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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 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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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5-06 09:54:02 수정 : 2010-05-06 09: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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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디지털 유목민 집은 定住대상 아닌 베이스캠프
1960∼70년대의 풍경이 담긴 ‘이웃집 토토로’라는 만화영화에서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한 엄마의 소식을 듣는 것은 옆집에 달려가서 받은, 교환수를 통해 걸려온 전화를 통해서다. ‘영웅본색’에서는 어느 쓸쓸한 공중전화 부스에서 죽기 직전의 장국영이 아내로부터 아이의 출산 소식과 사랑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가수 리치 밸런스의 짧은 생애를 그린 영화 ‘라밤바’에서도 전화기를 붙잡고 전하는 노래는 얼굴을 맞대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달콤하다. 영화 밖에서도 익숙한 풍경들… 수많은 ‘사장님’들이 다방에 앉아 기다리던 것도 거래처로부터 언제 걸려올지 모르는 전화였다.

20세기를 통틀어 전화는 문명의 가장 큰 상징이었고, 20세기를 끝내는 시점에서 전화는 집 밖에도 들고 나갈 수 있는 무선전화기 등으로 발전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또한 전화는 어느 사이 특정 계층의 부의 상징물이 아닌 모든 이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어릴 때 종이컵에 구멍을 뚫고 줄을 연결해서 만들어보았던 가짜 전화처럼 예전의 전화에는 꼭 줄이 달려 있었는데, 그 줄은 벽을 뚫고 길에 서 있는 전봇대로, 다시 지붕 넘어, 동네 넘어의 어떤 지점까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었고, 지중화 공사니 해서 그 선들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 ‘줄’을 알고 있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접속하는 수단이란 전화밖에는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유목민들의 주거지. 그들에게 장소란 별다른 의미가 없다.
# 보이지 않는 선들이 지배하는 세상


그런데 요즘, 도저히 알 수 없는 존재의 비밀처럼, 스티븐 호킹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경고한 외계인의 존재처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선을 연결하지 않은 내 컴퓨터로 어디선가 파일이 날아 들어오고, 출력 버튼을 누르면 옆방에 있는 프린터에서 내가 보낸 인쇄물이 실물로 출력되고, 또는 옆자리 컴퓨터에 들어 있는 영화를 내 것처럼 켜서 보는 것―서로 아무런 연결이 없어 보이는데, 최소한 눈으로 보기에는―그런 일련의 이해하기 힘든 이른바 ‘온라인’으로 연결된 그 ‘라인’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무엇이 온라인이라는 것이지? 라인이 없는데…).

특히 한동안은 ‘부의 상징’(1995년쯤엔 100만원이 넘었던 걸로 기억된다)이기도 했던 휴대전화의 영향은 놀랍기만 하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100명 중 98명 꼴인 총 4794만4000명이라고 한다. 1999년의 두 배 수준이다. 반면 일반전화 가입자 수는 2007년 2313만명을 정점으로, 작년 2009만명으로 줄었고, 올해는 2000만명 선도 무너질 것이라 한다. 당장 우리만 해도 온 식구가 휴대전화를 가지면서 집 전화를 없애버렸다. 학교로, 회사로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집을 하루 종일 전화가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계가 만들어낸 세계에 대항하는 전사들이 빈 사무실의 전화선을 통해 오가던 1999년 개봉 영화 ‘매트릭스’도 아마 몇 년 후에 만들어졌다면 휴대전화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지 모른다.

◇컨테이너와 비닐하우스로 지은 다니엘·젬마 부부의 ‘마운틴’(서울 구기터널 인근). 모바일 시대에 어울리는 자유로운 건축의 사례이다.
# 공간 제약을 벗어난 유목민의 귀환


커피전문점의 한가로운 구석 자리에는 여지없이 노트북을 들고 혼자 혹은 두셋이 앉아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와이파이(Wi-Fi: 무선 랜. 무선접속장치·AP가 설치된 곳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 이내에서 PDA나 노트북 컴퓨터를 통해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니 와이브로(Wibro: 이동하면서 초고속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무선휴대인터넷. 휴대전화와 무선 랜의 중간 영역으로 비용이 더 비싸다)니 하는 나날이 발전하는 무선인터넷과 스케치북만 한 크기의 작은 컴퓨터, 휴대전화 등의 도움으로 인해 그들은 사무실의 책상에서 일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다.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누구와도 어디서도 접속이 가능한, 지금은 바야흐로 ‘모바일’의 시대다.

모바일(mobile)이란 ‘움직일 수 있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모바일이라고 하면 ‘움직일 수 있는’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떠올리기에 앞서,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의 이름 혹은 속성 앞에 아무렇게나 덮어씌울 수 있는, 이를테면 포괄적인 벙거지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모바일 서비스, 모바일 뱅킹, 모바일 게임, 모바일 콘텐츠, 모바일 신문 등등 현대인의 첨단 활동을 상징하는 단어들 앞에 붙어 있는 포괄적인 접두사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제는 모든 책상을 밀어냈던 컴퓨터를 다시 밀어내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는 인터넷과 휴대전화, PDA 같은 최첨단 정보통신기기를 이용하며 고정되지 않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형을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유목민이라며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고 불렀다. 수렵과 채집을 위해 떠돌던 인간이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농경을 시작하며 정주(定住)를 시작한 지 수천 년 만에 다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유목민들에게 집이란 휴대하고 다니는 커다란 덮개에 지나지 않았다. 디지털 노마드에게 사무실이 의미가 없듯, 그들에게 장소란 의미가 없다. 떠돌다 발길이 멎는 곳에 메고 다니는 바랑에서 덮개를 꺼내고 펼쳐 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생활을 꾸린다. 장소란 극히 일회적이며 극히 우연적이다. 혹은 극히 실존적인 어떤 의미이다. 그러나 그들은 땅에 대해 실존이냐, 본질이냐 하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흘러다닐 뿐이었다.

