석 배치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너무나 가까운, 너무나 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은 사실 우리에겐 전혀 새롭지 않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얼마 전까지 우리가 줄곧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았던 ‘싸이월드’가 있지 않은가. 20세기 말인 1999년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러브스쿨’이나 싸이월드라는 소셜 네트워크가 있었다. 특히 ‘싸이’에는 아이들부터 중장년층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인원이 가입했고 엄청난 개개인의 정보가 쌓이고, 인맥이 다져졌다.

동창을 찾아주는 ‘아이러브스쿨’은 2000년에 해마다 가장 큰 사회·경제적 이슈를 알려주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하는 10대 히트상품 중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싸이월드의 경우 시작은 미미했으나 미니홈페이지와 도토리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2004년에 1위로 선정되었다. 2010년에도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가 4위였고, 이러한 소통수단들의 집합체인 스마트폰이 1위였다.

많은 뉴스가 소셜 네트워크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재생산된다. 뉴스보다 먼저 외국의 천재지변이나 사건사고 소식이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간다. 이것은 세기를 구분하는 하나의 사건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일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시작은 우리가 먼저였을지 몰라도 그건 큰 의미가 없다. 이제는 그 초강력적인, 전 지구적인 매체 안에서 사람들은 부지런한 일개미처럼 분주하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저마다 이야기를 해댄다. 내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 또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연결된다.

거의 24시간 사람들은 그 세계 안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I am at…” 하며 지금 있는 곳을 알려주고, 먹은 음식과 방금 본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게시하는 등등 온갖 일상을 전한다. 모두 소리 내어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 듣고 있을 누군가를 의식하며 입 대신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그래서 이제 오감 중 시각이 지배하던 시대에 촉각이 개입하기 시작했다던가…. 어쨌든 그 안에 있자면 뭔가, 안정되어 있다기보다는 넓은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섬 같다는 느낌이 든다.

대화를 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건 대화가 아닌 외침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 사람의 말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표정, 손짓, 몸의 움직임을 통해 그 의미를 읽는다. “힘들어 죽겠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일종의 엄살인지, 정말 죽고 싶다는 이야기인지 여섯 음절의 단어만으론 알 수 없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대화는, 사실은 대화가 아니라 그저 옹알이 수준의 독백일 뿐이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배가 고파지는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고독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실생활에서의 대화란 말하다 말고 갑자기 일어나 나갈 수 없다. 실생활에서의 관계 또한 한순간에 칼같이 자를 수 없다.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상에서는 한마디 던져놓은 말에 대해 수백 명이 답하기도 하고, 아무도 답하지 않기도 하는데, 결국은 둘 다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애틋한데 상대방도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어제까지 깊은 대화를 하며 마음을 나누었다 생각한 친구(일촌 혹은 관심일촌, 서로이웃 혹은 팔로어 등등)가 갑자기 말없이 사라진다. 물어볼 데도 항의할 틈도 없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의 네티즌 리뷰 중 인상 깊었던 한 구절이 있다. “진정한 네트워크를 원한다면 컴퓨터를 끄고 신발을 신어라.”

소통 부재의 소통 공간

얼마 전 관청에서 회의를 하러 관련 업무의 책임자와 담당자가 모두 모였다. 회의실도 넓고 테이블도 큰데 의자까지 너무 큰 게 문제였다. 책임자 몇 사람이 둘러앉으니 자리가 없어서, 담당자들은 벽에 늘어선 간이의자에 배석했다. 간단한 인사와 덕담을 나눌 때까지는 좋았는데 실무 협의에 들어가자니 뒷자리의 담당자들이 뒤통수에 대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반대로 서너 사람이 회의를 하기엔 너무 큰 회의실에 모여 마이크를 켜야 할 때도 있었다. 소통을 위한 자리인데 정작 소통이 어려웠다.

1295년 웨스트민스터 궁전 안에서 ‘모범의회’가 열리면서부터 의회정치가 일찌감치 발달한 영국의 의사당은, 옆 사람과 무릎을 나란히 하며 앉아야 하는 긴 의자들이 여당과 야당이 서로 마주보도록 늘어서 있는 의석 배치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그리고 거기엔 상원, 하원 모두 붉은 색의 스워드 라인(Sword Line)이라는 것이 있다. 옛날 영국의 의원들은 기사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면 자칫 칼부림이 나곤 해서, 아무리 긴 칼로도 상대방을 찌를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도록 선을 만든 것이다.

스워드 라인 가운데 있는 단상에서 양당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각자의 주장을 펼치며 토론을 한다. 만일 말로든 몸으로든 ‘선’을 넘어 의장으로부터 3번 이상의 경고를 받으면 국회 출석을 제한받고, 의원들의 의결에 의해서만 다시 출석이 가능해진다.

독일 국회의사당은 돔 구조로 된 관람석에서 일반인들이 신청만 하면 언제든 의회의 진행을 관람할 수 있다. 그야말로 열린 구조로 되어 있으니 의원들끼리의 밀실 담합뿐만 아니라 몸싸움이나 폭행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구조의 공간이다.

유럽의 의사당이 대화와 타협 즉, 정치가 있는 장소라면, 우리의 의사당은 외침과 주장만 있는, 정작 정치는 없는 장소이다. 공간은 뚜렷한 구배로 각자 한 방향으로만 쏠려 있고, 의원 개개인에게는 넓고 편리한 자리일지 몰라도 대화나 소통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구조다. 서로 얼굴을 대하면서도 아무런 소통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가상의 웹 공간보다 훨씬 더 고독하고 공허한 공간이다. 내 주장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남의 주장도 들어주고 대화할 준비가 될 때,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정치가 시작된다. 국민과 국회가, 국회 안에서 여야가, 서로 “막히지 않고 잘 통하거나,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기” 위해서는, 저 소통 부재의 공간부터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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