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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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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4-07 00:15:42 수정 : 2010-04-07 00: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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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자연’과 인간 조화롭고 화목하게 사는 법을 찾다 # 건축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

‘건축’이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창조라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구체적으로는 땅과, 그곳에 살고자 하는 사람의 희망과 요구조건을 포함한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들이다. 그중 특히 땅의 언어를 읽어내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보이지 않는 여러 조건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계량적인 서양의 방법도 있고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정성(定性)적인 방법도 있다. 그 차이는 서양은 땅을 측정할 수 있는 물질로 보고 있다는 것과 동양은 땅을 특유의 기운이 있는 생명체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다.

◇천년의 시간이 잠겨 있는 고요한 명당, 황룡사지.
십여년 전 지리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한 이야기다. 지리산은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 기가 세기로 두 번째라고 하면 서러워할 산이고 어머니 같은 산이라 시대마다 억울한 일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실컷 울고 나오는 산이기도 하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기맥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훑고 나오다가 소백산에서 방향을 크게 틀어서 내려와 바닷속으로 쑥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힘쓰는 자리라서 백두산의 흐름이란 뜻으로 ‘두류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지리산 중턱 어느 동네에 집을 한 채 설계하게 되었다. 그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국전쟁 때 빨치산이 마지막으로 토벌된 곳이라고 했다.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동네의 기운이 보통은 넘었고, 동네 구석구석 굿당들과 기도처가 많이 있는 것으로만 봐서도 그곳이 만만하지는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도 못 들어가는 곳이라 멀찌감치 기어 올라가 본 땅은 참 잘생겼고 양지바른 곳이었다. 마주 보이는 산이 너무 커서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다만 땅 한가운데에 우뚝한 콧날 모양으로 바위가 하나 박혀 있어서 설계하려면 애 좀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그렇게 하듯이 우리는 어렵게 바위를 피해서 집을 앉히는 설계를 하고, 혹시나 싶어 공사하는 사람들에게 바위를 치우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런데 공사 시작 후 잠시 서울에 갔다 온 며칠 사이에 사단이 벌어졌다. 공사하는 사람들이 거치적거린다고 바위를 답삭 들어서 멀리 던져버리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를 부어 메워놓았다.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다시 바위를 가져다 놓으라고 하지는 못하고 그냥 넘어갔다. 상량식을 거행할 즈음 갑자기 현장에서 계속 사고가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2층 같은 위치에서 연이어 추락사고가 나고 결국 현장소장이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공사의 진행이 난감하게 되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 그렇듯이 실컷 잘난 척을 하다가 막히면 결국은 자신들이 우습게 여기던 무언가에 기대게 된다. 여기서도 그렇게 했다. 멀리 부산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곳에 처음 와본 그 무당은 그 바위자리로 가더니 “여기 있던 바위 어떻게 했느냐”며 잘못을 빌라고 했다.

지금도 가끔 그 생각을 한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보고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적으로 맞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한 지는 얼마나 되었으며 땅이 생겨난 시간에 비하면 얼마나 짧은가에 대해. 그래서 땅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 풍수지리는 땅의 의지 읽어내고 함께 살기 위한 공존의 지혜

‘풍수리지’란 그런 생각의 산물이다. 땅을 무생물이 아닌 생명, 혼이 있고 또한 기가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 다루는 전통적인 지리학이다. 풍수란 말의 어원은 ‘장풍득수(藏風得水)’라는 말에서 나왔다. 옛날 중국의 곽박이라는 사람이 쓴 금낭경이란 책에서 “풍수의 법은 물을 얻는 것을 가장 중시하고 바람을 갈무리하는 일을 그 다음으로 친다(風水之法 得水爲上 藏風次之)”고 했다.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는 “땅을 보는 안목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감촉할 수 있는 지표현상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합리적인 설명도 불가능하지만 경험상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땅 기운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전자가 지리학이고 후자가 풍수설이다”고 정의했다. 즉 풍수의 궁극적인 목적은 땅과 사람의 조화이며 조화는 풍토적응성의 다른 말이라고 한다.

