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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이사람] 풍납토성 전문가 신희권 문화재청 학예연구관

입력 : 2010-06-22 22:52:14 수정 : 2010-06-22 22: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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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왕국’ 한성백제… 우리 곁으로 이끌어내다 “풍납토성은 백제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요. 서기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의 3만 대군은 백제 왕성(王城)인 위례성을 7일 동안 밤낮으로 공격해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한성백제는 그 후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지요. 그러나 15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 후손 앞에 위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초기 백제의 화려한 왕성이 드러남에 따라 서울의 역사는 단순히 조선시대 500년이 아닌 20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세계적 고도(古都)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이지요.”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신희권(41) 학예연구관은 ‘삼국사기’ 등의 기록으로는 존재했지만 지금까지 후손들이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한성백제의 역사를 풍납토성을 통해 증명한 젊은 고고학자다. 

◇풍납토성 전문가인 신희권 박사는 “풍납토성은 우리 역사에서 잊힌 1500여 년 전 초기 백제인의 삶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만큼 풍납토성을 어떻게 발굴· 보전하고 후세들에게 계승하는 지가 우리 고고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이종덕 기자
서울대 고고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당시 문화재연구소 문화재연구사로 특채된 그는 유적조사연구실에 근무하면서 발굴조사단의 일원으로 1997년 초기 백제시대의 유물신고가 접수된 서울 송파구 풍납 1· 2동 유물 발굴현장에 투입되면서 풍납토성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 후 수년간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각종 풍납토성 보고서와 학술대회 발표를 통해 그동안 수많은 학자가 찾아 헤매던 백제의 첫 왕성인 위례성이 풍납토성이라는 가설을 정설로 이끌어 냈다. 지금도 14년째 풍납토성 발굴과 연구에 매달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풍납토성 전문가다.

지난 16일 국회 업무 차 상경한 그를 만났다. 고고학자 하면 으레 떠올릴 수 있는 나이가 지긋한 학자풍과는 거리가 먼 젊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가 왜 외모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고학자가 됐는지 궁금했다.

“고 3 때 두 가지 진로를 생각했어요. 큰 돈을 버는 사업가가 되든가 아니면 미스터리한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입 때 경영학과와 고고학을 지망했는데 경영학과에 떨어지고 고고학과에 붙었어요. 이때부터 이 길을 운명으로 여기고 고고학에 매진했고 이 후 한 우물을 파다 풍납토성을 만나게 됐습니다.”

풍납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제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백제는 천도과정에 근거해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로 구분한다. 한성백제는 백제가 건국된 때부터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인 BC 18년부터 AD 475년까지를 말한다. AD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략해 도읍지인 위례성을 불태우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이후 백제는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한다. ‘한성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하던 시기를 말한다. 700년 가까운 백제의 역사 중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정했던 시기는 185년에 불과하다. 백제 초기 5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한성백제는 상대적으로 후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잊혀져 있었다. 이후 지금까지 한성백제의 수도인 위례성이 어디인지를 놓고 학자들간 논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그는 지금도 풍납토성을 처음 접하게 된 1997년 1월4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임이 확실하다’는 신념으로 풍납동 현대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실측작업을 벌이던 역사학자 이형구 교수(선문대 명예교수)팀은 현장에 백제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채 나뒹구는 것을 발견, 그가 속한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신고해왔다.

“현장에서 4m 정도 터파기를 하자 수막새 등 기와와 전돌(일종의 보도블록), 토기 등 수천점이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왔어요. 1500년 전 백제인의 삶의 흔적들이 한눈에 들어오자 희열감마저 들었어요.” 유물이 발굴되면서 아파트 공사는 중단됐고 현장 발굴작업이 그해 11월까지 계속됐다. 이때까지도 백제의 이른 시기와는 관련은 있지만 이곳이 한성백제의 도읍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나오지 않아 추가발굴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재산상 피해를 우려한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아 발굴작업은 중단됐다. 그러나 2년이 흐른 후 ‘더 이상 발굴을 미룰 수 없다’는 그를 비롯한 학자들의 건의로 마침내 발굴작업은 재개됐다. 그 결과 1999년 6월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성과를 얻게 된다. 

◇풍납토성은 궁전·제사시설·거주지역· 도로·성문 등을 갖춘 고대국가 한성백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학계에서는 현장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미뤄 풍납토성은 AD200년경에 연인원 100만 명이 동원돼 쌓은 도성으로 추정한다.
당시 발굴팀은 성벽 중 일부가 남아 있는 동쪽 성벽 두 군데를 10m 간격으로 골라 잘랐다. 성벽을 잘라보니 맨 아래쪽 폭이 무려 40m, 높이만 9m에 달했다. 특히 절개한 성벽 단면은 단순히 흙만 쏟아부은 게 아니라 아래층에는 두꺼운 펄 층을 깐 다음 10㎝ 정도 간격으로 흙을 다져 한쪽 한쪽 쌓아올린 판축토성임이 확인됐다. “성벽 폭이 40m가 넘고 길이가 3.5㎞에 달하는데다 공법상 막대한 노동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는 판축((版築)기법임을 미뤄 볼 때 연인원 100만 명이 동원된 고대국가의 도성이며, 상당한 경제적인 집중도를 지닌 한성백제의 도읍임을 확신하게 됐지요.”

그러나 발굴과 확인작업을 진행할수록 현장에서 나온 각종 유물의 실체와 쓰임을 제대로 알 수 없는 등 학자로서 한계를 절감했다. 이후 그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2004년 중국 사회과학연구원 고고연구소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의 도성을 연구하면 백제의 도성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3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후 그는 현장에서 석조건물지, 제사 구덩이, 포장도로, 벽체 건물지 등을 면밀히 조사하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풍납토성 도성 구조의 미스터리를 하나 둘 씩 풀어가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 현재도 풍납토성은 그가 속한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그간 발굴한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분산 보관중이다.

그는 “한성백제의 실체를 밝히려는 학자들의 노력과 행정당국의 지원이 보태져 내년 말에는 서울시가 그간 출토된 한성백제 시대 유물을 전시하는 ‘한성백제박물관’을 개관하는 만큼 조만간 초기 백제인들이 생생한 모습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다”고 소개했다. 이렇게 되면 백제를 자신들의 원류라고 생각하는 일본인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는 등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는데다 수도 서울이 2000년 역사를 지닌 고도임을 알릴 수 있어 민족적 자긍심도 높일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풍납토성 발굴은 그간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게 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닐 수 밖에 없다”는 그는 “ 앞으로 풍납토성 발굴과 보전, 한성백제 재조명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가 한국 고고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신 연구관은 “풍납토성은 백제의 왕성 터이면서 풍납1.2동 8000세대 4만 명의 삶의 터전인 만큼 이들의 재산적인 피해도 고려하고 문화재도 발굴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중요하다”며 “주민들이 문화재 때문에 못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들이 이해할 만한 합리적인 해법이 나와야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40대인 만큼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그는 “현장 발굴 경험과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문화재 전문 행정가의 길을 걷고 싶다”는 꿈도 내비쳤다.

박태해 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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