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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55> ‘우리 말을 사랑하는 발칸 전문 신화학자’ 유재원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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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7-12 22:04:05 수정 : 2010-07-12 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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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 말로 학문해야 진정한 강대국”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는 발칸 지역 연구 권위자다. 기자로서 유 교수와 만남은 2004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일보가 국립국어원 등과 함께 장기 시리즈 ‘우리말 바르게’를 연재하던 때였다. 세계일보는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남기심 국립국어원 원장과 유 교수의 대담 자리를 가졌다. 유 교수를 남 원장의 대담자로 초청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발칸 지역 연구 권위자이지만 유 교수는 국어학의 최후 보루인 국립국어원이 인정할 만큼 우리글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각별하게 드러냈다. 당시 50대 중반의 유 교수는 “앞으로 10년 동안 무엇을 먹고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한국어가 어떻게 가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학·과학·미술하는 사람들이 각자 생각하는 것을 풀어서 종합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을 방안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한글 관련 시민단체나 한국어 전문가보다도 더 강렬하게 우리말에 애정을 드러냈던 기억이 선명하다. 6년 만에 만난 그는 이제 60세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국어에 대한 간절함은 더 절실해 보였다. 그만큼 우리 글과 말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신화는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데 기여하지만, 우리말은 우리의 사상을 온전히 전하는 가치 있는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남제현 기자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더 어려운 세상


여름방학인 요즘 유 교수는 한국외대 용인 캠퍼스 대신 서울 종로구의 한 연구실을 자주 찾는다. 그는 이곳에서 다른 연구자와 함께 한국어 문장 자동 완성 검색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인터넷 등 디지털 검색 과정에 우리말의 육하원칙을 자동으로 추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어요. 가령 ‘서울 청계천 근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를 넣으면 다른 구성 요소인 주어와 시간 등이 검색될 수 있도록 개발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디지털 소프트웨어 개발인 셈이다. 그의 설명은 들었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 교수는 이미 15년 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한글 맞춤법을 개발한 경험이 있다. 컴퓨터 문자 생활이 가능하도록 학자로서 의무감을 갖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그러나 ‘한국 학자’로서 다국적기업에 더 큰 이익을 줄 수 없어 스스로 개발 현장에서 물러났다. 전산 언어학에 심취해 ‘한국어 맞춤법 검색기’를 비롯한 여러 한국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던 유 교수는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더 힘들어진 세상”이라며 “한국 땅에서 영어가 한국인을 차별하는 황당한 세상이 돼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한국 학자라면 그 학문적 성과를 한국인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지금은 학문적 성과를 고스란히 영어권 국가와 그 주민들에게 가져다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성의 집단이라는 대학은 물론, 그 지성의 최고 표현 수단인 국내 학술지의 논문마저도 영어를 원하고 있어요. 한 세대 뒤에 진정으로 한국인의 생각과 사상을 담은 한국어로 된 논문이 나올까요? 국제화와 세계화를 평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어화 수준’을 평가하는 것으로 왜곡되고 있는데, 학문조차 그런 과정에 들어서 있으니 참….”

그는 “그렇지 않아도 안 읽는 논문을 영어만 사용해 쓰라니 말이 안 된다”며 “장기적으로 이 땅에 국어로 된 학문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괜한 기우가 아니라고 했다.

