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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5> 집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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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3-23 23:36:57 수정 : 2010-03-23 23: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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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 집… 그곳에도 영혼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렉싱턴의 유령’에서 주인공은 독신이며 건축가인 친구가 출장을 가면서 집을 봐달라고 부탁하자 일주일간 그 집에 머물게 된다.

보스턴의 교외에 있는 한적한 3층 저택에서 친구가 키우는 개와 노트북과 함께, 약간은 무료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첫날을 보내고 잠자리에 든다. 그는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한 소리에 깨어난다.

그 소리는 아래층 거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음악소리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파티라도 벌이는 것 같은 소리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겁이 나서 확인하러 가지도 않고 그냥 혼자 무서워하며 비몽사몽으로 밤을 보낸다.

그리고 평상시와 다름없는 다음날을 맞게 되고, 이후 그가 집에 머무는 엿새 동안 유령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등 32위의 신주를 모신 종묘.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진행한 설계작업들은 빈 땅에 새로 집을 짓는 일이 대다수이지만 간혹 오래된 집을 개조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한 번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지은 목조 주택을 개조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현장에 가서 본 집은 무척 낡아있었다.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렸고, 군데군데 빗물이 새어들어 와서 가만 놓아두면 집이 그냥 바스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해보였다. 우리는 전망이 무척 좋고 크지는 않지만 모양이 단아한 집이 무척 흥미로웠고 꽤 열심히 궁리하고 준비했었다.

그러나 일이 시작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 바로 ‘집의 의지’와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계획과 그 집이 가지고 있는 의지가 충돌하면서 자꾸만 일에서 튕겨나갔다가 다시 불러 들여지는 과정이 반복되었고, 결국 집은 처음에 우리가 세웠던 계획과는 사뭇 다른 모양의 집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집을 사서 설계를 의뢰했던 건축주도 집을 다 고치자마자 집을 팔고 나왔다. 마치 ‘렉싱턴의 유령’에서처럼 계단 아래에서의 소리는 들렸지만 보이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인왕산 아랫자락 사직단 근처, 필운동에는 그 동네에선 ‘오대감댁’이라고 부르는 집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500년은 된 집이라고 하는데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까지 연대가 되어보이지는 않고, 다만 뒷마당에 우람하게 서있는 회화나무의 수령으로 미루어보아 그 집 자리가 500년은 아니어도 400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 집은 우리가 그 근처에 살던 10년 전부터 지나다니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곳이었는데 원래의 규모는 99칸에 가까운 큰 집이었다. 어느 날 그 집의 반을 어느 수완 좋은 ‘업자’가 분해해서 답삭 실어나갔고(경기도 양평 어느 구석에서 분위기 좋은 카페로 거듭났다고 한다), 우람한 솟을대문을 품고 있는 안채만 남아 있었다. 무척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최근 무슨 복이 들어왔는지 우연히 그 집에 사는 분을 알게 되었다. 올해 93세인 할머니는 연세보다 훨씬 정정하고 아직도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6·25전쟁 때 가족을 잃고 그 긴 시간을 홀로 살아오셨고, 지난 연말에는 전 재산을 기부하셔서 유명해진 분이기도 했다.

◇서울 필운동 오대감 댁. 500년 세월에 절반만 남았지만 한때 권세 높은 양반이 동네를 호령하던 기색은 역력히 남아 있다.
10년 만에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아니 그 집이 10년 만에 우리에게 문을 연 것이다. 집에는 얼마 전까지도 맑은 물이 나왔던 깊은 우물과, 아름다운 후정과 낡았지만 고아한 별당이, 한때 권세 높은 양반이 동네를 호령하며 살던 기색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비록 집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할머니가 그 집에 산 지가 이십 년이 넘었다고 했다. 반이 썰려나갔지만 그래도 규모가 상당한 집에(중간중간 다른 세입자들이 들고 나기는 하지만) 혼자 사는 것이었다. 적막하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집이 있어서 쓸쓸하지 않다고. 남들이 보기엔 들어오기조차 무서울 정도로 퇴락한 집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다고. 집과 할머니는 서로 동료로서, 가족으로서 같이 살고 있었다. 집의 영혼이 자신과 맞는 이를 불러서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유기적인 생명체, 인격부여해야

