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2> 근대의 풍경

관련이슈 세계일보 창간 21주년 특집

입력 : 2010-12-10 10:20:27 수정 : 2010-12-10 10:20:2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껍질만 흉내낸 혼합되고 절충되고 왜곡된 슬픈 역사의 상흔 1936년 영화 ‘미몽’에서 평범한 가정주부 애순은 백화점에서 쇼핑하다 지갑을 잃어버린다. 그것을 찾아준 낯선 청년은 사실은 좀도둑이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사례로 함께 맥주를 마시고 집에 돌아온다. 애순은 좀 더 살림에 관심을 두라는 남편과 다툰 뒤 급기야 딸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출한다. 애인과 호텔을 전전하다 헤어지고 이번엔 남자 무용수에게 반해 따라다니다, 결국은 죄책감 속에서 자살로 마감한다. 이 영화는 당시 ‘삼천만의 연인’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해방 후 월북하여 굴곡진 생애를 살다가 ‘인민배우’로 삶을 마감한 전설의 배우 문예봉이 나온다.-그녀는 지금 봐도 정말 아름답다-‘미몽’은 지금 남아 있는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인데, 고맙게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복원해 배급하고 있어 쉽게 볼 수 있다.

한옥이 즐비한 거리에 언뜻 보이는 포드 자동차 전시장, 호텔과 백화점의 일상적 풍경과 분방한 부인의 언행, 한복 차림의 관객들이 관람하는 공연에 나오는 반라의 무용수들…. 대체 1930년대의 서울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소위 ‘차도녀’가 되어 도시를 가로지르는 애순의 모습은 자신(自身)을 찾기 위해, 혹은 자신을 찾는 바람에 집을 나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하는 근대적 자아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1936년 영화 ‘미몽’. 현존하는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근대적 자아에 눈뜨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개인이 자아에 눈을 뜨는 그런 시간을 우리는 ‘근대(modern, 近代)’라 부른다. 근대는 삶의 주체로서의 ‘나’를 세우는 시대이다. ‘나’라는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부각되는 것은 유럽의 르네상스나 종교개혁(15∼16세기), 혹은 자본주의 형성과 시민사회의 성립(17∼18세기)의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 무렵 과학기술에 근거한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원칙이 세워지고, 새로운 사회세력인 ‘시민’ 혹은 ‘계급’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근대는 흔히 과거의 역사와 대립되는 시기로 설명된다.

본래 ‘modern’은 ‘바로 지금’이란 뜻의 라틴어 ‘modo’에서 나왔다. 결국 근대는 동시대, 당대를 뜻한다. 그러한 의미 때문에 근대는 종종 ‘현대(現代)’와의 특별한 구별 없이 혼용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에게 근대는 무엇인가? 깃발을 단 범선들이 우리의 항구를 강제로 열던 개항의 시기일까, 매혹적인 선진문물의 향기에 젖어들던 일제강점기부터일까, 아니면 해방 이후 혹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손으로 다시 현대성을 갈구하던 그때일까.

“…미래로달아나서과거를본다, 과거로달아나서미래를보는가, 미래로달아나는것은과거로달아나는것과동일한것도아니고미래로달아나는것이과거로달아나는것이다. 확대하는우주를우려하는자여, 과거에살으라, 광선보다도빠르게미래로달아나라.”(이상, 線에關한覺書 5 중에서, ‘조선과건축’ 1931.10 발표, 원문은 日文)

◇1901년 세워진 궁궐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며, 1907년 고종이 이준 등 헤이그 밀사에게 밀지를 전달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근대’가 아니라 단지 근대라는 이미지와 시간성에만 접속되었다. 조선 말, 봉건적 착취와 신분 질서의 철폐를 기치로 매달고 나온 동학은 실패한다. 그리고 개화파의 불장난도 쉽게 꺼져버린다. 그리고는 반봉건과 개화운동은 동력을 상실하고 엔진이 멎어버린다. 그때 외세에 의한 강요된 근대가 찾아온 것이다.

우리 손으로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타의에 의해 펼쳐진 근대의 공간이란 단지 ‘모던 보이’로서의 생활만을 누리는 공간일 뿐이었다. 지식인들 대다수는 ‘근대’라는 포장지를 덮어씌우는 일제에 대한 대항의 논리를 더 이상 찾지 못하고 일제에 협력하였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여겨졌다.

