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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0> 명품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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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6-01 23:26:43 수정 : 2010-06-01 23: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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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세월이 켜켜이… 서울 그 자체가 ‘名品’인데
파고, 덮고, 찢어놓다니…
# 마스터피스, 모두가 사랑하는 이름

명품(名品), 명작(名作), 또는 마스터피스(Masterpiece)는 ‘아주 뛰어나거나, 널리 알려진 물건, 예술 작품’을 말하거나 혹은 ‘호화 상품(豪華商品; Luxury Goods)의 관용적 표현’이라고 한다. 가령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열 배나 비싼 최고의 명품(Masterpiece)이다. 300여년 전의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이 바이올린은 현재 600여 개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동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바이올린들이 다 낡아 없어졌음에도 오히려 나날이 더 좋은 소리를 내어 모든 연주자들이 연주하고 싶어하는 명품 악기의 대명사다.

◇300년이 넘었으나 점점 더 좋은 소리를 낸다는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
그러나 우리가 무척 ‘밝히는’ 명품이란 마스터피스가 아니라 럭셔리에 가깝다. 단도직입적으로 누리끼리하고 펑퍼짐한(미안하게도 기저귀 가방으로 쓰면 딱 좋을 모양을 갖춘) 루이뷔통 가방을 가리키거나, 또는 ‘프라다’라든가 ‘에르메스’, ‘샤넬’, ‘페라가모’…등의 생경한 이름들, 마치 열심히 외우다가 4호선 이후에는 더 이상 외워지지 않는 지하철 정거장 이름처럼 끝없이 생겨나서 현기증이 생기는 온갖 ‘듣보잡’ 이름들을 일컫는다. 혹은 구체적으로 어떤 이름의 어떤 회사의 제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고 싶어하는 ‘명품이라는 이름의 욕망’, 즉 일종의 사회적 병리현상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경이로운 것은 다 똑같아 보이는 그 물건들 낱낱의 제조원과 제조연도를 신 내린 무당처럼 눈빛을 빛내며 술술 가려내는 사람들이다. 들판에서 똑같은 풀들을 “이건 쑥이고 이건 미나리고 이건 잡초이니라…” 하며 골라내는 유능한 농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농부와 달리 별다른 효용도 없이 열심히 알아내고 구분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 명품이라는 의미에는 ‘가치’라는 말이 아주 진하게 새겨져 있는데, 요즘 우리가 말하는 명품의 가치란 사치품, 혹은 ‘차이내기’와 동의어로 보인다. 사람들은 그 가치를 알아보고 또는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흐름에서 낙오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1980년대 이래 오랫동안 세계의 명품시장을 주도해온 건 일본의 소비자였다(일본인 중 40%가 루이뷔통 제품을 갖고 있다고 한다). 무엇이건 성의를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일본인들…. 엄격하게 유지되어온 사회적 칸 나누기 때문에 생긴 커다란 정신적인 흉터 때문인 것 같아 측은하기도 하다. 요즘은 그 서열에 중국인들이 끼어들어 경제 위기로 흔들리던 명품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고 한다. 세계사치품협회(WLA)는 “중국의 명품 소비액이 2015년 146억달러에 달해 일본을 누르고 세계 최대 ‘럭셔리 소비국’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럭셔리, 마음을 지배하는 강박

우습게도 우리가 아는 대다수의 세계적 명품 패션 브랜드는 그것을 처음 만든 장인들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루이뷔통은 ‘루이뷔통 모에헤네시(LVMH)’라는 긴 이름의 회사를 소유한 베르나르 아르노라는 프랑스 최고 부자의 것이다. 펜디, 지방시, 크리스찬 디오르, 태그호이어, 돔페리뇽 샴페인, 헤네시코냑 같은 명품 60여개를 수집해서 ‘패션제국의 황제’라 불리는 그는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에 이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돈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을 상대로 소규모 사업을 하던 명품 업체를 하나둘씩 사들여 본래의 주인이나 장인들을 쫓아내고 신진 디자이너들을 발탁하는 방식으로-루이뷔통에서 일하는 창업자의 자손은 단 세 명뿐이다-한 해 매출 20조원이 넘는 거대 그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파리, 밀라노, 도쿄 같은 세계의 주요 대도시에는 피터 마리노 같은 명품 브랜드 전문 건축가가 디자인한 사치스런 매장들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한 회사가 전 세계의 강박증에 부채질을 해댄다. 마치 가수가 만들어지듯이-요즘 땅에서 불쑥불쑥 솟아나오는 아이돌가수처럼-일정한 시스템을 거쳐서 명품은 만들어지고, 소문이 생기고, 별다른 이유 없이, 별다른 고민 없이 세상을 무섭게 칸 나누기한다. 명품을 만들던 집안이 차근차근 접수되어서 통합이 되거나 말거나 소비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트렌드라는 ‘방(榜)’을 담 밑에서 기다렸다가 읽고 모두 달려가서 수단껏 그 물건을 소유하면 되는 것이다. 필요라는 것은 애초에 없고, 단지 패망하는 베트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배에 올라타는 피난민처럼, 6·25 때 열차 지붕까지 기어올라 피난 갔던 슬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애달픈 모습이 얼핏 보인다.

