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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 아이덴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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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6-01 14:25:51 수정 : 2010-06-01 14: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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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살아 숨 쉰 익숙한 것들 포클레인으로 엎어버리는 도시
‘나’를 지키는 ‘안도 건축’서 배워야
# 아이덴티티: 나는 과연 나인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컴퓨터를 켜고 사이트에 접속할 때나 은행에서 맡긴 돈을 찾을 때 혹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타인에게 ‘내가 나’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명해서 보여야 한다. 교묘하게 조합된 글자로 치환된 나의 정체를 네모난 칸에 또박또박 입력하고 엔터 키를 두드리면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그 문이 열리면 앉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도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고 공과금을 내고 친구들과 대화하는 등의 모든 사회적 활동이 가능하다.

매 순간 자신을 증명하고 확인하게 하는 굴레, 보통 아이디(ID)라고 하는 기호화된 자신의 정체성은 아이덴티티(identity)를 의미한다. 아이덴티티란 적극적 의미에서는 자신의 정체성 혹은 존재의 증명이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되는 어떤 존재의 동일성 혹은 반복성을 의미한다. 그 말은 철수는 늘 ‘철수스러움’을 유지하고, 영희는 늘 ‘영희스러움’을 유지한다는 피동적인 의미의 존재 증명이기도 하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홋카이도 ‘물의 교회’. 노출콘크리트와 긴장감이 감도는 묵직한 공간과, 무거움과 극적으로 만나는 가벼움은 가장 일본적이고 가장 현대적인 건축으로 손꼽힌다. 아래 사진은 스케치.
나를 증명하는 몇 개의 글자들과 암호들은 종종 어이없게 도용당하기도 하고, 간혹 나조차도 나의 ‘정체’를 잊는 경우가 있다. 그때 우리의 존재는 엄청난 의혹의 눈총을 받게 된다. 땀을 흘리며 이런저런 추측을 통해 ‘정체’를 조합해내야 한다. 마치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 나오는 기억을 잃은 첩보원 제이슨 본처럼,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여러 가지 기억의 파편들을 이리저리 유추하고 맞추며 지난한 길을 걸어 자신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특성이란 늘 반복되는 것이긴 하지만 종종 그 ‘동일성의 패턴’이 꼬이기도 한다. 실존철학의 기초를 세운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는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그 돈으로 새로운 일을 해보고자 도시로 올라온 농부가 나온다. 그는 두둑해진 주머니로 우선 도시 생활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려고 이발을 하고 새 옷과 새 신을 사고, 좋은 음식점에 가서 음식과 술을 배부르게 먹고 밤이 다되어 거리로 나왔다. 술에 취한 채 길을 걷다가 그만 길에서 누워 잠이 들었는데, 그때 그가 누워 있는 좁은 길로 마차가 한 대 지나가게 된다. 마부는 농부를 깨워 좀 비켜 달라고 부탁을 했다. 농부는 멍한 정신으로 길 쪽으로 내뻗은 자신의 발을 보게 되고, 낯선 옷차림이 눈에 들어오자 “내 다리가 아니니 그냥 지나쳐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길로 뻗은 다리 위로 마차가 지나갔는지, 아니면 마부가 술에 취한 농부를 들어서 옮겨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야기에서의 농부는 잠시라도 자기 자신을 잊는 바람에 심각한 육체적인 위험에 처하게 된다. 사람은 한순간도 자기 자신을 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잊거나 잃는 순간 많은 고난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되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잃어버린 컴퓨터 앞이나 은행창구 앞에서처럼, 때로는 길에 누운 농부처럼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이다.

# 나와 타자의 충돌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져 가는 서울 종로구 청진동 피맛길.
자신의 존재를 세우고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일은 스스로 가능하기보다는 타인을 통해 상대적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통한 자신의 증명 혹은 타인의 욕망에 다다르기 위한 애달픈 노력은 때로는 비극적이기까지 한 인간 존재의 현실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라고 생각한 왕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데 인생을 바쳤다. 서기를 하나 고용하여 자신이 말하는 것을 받아쓰게 하고, 오직 그때만이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오히려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했으며, 막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려고 할 때 다른 누군가가 말한 다른 생각에 신경이 쓰였고, 막 자신의 분노에 휩싸이려고 할 때 다른 누군가의 분노도 함께 느꼈다. 그래서 왕자는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불태우거나 찢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항상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기억과도 사투를 벌였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말만을 위해 노력했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이 왕자의 이야기는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대표적 소설 ‘검은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 중의 하나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이스탄불 공과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던 파묵은 어느 날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7년 동안, 폭포 앞에서 득음을 하기 위해 수련하는 소리꾼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글을 써서 마침내 터키를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의 소설은 끊임없는 자아의 탐구, 자아의 정체성의 탐구, 이질 문명과의 충돌을 통한 자신의 아이덴티티 탐구로 일관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는 자신이 타자가 되기도 하고, 구분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그의 의식은 이스탄불의 미로에서 형성되었으며, 그의 소설에는 이스탄불이라는 시간이 두껍게 쌓인 도시가 선명하면서도 신비하게 펼쳐진다. 마치 인간의 의식을 탐구하던 제임스 조이스와 그의 고향 더블린처럼….

그런 입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소설이 1990년에 쓰여진 ‘검은 책’이다. 이야기는 갈립이라는 변호사의 부인 뤼야(아랍어로 ‘꿈’이라는 의미)가 어느 날 없어지면서 시작된다. 더불어 뤼야의 우상이며 의붓오빠인 신문 칼럼니스트 제랄도 없어진다. 소설은 갈립이 뤼야를 찾기 위해 이스탄불 전체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되며 느끼는, 신비하고 수많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갈립은 제랄을 찾아 헤매는 동안 점점 제랄이 되어간다. 타인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은 자신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타인과 합쳐진다.