◇지리산과 덕천강이라는 자연의 흐름에 기대어 지은 집, 남명 조식의 산천재.
그그 본질에는 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경외심이 깔려 있고 거기에 새벽별처럼 초롱초롱 맑았던 실학자들의 지리관과 우직하면서도 정직했던 동학의 개벽사상이 합해져 있다. 풍수지리란 결국 땅의 의지를 읽어내는 것이고, 이 지구의 원래 주인인 땅과 늦게 들어온 인간이 같이 살기 위한 ‘공존의 지혜’인 것이다. 좋게 보자면 자연에 대한 경외의 표현일 수도 있고, 혹은 자연을 경영하자는 것일 수도 있고 자연에 ‘영합’해서 현명하게 공존하자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미신으로 치부되어 경원시되었으며, 그것을 과신하는 일부 사람들이 그런 이미지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혹은 묏자리 잡기 위해서 혹은 “가문의 번영과 자신의 영달을 향하여…” 사용되는 ‘술법’으로 크게 오인되고 있다. 그래서 부잣집 묏자리 잡아주는 사람이나 대권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집안 묏자리 봐주는 일이 꽤 재미를 본다고 한다.

몇 년 전에 경치가 좋은 산꼭대기에 어떤 사람의 집을 설계한 적이 있다. 높은 언덕 위에서 일망무제로 인근의 산과 호수가 다 내려다보이는 그 땅은 명당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단 너무 꼭대기라서 뒤를 막아주는 배경이 없었고, 앞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고, 토양도 너무 푸석푸석했고, 바로 옆에는 커다란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종합적으로 사람이 기거하는 자리는 아니었고, 정자라든가 그런 임시 거처나 머무는 곳으로 적합한 땅이었다. 지관이 명당이라고 하는 근거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그런데 그 땅 한 귀퉁이 절벽 바로 앞에 쇠파이프가 하나 꽂혀 있었다. 그곳이 명당의 중심이라고 했다. 표시를 하기 위해 꽂아놓은 것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냉커피에 꽂혀서 나오는 빨대처럼 보였다. 땅에 빨대가 꽂힌 풍경은 참 해괴했고 마치 ‘몬도카네(Mondo Cane)’류의 영화처럼 엽기적이라고 느껴졌다.

마뜩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살게 될 사람이 원하니 그 빨대를 꽂아놓은 땅에 건물을 앉혔다. 그랬더니 지관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보라고 했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워낙 그 믿음이 강해서 거부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지관이 궁금하기도 해서 그를 찾아갔다. 어느 주택가 골목 안에 있는 4층 건물의 꼭대기 방, 오래된 고서가 쌓여있지도 않았고, 수염을 기르지도, 한복을 입지도 않은, 아주 깨끗한 양복을 입은 60대 중반의 노인이 있었다. 자신이 그 땅에서 정확한 포인트를 잡아냈으며 그 자리에 주인의 방을 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 강조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집은 지어졌지만, 그 주인이 원하는 발복 대신 잘되던 사업이 오히려 기울었다는 풍문만 전해 들었다.

# 명당은 발복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한 곳

명당은 어떤 곳일까? 온갖 책을 찾아보고 명당이라는 곳에 다녀봤다. 어떤 곳은 수긍이 가기도 했지만 어떤 곳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남연군묘라고 충청남도 예산 못 미쳐 덕산이라는 곳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묘가 있다. 이하응은 그 자리가 천하의 명당이고 왕이 나올 자리라는 이야기를 만인이라는 스님에게 듣고 그 자리에 있는 가야사라는 절을 몰아내고 바위를 도끼로 찍어내고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들은 고종이 되고 자신은 대원군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다.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는 풍수라는 것은 이런 것일 게다.

예산 수덕사에 가는 길에 들러보니, 좌우로 싸고도는 산의 모양과 앞에 벌여놓은 산의 모습,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잔잔한 풍경들이 마치 풍수지리 교과서에 실려야 할 정도로 완벽한 자리였고 높지 않으나 사방이 훤히 보이는 전망이 있었지만, 그 자리는 무척 고독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나…. 대원군이나 고종이나 결국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인생이 마무리되지 않았던가.

가치의 기준은 꾸준히 변한다. 그래서 명당 타령도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잘살자고 땅을 평가하고 타박하는 것은 어딘지 경박해 보이고 무엇보다도 치사해 보인다. 그런데 듣자하니 우리나라의 풍수는 지금 우리가 하듯 명당을 찾는 도구로서의 풍수와는 달랐다고 한다.

도선국사로부터 시작되는 혹은 그 이전에 생각이 시작되었을 이 땅의 ‘자생풍수’는 중국의 청오경이니 금낭경이니 하는 묏자리 잡는, 땅 알아보는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땅에 대한 생각, 사랑 등이 주요 골격을 이룬다. 그 사상은 땅을 어머니로 본다고, 그래서 빈 곳, 아픈 곳, 허술한 곳을 찾아다니며 침도 뜨고, 뜸도 뜨고, 안마도 해준다고 한다. 참 듣기 좋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도선국사가 잡아놓은 절 자리는 대부분 풍수적으로 불리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곳에 절을 세우면 빈 곳이 채워지고 땅이 건강해져서, 결국 국토가 ‘균형발전(?) 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런 말씀들을 우리는 ‘선생님’으로 모신다.