명품이란 일종의 강박이다. 동네 시장바구니로 보이는 어떤 명품가방은 이제는 국민 가방이 되었다. 눈이 밝은 사람은 진품과 가짜를 구분하겠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게 그것 같은데 말이다. 남들이 들고다니면 꼭 같은 것을 꼭 들고다녀야 되는-진짜든 가짜든, 수백만원짜리 백을 들고 옹색하게 지하철 속에 서 있는-사람들의 이상한 ‘존재불안’이 슬프다. 우리는 그렇게, 꼭 그렇게 살아야할까?

이제 우리가 아는 것은 ‘명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냥 조금 원가를 더 들이고, 광고를 제대로 하는 상품일 뿐이다. 우리는 애써 스스로 속아 넘어가고자 한다. 명품은 여러 가지 재주를 넘어 돈을 많이 벌어놓은 공허한 집안에서 뼈대가 없어도, 지적 능력이 없어도 남들을 짓누를 수 있는, 유서 깊은 집안의 문장처럼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장 많이 팔리는 명품은 소위 짝퉁, 가짜도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많이 팔린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이 보여주는 명품의 진정한 감동.
# 진정한 명품은 석가탑·서산마애불


진정한 명품이라는 것에는 ‘아우라’가 있다. 즉 럭셔리가 아닌 마스터피스의 경우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광휘와 울림이 있다. 불국사 석가탑 같은 것이 그렇다. 한동안 공부 좀 하겠다고 전국을 돌며 탑과 불상을 중점적으로 보았던 적이 있다. 유명한 석탑을 모두 보았고, 유명한 불상을 모두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경주였다. 불국사 석가탑, 수려하지만 다보탑에 비해 아무런 장식이 없는 너무 익숙한 모양의, 달달 외웠지만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던 그 탑 앞에 섰는데, 그때 나는 명품 또는 진품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느꼈다.

석가탑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완성도와 만든 사람의 혼과 시대의 건강성이 느껴졌다. 석탑이라는 양식이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완성되고 흐트러지는 전체적인 과정 속에서 석가탑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찬란히 꽃을 피운 신라의 문화적인 저력은 내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어떤 빛보다도 찬란했다. 명품 중의 명품이다.

또는 서산 마애불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에 못지않은 감동이 있었다. 운산 저수지를 지나 산길을 올라 마주 보았던, 배시시 웃고 있는 천진한 얼굴의 바위에 새겨진 불상은 백제 말기 위덕왕, 무왕으로 이어지는 찬란한 역사를 배시시 보여주고 있었다. 또는 우암 송시열의 일생과 추구하던 학문의 도착점이 오롯이 담긴 남간정사 같은 건축을 우리는 명품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명품이란 오랜 시간 싸인 어떤 기운이 번개처럼 하늘을 가르고 세상으로 내려지는 하나의 기운이며 생산물이며 빛이다. 아무것에나 명품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이지 말자.

◇‘명품도시-디자인 서울’을 대표하기 위해 영국에서 활동하는 이라크 출신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심지어는, ‘명품도시’들이 비 온 후 잡초 돋아나듯이 여기저기서 돋아난다. 도시가 명품이 아니라 이름이 ‘명품’일 뿐이다. 그 시초는 아마 서울시였다고 기억된다. 잘 생긴 외모와 어떤 옷을 입어도 스타일이 살아나는 미끈한 시장에게는 참 어울리는 단어이지만 어딘가 빈곤하게 들린다. 혹은 어딘가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져 나온다.

명품도시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명품이란 것은 여러분의 수준을 확 올려드립니다.” 남들이 그러면 말려야 할 분들이 모두 모여서 생각을 담당하는 육체의 어떤 부분이 손상된 사람처럼 천진하게 이야기한다. 용산도 한강르네상스도 명품이고, 어린이공원도 명품공원, 강남 거리, 지하철 역사들, 심지어 현대화하는 재래시장들도 ‘명품시장’이란다. 명품이란 게 기본적으로 흔하지 않다는 희소성에서 출발하는데, 서울에서 명품이란 아무 데서나 발에 차이는 단어다.