우리에게 진정한 근대는 없었던 셈이다. 혹은 있다손 치더라고 남들이 강제로 입을 벌려서 떠먹이는 음식물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드라마에서 철딱서니 없는 서방님이 도시로 떠났다 돌아올 때 데리고 들어오는 둘째 부인같이 눈이 쪽 째진 무서운 얼굴과 표독한 성격을 지닌 ‘혼란’이 근대라는 이름으로 옆방에서 소란스럽게 서성이고 있었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근대의 그늘’(당대, 2000)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치·경제 질서, 냉전과 분단으로 연결된 지난 100여년의 역사는 국가권력이나, 개화=근대화=서구화의 등식을 받아들인 지배 엘리트들이나 지식인들이 ‘전통’을 위로부터 제거한 과정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고 말한다. 봉건시대의 일본과 달리 우리는 통치자가 백성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체제가 이어져 왔고, 이러한 체제 하에서는 백성들, 특히 지식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대개 기회주의적으로 되거나 극단적 투쟁을 앞세우는 것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인직·최남선·이광수에 이르는 초기의 신문학에서도 근대성은 전통을 부정하고 일종의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식민주의를 옹호하다가 차츰 내면화되고 개인화되며, 심지어 퇴폐적 국면으로 전개된다. 임화 같은 이는 그런 경향을 ‘부르주아적 근대성’이라 비판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근대의 진정성을 고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일본에 침탈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근대’에게 당한 것이다.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호환, 마마가 아니라 우리의 뼛속 깊숙이 숨어 들어 있는 근대의 공포이다. 그래서 이상(李箱)은 근대가 무서워 굴 속 같은 깊은 방에 숨어서 보고 있었고, 김수영은 겁도 없이 맞서서 싸우다가 처참하게 깨어지고, 이성복은 피하지도 맞닥뜨리지도 않으며 그냥 옆으로 비켜서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1990년대 시인들 함민복, 함성호 같은 이들은 스스로 그 대상이 되어 모습을 감춘 채 산다. 그것은 혹 유효하지 않은 근대에 대한 공포와 경계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의 ‘모더니즘’은 대략 저런 경로를 거쳐서 형성된다. 아니 아직도 형성되지 못한 채 그냥 슬그머니 현대로 넘어와 버렸다. 마치 아이가 청소년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어른이 되는 것처럼…. 어른의 몸을 가졌으되 성장하지 못한 자아와 파편화된 지식을 담은 채 누군가가 이끌어주는 대로 쉽게 휩쓸려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런 성찰 없는 근대가 남긴 상흔이다.

◇서울 정동의 옛 러시아공사관. 아관파천 때 고종이 머물렀던 곳이나 건물은 사라지고 자취만 남았다.
서울 중구 정동은 도시 속의 섬과 같은 동네이다. 그 바깥을 둘러 따라가면 남쪽 서소문으로는 늘 자동차로 가득 채워져 꽉 막히는 고가도로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시청과 세종로에 면해서 여러 가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큰 흐름이 지나간다. 북쪽은 예전에는 크고 작은 음반점, 서점, 제과점들로 가득했으나 지금은 굵은 말뚝 같은 오피스 빌딩들이 시립하고 있다. 오밀조밀한 골목이 있던 언덕은 망치를 든 사내의 조각품이 상징하는 자본의 논리에 휘둘려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내부는 마치 방금 꺼내놓은 호빵처럼 달고 보들보들한 팥고물들이 가득하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뚜렷한 시간의 단층들이다. 물론 지금도 그리 붐비지는 않지만, 예전의 정동은 훨씬 한적했다. 대법원, 미국대사관저 등 무척 고압적이고 경비인원이 많이 필요한 건물들이 즐비한 데다, 학교나 종교시설 등이 많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왠지 엄청나게 눈치가 보이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면 꼭, 어디 수도원의 회랑을 걷는 것처럼 발자국을 세면서 천천히, 단정히, 그리고 정숙하게 걷곤 한다.