물론 풍수를 이야기하자면 주변과의 상황과 물의 위치, 산의 위치 등을 골고루 살핀 다음에 그 관계 속에서의 의미를 찾아야 하겠지만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내가 가서 편안하고, 아이가 잘 웃으면 그게 명당이라고 생각한다. 잘 알려진 명당들에 답사를 가면 희한하게도 아이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시원하게 배변을 하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여주 신륵사 근처에서 그랬고, 곡성 태안사에서 그랬다. 지리산이 만개한 꽃이라면 그 꽃의 한복판이라 평평하고 편안하고 밝은 곳, 실상사에 가서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이를 지관이 쓰는 패철처럼 간주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천하의 명당은 경주에 있는 황룡사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황룡사지라면 지금이야 허허벌판이고 잔디를 어찌나 곱게 깔아놓았는지 그곳에서 구르고 나르고 트리플 악셀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이 평평하고 광활한 곳이다. 그럼에도, 그곳에 가면 천년의 시간이 다 보인다. 그리고 천년의 고요가 잠겨 있다. 그 편안함과 안정감은 그곳에 갈 때마다 우주의 배꼽(옴파로스:Omphalos)이 바로 여기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한다. ‘경주가 그래서 여기서 천년을 버텼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땅의 이야기를 듣다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사옥. 땅에 붙여서 정박해놓은 배 같다.
삼성동 코엑스 맞은편에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현대산업개발 소유의 건물이라는데 설계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스타 건축가 중 한 사람인 폴란드 출신 유대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했고, 러시아 구성주의 회화를 붙여놓은 것 같은 입면으로 유명하다. 그는 서울이 힘차게 움직이고 흥분해서 흘러가는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고, 그 느낌을 연극무대처럼 꾸며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말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건물이 있던 자리는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강물과 모래턱이 있던 자리였다. 잠실도와 부리도라고 하는 한강에 떠 있던 두 섬이 60년대에 개발에 의해 강남 쪽에 붙어 있는 땅으로 거듭났다. 심지어는 모래가 거의 금으로 치환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가치를 지닌 땅이 되었다. 상전벽해의 반대인데, 뽕밭이 바다가 된 것이 아니라 뽕밭이 금밭이 된 것이다. 예전에는 봉은사에 가기 위해서는 뚝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다는 하는데, 그래서인지 현대산업개발 건물을 보면 마치 흘러가지 못하도록 땅에 붙여서 정박해놓은 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선으로 내리꽂은 닻으로 땅에 정박해놓은…. 땅의 기억이 건축가로 하여금 그런 설계를 하도록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지리산에 가면 남명 조식이라는 조선시대 큰 학자의 여러 가지 유적을 만날 수 있다. 그는 퇴계 이황과 동년배이며 학문적으로도 높고 낮음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는데, 말년을 자신과 맞는 지리산에 자리를 잡고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10여년을 살며 인생을 마무리했다. 남명은 평생 동안 여러 채의 집을 지었다. 김해의 산해정과 합천의 뇌룡정 등은 그가 얼마나 주역과 풍수지리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로 꼽힌다.

그런 그가 학문적으로 완숙해지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는 나이에 들어와 지은 산천재는 아주 조촐하다. 조촐하다 못해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지리산과 덕천강 사이에 지어놓은 아주 작은 세 칸짜리 집 한 채일 뿐이다. 그러나 가서 보면 마당은 허름하지만 뒤로 보이는 천왕봉 자락이 얼마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지, 작고 낮은 집이 얼마나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는지 그 주인인 남명이 달리 보이고, 건축이라는 추상명사가 비로소 구체적인 현실로 혹은 명쾌한 지식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남명은 지리산과 덕천강이라는 크나큰 자연과 같이 살고자 할 때 인간의 자세를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같이 살기 위해 두 개의 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그러나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고 덕천강이 눈앞으로 시원하게 흐르는 가장 좋은 위치를 잡고 그곳에서 평생을 마무리했다.

큰 건축이란 그런 것이고 올바른 장풍과 득수의 지혜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문명도 하룻저녁 몰아치는 바람과 몇 시간의 호우 혹은 단 몇 분의 지각의 흔들림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최근에도 여러 차례 보아왔다. 미래를 위해서 혹은 현재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묏자리나 발복하는 집터를 찾는 것이 아니라 ‘큰 자연’과 조화롭고 화목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건축은 그런 의지를 읽어내고 땅 위에 조심스럽게 입히는 일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 ‘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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