# 나를 지키는 건축가, 나를 지우는 도시

안도 다다오라는 일본 건축계의 영웅이 있다. 그는 정규 건축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한 전직 복서 출신의 건축가라는 드라마틱한 이력을 갖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일본 건축계를 넘어 세계 건축계에서 가지는 높은 위상이다. 30대에 이미 그 건축적 성취를 인정받았고, 1995년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그가 창조한 빛과 바람과 자연이 머무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공간은 가장 일본적이며 가장 현대적인 건축으로 손꼽히고, 그의 이름은 건축의 교과서로 간주되는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현대건축의 거장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 심지어 그의 건축은 많은 사람을 전염시켜 무수한 안도의 복제품이 여기저기서, 특히 한국의 건축에서 비 온 뒤 풀이 돋아나듯 여기저기에서 솟아나왔다.

안도 하면 연상되는 노출 콘크리트와 긴장감이 감도는 묵직한 공간, 무거움과 극적으로 만나는 가벼움은 그의 건축을 잊을 수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이를테면 그림으로 그린 것같이 말끔하면서도 잘 다듬어 놓은 꽃 같은 일본 공간의 정신을 현대건축으로 되살려 놓은 것이다. 그의 건축에 들어가면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공간에 대한 시선을 아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안도의 건축 자장은 무척 확고하고 반복적이며 ‘안도스러움’이 흘러넘친다. 안도는 일본적 전통을 개인의 기호로 치환하여 자신의 몸으로 삼고 늘 같은 자세로 건축을 하고 있다. 안도의 건축에는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결연함이 보인다.

반면 우리는 나를 지키기는커녕 맹렬히 지우는 도시에 살고 있다. 비싼 돈을 들여 지우는 것을 대단한 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딘지 부족해 보이는 나의 얼굴보다는 남들이 모두 좋다고 말하는 타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고 닮고 싶어 한다. 성형외과에 가서는 자신의 얼굴을 스스럼없이 지우고, 도시를 새롭게 디자인한다며 오래된 길들과 오래된 마을을 선뜻 지우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공허한 명분과 국적을 알 수 없는 디자인들―안도 같은 저명 건축가들의 아바타들―이 채워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모르는 이국의 잣대로 우리의 코를 높이고 있고, 우리의 턱을 깎아내고 있다.

피맛길, 청진동, 예지동 같은 이끼 푸르고 그늘진 골목길들은 몇백 년 전 지도에도 주먹을 쥐면 툭 불거지는 손등의 핏줄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한때 폭풍처럼 도시를 휩쓸었던 개발의 바람을 다 견뎌내며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 잊고 살다가도 익숙한 풍경이 그리울 때 찾아가던 고마운 곳들이다. 그런 길들이 갑자기 지워지고 있다. 변덕스러운 자본의 불확실한 약속을 믿고 우리는 거리낌없이 포클레인을 불러들이고, 땅속에 몇 겹으로 쌓여 있는 시간의 흔적들을 황급히 덮어버리고 있다. 없던 역사도 만들어 내고, 다른 나라 유물을 빼앗아 박물관에 모셔 놓는 남들을 비웃고 탓하는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다.

# 나를 지키는 집

자신을 지키는 일은 그렇게 어렵고도 중요하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어느 날 큰형님의 집 수오재(守吾齋) 즉,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의 당호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가운데 나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니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는가?” 학문적 성취가 깊었던 그에게 자신을 지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외롭고도 무척 길었던 귀양생활을 통해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대체로 천하만물이 모두 지킬 필요가 없는데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내 밭을 떠메고 도망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머리에 이고 달아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집도 지킬 필요가 없다. 내 동산의 꽃나무, 과실나무 등 나무들을 뽑아갈 수 있을까?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혀 있다. 내 책들을 훔쳐다가 없애 버릴 수 있을까? 성현들의 경전은 세상에 물이나 불과 같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니 누가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내 옷과 식량을 훔쳐서 나를 궁색하게 할 수 있을까? 지금 천하의 실이 모두 내 옷이요, 천하의 곡식이 모두 내 먹을거리다. 제가 비록 그중 한둘을 훔친다 해도 온 세상의 것을 모두 다 가져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천하의 만물을 모두 지킬 필요가 없다.

유독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길 잘하며 들고남이 무상하다. 비록 친밀하기 짝이 없이 바싹 붙어 있어서 배반할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익과 벼슬이 유혹하면 가버리고. 위세와 재앙이 두렵게 하면 가버리고, 궁상각치우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흐르는 것을 들으면 가버리고, 푸른 눈썹 흰 이를 한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 가버린다. 가서는 돌아올 줄 모르니 잡아도 끌어올 수가 없다. 그러니 천하에 ‘나’처럼 잃기 쉬운 것이 없다. 굴레를 씌우고 동아줄로 동이고 빗장으로 잠그고 자물쇠를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뜬 세상의 아름다움’의 ‘수오재기’ 중에서,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태학사)

나는 거저 지켜지지 않는다. 결연한 노력 없이는 쉬이 가버려 돌아오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확인되고 증명되는 나는, 과연 나인가? 나로서 정당한 나인가? 남의 얼굴로 남의 옷을 입고 남의 집에 거한 나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언제 화장한 남의 얼굴 대신 나의 맨 얼굴을 돌아볼 것이며 나를 지켜나갈 것인가.

가온건축 공동대표, ‘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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