땅과 사람이 함께 사는 것부터 참 어려운 문제인데, 거기에 집과, 집이 생기며 들어오는 많은 신들까지 복닥거리기 시작하면 무척 복잡한 함수가 형성된다. 예전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을 때는 보이지 않거나 우리가 모르는 신들까지도 함께 모시고 살았다. 집의 운수를 관장하던 성주신, 핏줄을 만들어주신 조상신, 아이를 만들어주시고 키워주시는 삼신, 부엌 부뚜막 위에서 불을 관장하고 부엌의 여러 가지를 관장하는 조왕신, 집터를 관장하는 터주신, 뒷마당을 관장하고 장독을 관장하고 나아가서 조미료까지 관장하는 천룡신, 우물을 관장하는 용왕신, 재물을 관장하는 업신, 화장실을 관장하는 뒷간신 등….

그중 성주신은 옥황상제의 제자였다가 글을 잘못 써서 지하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땅 속에서 오래 있다가 경상도 안동에 있는 제비원에서 소나무 씨앗으로 나오게 되었고, 씨앗이 소나무로 자라 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땅의 사악한 기운을 누르는 터주신은 키가 50척이 넘고 큰 귀에 작은 눈, 코는 빈대코, 손은 조막손이며 발은 마당발이었다고 한다. 또한 뒷간신은 젊고 신경질적인 각시신인데 쉰댓자나 되는 긴 머리를 무척 사랑해서 매일 한올 한올 세고 있는데 기척 없이 갑자기 사람이 들이닥치면 여태껏 세던 머리카락 수를 잊어버려서 앙심을 품고 큰 해코지를 한다고 한다.

땅은 기운을 품고 움직이는 용의 한 부분이고, 그 위에는 다양한 신들이 살고 있고, 그 아래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집(家屋)에 관해서는 예의도 갖추고 유기적인 생명체로 보기도 했지만 인격까지 부여하지는 않았다. 집이라는 존재를 약간은 중간적인 존재, 마치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걸쳐 있는 ‘빈 곳’으로만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본 몇 군데의 집에는 독특한 에고가 있었고, 결이 있었다. 어떤 집은 친절했고 어떤 집은 무척 퉁명스럽고 거칠기까지 했다. 그것을 맞춰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필운동 근처 통의동이라는 동네에 살 때, 바로 옆에 100년은 되어 보이는 일본식 목조 2층 집이 있었다. 동네 어귀에 방치되어 있었던 그 집은 아무도 살지 않은 지 20년이 훨씬 넘었는데, 커다란 창문이 짐승의 큰 눈처럼 끔뻑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너무 낡고 오래되어서, 혹은 불편해서 아무도 들어가서 살지 않는 퇴락한 집들을 볼 때마다 나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황혼’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서 마음이 짠해진다. 그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명이 있건 없건 우리가 신세를 졌던 모든 것에는 예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건 식물이건 땅이건 집이건…. 100년은 물론이고 200년도 훨씬 넘은 평범한 ‘동네 집’들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이웃 일본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삶과 죽음 성찰게 하는 영혼의 집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집들 중에 가장 오래된 집들은 바로 ‘영혼의 집’일 것이다. 종묘는 영혼의 집이다. 그리고 아주 긴 집이다. 마치 영혼의 헤아릴 수 없는 길이처럼…. 그 앞에 서면 아득한 느낌만 남는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아득해서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사람들이 기웃거리는 모습까지도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앞에선 “저 집이 몇 칸이나 될까?” 하는 세속적인 질문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길다∼” 혹은 그 느낌마저도 소거된 채, 이를테면 인간의 감각, 혹은 3차원의 감각은 증발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하늘과 맞닿으며 수평으로 한없이 연장되는 지붕의 선….