오래전에 정동에 들어갔다가 정동교회 맞은편으로 향했다. 지금의 정동극장 있는 자리에 있었던 뜬금없는 테니스코트와 작은 분식점 사이의 짧은 골목이 끝나는 곳에 하얀 2층짜리, 시대와 양식을 추정하기 힘든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던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안내판이 알려주었다. 그 건물은 대한제국 때인 1901년에 만든 궁월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이었다. 중명전은 본래 덕수궁 영역 안에 있었던 궁궐의 일부였으나 도로가 생기며 밖으로 쫓겨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며, 1904년 덕수궁이 불탔을 때 고종이 편전과 외국사절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며, 1907년 고종이 이준 등 헤이그 밀사에게 밀지를 전달한 곳이기도 하다. 주변에 즐비한 외국 공관 건물의 화려함을 생각하면, 그런 중대한 역사를 담은 곳이라 보기엔 너무나 작고 초라한 건물이었다. 개인 소유로 넘어가 오랫동안 임대 사무실이 그득한 곳이었으나, 얼마 전 복원되어 고종과 대한제국 시대를 기억하는 전시관이 되었다.

정동에는 그런 근대의 자국들이 가득했다. 정동교회는 1897년에 고딕식으로 건립된 최초의 감리교 교회이고, 배재학당은 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이고, 러시아 공사관은 1890년에 건립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고,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은 1928년 경성재판소 건물이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흔적들, 그 낭만들은 모두 슬픈 역사의 무성한 그림자들이다. 궁궐 건축과 서양식 학교, 외국의 공관들이 즐비한 정동의 풍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강제 주입된 근대라는 시간의 박물관이다.

◇1897년에 고딕식으로 건립된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정동교회.
정치적으로 근대는 귀족이나 종교와 같은 권위적 사회 조직이 나누어 가지고 있던 권력을 국가라는 정치체제가 독점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그동안 인간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전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이 그렇고 ‘신의 죽음’을 외치는 근대의 철학이 그렇다.

오랫동안 구속되었던 이념들을 전복시킨 건 건축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르뷔제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벽으로부터 건축물을 독립시켰고 중심이 없는 공간과 장식이 없는 입면을 꿈꾸었다. 근대의 열망을 품은 건축가들은 비참하고 불안한 생활을 영위하던 민중을 위한 새로운 미학을 추구했다. 그들은 아무나 값싸게 즐길 수 있고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이 가능한, 쓸데없는 장식을 배제한, 새롭고 신선한 건축이 가능하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새로운 건축은 이념과 도덕성을 상실한 채 새로운 사업이 되었다.

한국의 근대건축은 당시 사람들이 추구했던 어떤 새로운 가치의 반영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형상과 구법으로 지어졌던 건축물들의 이름으로만 생각되기 일쑤다. 거기에는 껍질만 흉내 낸 혼합되고 절충되고 왜곡된 근대가 숨어 있다. 어떤 애달픈 마음도 없는, 가면같이 무표정한 양식의 전시장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보전 가치가 높은 유물이나 유적 혹은 관광상품으로 박제되어 정동 한복판, 종로 뒷골목 같은 모던 보이들이 거닐던 도시의 흔적 위에 처연하게 서 있다.

그렇게 모호한 근대의 환상을 뒤로하고, 이제 개인화되고 탈중심화 되고 불확정성이 대세라는 ‘탈근대’의 시대라고들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며 새로운 건축을 막연히 동경하지도 않는다. 실시간으로 속속 인터넷에 올라오는 최신의 ‘인터내셔널’한 경향을 손쉽게 따라잡고, 심지어 영리한 근대건축의 후계자 렘 콜하스나 독점적 브랜드가 된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 같은, 이른바 월드 스타 건축가들을 거리에서 쉽게 마주치기도 한다. 그 한복판에 나는 멍 하니 선 채로 거리와 시간의 한계를 끝없이 압축해오는 속도의 세례를 받으며 서 있다.

당대의 정신을 고민하고 자아를 반영하지 않는 ‘modern’은 영원히 ‘modern’이 아니다. 근대나 탈근대니 하는 한때 치열했던 논쟁들이 먼지 쌓인 앨범 속 흑백사진처럼 낡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지금, 그것이 근대의 풍경을 다시 생각하는 이유다. 오래전 영화 속에서 홀연히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했던 그 배우처럼, ‘진정한 나’를 고민하는 그때가 바로 나의 근대이다. 근대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아침과 같다.

캄캄한공기를마시면폐에해롭다. 폐벽에끌음이앉는다. 밤새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폐에도아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습관이도로와있다. 다만치사(侈奢)한책이여러장찢겼다. 초췌한결론위에아침햇살이자세히적힌다. 영원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이상, ‘아침’)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나연 '깜찍한 브이'
  • 나연 '깜찍한 브이'
  • 시그니처 지원 '깜찍하게'
  • 케플러 강예서 '시크한 매력'
  • 솔지 '아름다운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