# 장소로부터의 자유, 형식으로부터의 자유

◇스웨덴 블랙 강의 작은 집. 일정한 모듈로 제작되어 언제든 재배치가 가능하다.
건축은 어디까지나 장소를 전제로 한다. 장소를 기반으로 해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건축이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땅에는 혼이 있으며 우리는 그 혼을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건축이론가 노베르그 슐츠가 땅의 정신을 ‘장소의 혼·genius loci’이라 불렀듯이) 건축은 그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태초에 지어진 집은 아예 땅을 파서 땅속을 들어가서 장소성을 확실히 하며, 절대로 땅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땅에 몸을 묻는 것도 장소와의 관계에 집착한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0세기에 건축은 벽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며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같은 근대건축가뿐만 아니라 자하 하디드도 만들고 프랭크 게리도 만들었다. 그리고 21세기의 건축은 이제 장소를 벗어나려고 한다. 라인도 없이 연결이 되는, 마치 우리가 상상했던 공간이동과 흡사한 현대에서는 장소라는 2차원, 혹은 장소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이라는 3차원이 0차원으로 한없이 소구된다. 장소는 점이 된다. 점에서 점으로 건너뛴다. 마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엉큼한 컴퓨터 ‘할’이 노래를 부르며 꺼질 때처럼 화면이 한 점으로 모아지며 ‘퍽’ 소리를 내며 꺼져버린다. 지점과 지점의 연결이라는 장소가 없는 건축은 주머니에도 들어간다. 흔들리고 움직인다.

건축에서 ‘모바일’(움직이는 집)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움직이는 건축이란 건축의 물질적인 형태가 이동하거나, 공간 자체가 변화하는 건축일 것이다. 일찍이 1960년대에 벌써 영국의 실험적 건축그룹 아키그램(Archigram)은 ‘걸어다니는 도시(Walking City)’를 구상했고, 렘 콜하스는 장애가 있는 주인을 위해 바닥(3m×3.5m 크기의 벽이 없는 엘리베이터)이 아래 위층으로 움직일 수 있는 집(보르도 하우스)나 사용에 따라 공간이 변화하는 건축(프라다 트랜스포머)을 계획했다. 멀리 볼 것 없이, 우리 옛집의 들어열개문(분합문)이 방과 대청, 혹은 대청과 마당 사이에서 창도 되고 문도 되고 벽도 되는 모습에서 쉽사리 ‘모바일 건축’의 단서가 발견된다. 도시도 움직이고 방도 움직인다.

# 낮엔 사랑방, 밤에는 침실이 되고

새로운 유목민들을 위해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고, 개인에게 필요한 최소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움직이는 건축은 어떤 것일까? 물리적으로는 경량화가 가능하고 이동 가능한 건축 혹은 내부 프로그램의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건축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작은 집, 혹은 가변적인 집의 아이디어로서 컨테이너 같은 규격화된 재료나 벽이나 창, 심지어 바닥을 움직이게 하는 장치들에 대한 실험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스웨덴의 블랙 강을 가로지르는 산업철도용 다리 위에 지어진 집은 지역 방문자들을 위한 것으로, ‘프리게보드’라 불리는 스웨덴 전통주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계절별로 구획된 주거공간은 가구나 설비들이 일정한 모듈에 의해 제작되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혹은 자연재해나 사고 발생시에 언제든지 재배치 될 수 있는 구조다. 이동과 결합을 위한 레일과 부속들에 대한 조작이 필요하긴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한다. 역사와 전통은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하지만, 더불어 변하는 세상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도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삶을 담는 그릇, 즉 삶의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되는 건축도 변해야 한다. 지나친 장소에 대한 고집과 그를 이용한 장소의 악용(부동산 투기와 부의 상징으로서의 건축)이 이제 끝나야 하고, 건축은 그런 불순한 의도의 편승하거나 혹은 확대에 공헌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삶의 양식에 적합한 건축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북한산에 바짝 붙어 기댄 동네, 구기터널 가는 길에 아주 작은 집이 하나 있다. 건축가 김광수가 지인인 부부를 위해 지은 집으로, 일곱 평짜리 컨테이너 박스와 두 평 반 비닐하우스 2개로 지어진 집의 면적은 열두 평 반이고 옥상까지 쳐도 스무 평 남짓 된다. 산을 정말 좋아해서 집도 ‘베이스캠프’라고 부르는 다니엘과 젬마 부부의 삶의 터전인 카페 ‘마운틴’이다. 입구 안쪽의 문 없는 방은 낮엔 사랑방이 되고 밤엔 침실이 되고, 조리도 하고 빨래도 할 수 있는 싱크대가 있다. 옥상에 텐트를 치면 제2의 침실이 된다.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사는 이들에게, 집은 소유의 대상도 정주의 공간도 아닌 말그대로 ‘베이스캠프’일 뿐이다. 집의 형식으로 보나 공간의 프로그램으로 보나 어디에도 손색없는 ‘모바일 건축’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 ‘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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