저 집을 지을 때 건축가는 아마 평소에 쓰지 않았던 비장의 ‘자(尺)’를 하나 꺼내서 썼음이 분명하다. 사람의 집과 영혼의 집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다른 척도를 써야 한다는 것은 엄격하게 지켜져 왔고 면면히 그 ‘비결’이 전승되어왔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지 희한하게 그 ‘자’가 잘못 쓰이기 시작했다. 그 ‘자’가 사람의 집을 지을 때도 물색없이 쓰이곤 한다. 우리는 사람을 내리누르는 잘못 재단된 ‘사람의 집’에 기함을 친다.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영혼의 집 ‘브리온 가족 묘지’. 두개의 커다란 원이 교차하는 입구는 탄생과 죽음을 상징한다.
영혼의 집을 지을 때 쓰는 ‘자’를 분명히 지니고 있었을 법한 건축가가 있다. 현대건축을 논할 때 프랑스에는 르코르뷔지에가 있었고, 핀란드에는 알바 알토가 있었고, 스페인에는 가우디가 있었다면, 이탈리아에는 카를로 스카르파가 있었다. 유리공예에서 시작한 그가 죽을 때까지 10개 안팎의 건물을 지었을 뿐인데도 수백 개의 건물을 설계한 20세기 건축의 거장들과 동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건축가들의 공통된 이념이었던 합리주의 건축의 법칙을 따르기보다는 철저한 장인정신을 가지고 치밀하고 미려한 건축조영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공간은 거친 콘크리트나 거친 뿜칠재를 써도 마치 비단으로 만든 것처럼 부드러우며 화려하다.

그가 설계한 ‘영혼의 집’, 이탈리아의 트레비소 지방에 있는 ‘브리온 가족 묘지’(Brion Family Cemetery, 1969)는 브리온 부부와 그의 가족의 영혼을 모시고 있는 집이자 스카르파 자신의 영혼 또한 머물고 있는 곳이다. 스카르파는 콘크리트와 대리석, 화강석, 오닉스, 동, 나무재료 등을 조합하여 밝음과 어둠,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또한 그곳에는 긴 인생의 여정을 나타내는 물이 흘러간다.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두 개의 커다란 원이 교차하는 입구인데 사람의 눈 같기도 하고 반지 같기도 한 적색과 청색의 링은 남성과 여성, 알파와 오메가, 탄생과 죽음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종묘가 끝이 없을 것처럼 긴 수평선으로 영혼의 공간으로서의 엄숙함을 표현했다면, 브리온 묘지에서 스카르파는 근원적인 기하학 형태의 반복과 재료 자체의 본질적 물성을 드러내는 상반된 요소들의 사용과 시적 은유로 삶과 죽음을 표현함으로써,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生과 死 경계가 없는 영원의 공간

◇염거화상 부도. 부처가 앉은 연화대좌 위에 팔각집을 얹어놔 아름답기 그지없다.
영혼의 집은 영원성을 담고 있고, 사람들은 영원성을 추구한다. ‘부도’라는 것은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스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시는 묘탑을 일컫는데, 결국 부도는 영혼의 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 선종이 들어오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 선종의 비조 도의선사의 부도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강원도 양양 진전사에 모셔져 있는데 석탑의 기단에 팔각형의 몸통을 조합한 양식이었다.

도의선사의 부도는 제자인 염거화상에 의해 만들어졌고, 염거화상이 열반에 들자 그의 제자 체징에 의해 염거화상의 부도도 만들어진다. 염거화상 부도는 현재 원래의 자리가 아닌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는데, 하단은 부처가 앉는 연화대좌를 놓고 그 위에 팔각집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장식이나 조각이 정교하고 비례가 무척 아름답다. 그럼에도 단순함과 맑음이 만들어내는 기품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시간의 옷을 시원하게 훌훌 벗어버린 높은 정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큰 스승 무학대사도 돌아가신 자신의 스승을 위해서 집을 여러 채 지었다. 양주에 회암사라는 절 뒤에 멋진 자리에 지어드렸고, 여주에 신륵사라는 절 뒤에도 지었다. 우리는 여주 신륵사 뒤에 무학대사가 스승의 영혼의 집으로 지어드린 ‘보제존자 석종’과 그 주변을 무척 좋아한다. 무학대사는 스승에 대한 애정과 응석을 그 땅에 한 가득 부려놓았다. 그 집에 가면 늘 까르르 부서지는 햇살이 가득하고, 잠을 방해하는 어떤 소리도 차단된다. 영원이란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무학대사는 그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음이란 결국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며,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이 3차원의 공간에는 단 하나의 시간만 있다. 영원히 현재가 반복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겹쳐진 공간을 ‘영원’이라고 한다. 청학 스님이 “생과 사의 경계가 없다고 하는데 지금, 스님은 어떠십니까” 하고 돌아가시기 직전 법정 스님에게 묻자, 스님은 볼펜으로 종이에 힘겹게 “원래부터 없었다”라고 답을 했다고… 바깥도 아니고 안도 아닌 경계가 모호한 공간이 영원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영혼이 깃든다. 집과 사람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의 영혼이.

가온건축 공동대표, ‘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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