말의 인플레이션…. 몇 년에 한 번씩 나부끼는 선거 구호를 보며, 혹은 공약을 보며, 지키지도 않을 말들을 왜 하는지, 하는 생각조차 나지도 않는 그런 말들을 들으며 과연 이제 말의 무게는 얼마나 더 가벼워질지. 마치 부도난 국가의 지폐처럼 혹은 아무도 모르게 가치를 바꿔버린, 개량 당한 통화의 가치처럼 말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명품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수많은 도시나 주거단지나 그런 잡다한 것들을 들을 때 그런 생각이 든다. 명품이라는 말도 실컷 쓰다가 단물이 빠지면 애초의 포장지를 주섬주섬 꺼내서 잘 싸서 휴지통에 넣을 것인가. 이 시대의 명품이란 탄천 옆에 비닐하우스 밀어내고 땅을 수직으로 끌어올려서 커다란 성채로 세운 어떤 비싼 주택이라든지 가난한 작가에게 싸게 구입해놓았다가 부풀려서 시장에 내놓는 슬픈 그림들을 부르는 이름일 뿐인가. 향기나 감상보다는 존재에 대한 불안과 구별 짓고자 하는 욕망과 알 수 없는 착취의 냄새가 역하게 풍긴다.

# 진짜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더 중요하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라는 것이 있다. 예전의 ‘성동원두’ 즉 동대문 운동장 자리, 더 예전에는 청계천 물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출구 이간수문이 있던 자리였다. 일본인들이 흙으로 덮고 군중을 몰고 들어와 다지고 눌러 버렸던 역사를 이번에는 우리 스스로 파내고 옮겨서 여기저기 도려내고 거세해서 박제를 만들어 버렸다. 그 자리에 세계적인 명품 건축가가 명품 건축물을 짓고 있다. 이름하여 ‘환유의 풍경’. 환유(換喩)라는 말은 ‘어떤 낱말 대신에 그것을 연상하게 하는 다른 낱말을 쓰는 비유’라고 한다. 그럼 여기에서의 보여주는 환유의 대상은 명품이나 역사가 아니라 ‘매장되는 역사’ 혹은 그런 쓸쓸한 현실의 풍경은 아닌지?

어느 날 클래식에 정통한 선배에게 “스피커 중 명품을 꼽는다면?” 하고, 길을 묻는 선재동자처럼 천진하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역시 우문에는 현답이 돌아왔다. “내 귀가 명품이니라….” 전방에서 근무하던 선배는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적막한 초병 근무 중에 어떻게 작은 트랜지스터를 하나 손에 넣었다고 한다. 그 트랜지스터로 어렵게 주파수를 맞추어서 음질도 그리 좋지 않은 어떤 교향곡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장엄함과 그 감동은 여태 들었던 어떤 음악보다도 좋았다고. 약간 원효대사가 생각나긴 했지만 가슴에 남는 말이었다. 그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자신 있게 노트북 컴퓨터에 달린 앵앵거리는 스피커를 통해 장엄한 교향악을 듣는다. 내 귀를 통해 내 마음에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명품음악’이 만들어주는 ‘환유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명품이란 훌륭한 거죽에 못지않은 사회적, 역사적인 과정과 혹은 개인적인 과정이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어느 날 한 악기상에 걸인이 낡은 바이올린을 들고 찾아와 제발 사달라고 애걸한다. 악기상이 5달러에 산 뒤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보니 ‘스트라디바리우스 1704’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경매에서 10만달러 이상의 가치가 매겨진다. 그 걸인이 악기의 가치를 진작 알았더라면 궁핍한 삶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남들이 매기는 가치를 무작정 따르기보다는, 내 스스로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이 가장 중요하다. 평생 쫓던 파랑새는 내 집에 있었고 평생 찾아다니던 ‘큰바위 얼굴’은 나 자신이었다.

서울 그 자체만한 명품이 또 어디 있는가. 600년의 세월이 이렇게 담긴 명품도시를 앞에 두고 무슨 명품을 새로 만들겠다고…. 뉴타운과 도심 재개발로 이리 저리 찢긴 채, 땅속에서 무엇인가 나오면 황급히 휘장을 치고 덮어버리는 그런 식의 개발로 우리가 얻는 것은 얼마인가. 동전 몇 개를 얻기 위해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보를 엿장수에게 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치품 가방과 보석으로 치장해 위엄과 권위를 갖추었으나 말 몇 마디 섞어보면 금세 천박함이 드러나는 부유한 중년처럼, 얼마 후 우리는 심하게 보톡스 시술을 해서 주름살 하나도 없이 팽팽해져 젊음을 되찾았으나 인간미와 연륜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불편한 얼굴을 가진 오래되기만 한 공허한 도시를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때쯤 그 도시를 명품도시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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