#“한국 학자는 한국 독자에게 도움 줘야”

유 교수가 강조한 내용을 옮겨 보면 이렇다.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자기 나라 말로 학문하고 사상을 설명할 수 있는 나라가 진정한 강대국이라는 점이다. 가령 20세기 이전 자기 나라 말로 학문을 하고 철학을 했던 독일과 프랑스는 지금도 강대국이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떤가. 명저 ‘발견자들’을 저술하고 2004년 세상을 뜬 미국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영국 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라틴어로 글을 쓸 능력이 되지 않아 영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베이컨은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알리기 위해 학회를 만들었다. 매개어는 베이컨의 모국어인 영어였다. 15세기 이후 각국에 개별 언어가 정착하면서 라틴어는 지식인만이 쓰는 말이 됐다. 설명을 이어가던 유 교수의 ‘역사의 가정법’과 교육 당국을 향한 제안이 머리를 쳤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유(大儒)들이 한자가 아닌 우리 한글로 학문하고 글을 남겼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됐을까요. 당시의 백성과 한문으로 쓰인 이들 대학자의 글에는 언어장벽이 있었어요. 일반인 입장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거의 모든 학자에게 영어로 된 논문을 요구해요. 오히려 해당 분야에서 인정받는 원로학자에게는 영어 논문을 쓰라고 하기 이전에, 좋은 논문을 쓰는 소장학자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소장학자들이 글을 국제학술지에 게재하게 해야 해요. 교육과학기술부나 연구재단이 가야 할 길이지요.”

한국 학자라면 한국과 한국의 일반인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드러난 책이 지난 4월 2권으로 간행된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이다. 신간은 그리스 전문가인 유 교수의 관심 영역이 터키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20대에 처음 터키를 살펴본 이후 34년간 발로 걷고 경험하며 얻은 책이다. 그리스 전문가로서 유 교수가 터키를 살펴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와 터키는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다. 역사는 상대편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신조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는 그리스 유학시절 간헐적으로 터키를 찾았다.

“참고 자료는 영어 원전이 70% 정도였고, 그리스어 등 기타 자료는 30%에 이르고, 우리말 자료는 0.1%도 안 됩니다. 앞으로 터키를 살펴보려는 이들은 ‘유재원의 터키 책’만 읽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어요. 색인 만드는 데만 두 달을 투자했어요. 터키 관련 ‘우리말 찾아보기’ 표기가 처음이어서일 것입니다. 영어로 썼다면 국내 독자는 별로 찾아보지도 않고, 터키학 지식도 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독자를 생각하며 우리말로 하나하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중과 함께하는 언어·신화학자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답게 우리 말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드러내고, 터키학에 대한 관심도 많지만 그에게 정체성을 물었다. “언어학자, 그리스 발칸 전문 학자, 터키 전문가 등으로 정체성이 너무 폭넓다”고 하자 유 교수가 웃는다. 그래서 이를 포괄하는 문구를 생각해냈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발칸 전문 신화학자’.

유 교수에게는 올해 목표가 있다. 한글 날(10월9일)에 학술행사를 열 계획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정치인과 언론인을 포함한 사회 각계 인사에게 미리 질의서를 보낸 것을 토대로 ‘우리말 바로 세우기 방안’을 찾아볼 생각이다. 한국어 사랑에 남다른 그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하지만 그는 당장 17일부터 열흘 일정으로 이탈리아를 찾아야 한다. 일반인과 함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또 다른 본고장인 이탈리아의 11개 도시를 탐방하기 때문이다. 참 욕심 많은 학자다. 그가 내놓을 또 다른 결과물이 기다려진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 유재원 교수는…

한국외국어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 그리스 아테네대학교에서 논문 ‘그리스어의 시제 일치 현상’으로 언어학 박사 학위 취득. ‘순 우리말 역순 사전’을 편찬하고, 소프트웨어 ‘한국어 맞춤법 검색기’를 개발했다. ‘한국-그리스 친선 협회’ 회장과 ‘한국 카잔차키스 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언어학자이면서 신화학자, 그리스 발칸 전문가이면서 터키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엘리트와 지식인 집단의 자각과 함께 교육 당국이 영어 매몰주의를 극복해야 우리말로 된 학문을 가능하게 한다고 여긴다.

■ 저서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 ‘그리스 신화의 세계’, ‘신화로 읽는 영화, 영화로 읽는 신화’, ‘그리스: 유재원 교수의 그리스, 그리스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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