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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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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1-31 16:34:43 수정 : 2010-01-31 16: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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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흐름 방해 않는… ‘땅이 꿈꾸는 건축’은
우리에게 근대의 공간은 어느 날 갑자기 왔다. 기와집들 사이에 고딕 성당이 불쑥 솟아오르고, 적산가옥들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돌로 지은 근사한 양옥들이 왔다. 전쟁으로 무너진 길 위에 삽시간 고층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붉은 벽돌집 옥상의 노란 물탱크들을 부수고 도미노 같은 아파트들이 주루룩 늘어섰다. 그 도시화의 여정에서 땅은 생산을 멈추고 공간들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생각하고 싶어도 생각을 나누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우리의 20세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눈을 돌리니 세상은 변했다. 몸은 바빠도 마음의 여분은 생겼다. 우리의 공간은 단지 먹고 자기 위한 삶의 그릇을 얻기 위한 투쟁의 장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돌아보는 성찰의 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여분의 시간과 공간을 엮는 몇 가지 키워드를 찾는다. 꿈, 정체성(아이덴티티), 복제, 욕망, 디지털, 명품, 풍수 등의 사회적 이슈들과 건축을 씨줄과 날줄 삼아 ‘지금, 여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고자 한다.

# 나를 꿈꾸는 나


피라미드를 처음 만들어 최초의 건축가라 불리는 이집트의 임호테프(Imhotep)는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제사장이기도 했다. 조세르 왕 시절에 7년간이나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아 대기근이 일어나자, 왕은 나일강의 범람을 다스리는 쿠놈 신의 신전에 가서 기우제를 올리게 되었다. 당시 사제였던 임호테프는 신탁을 받고 신전을 복구하자 과연 이듬해부터 나일강이 다시 범람했고, 그 공로로 임호테프는 왕의 신임을 얻고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 생전은 물론 죽은 후에도 신처럼 숭배되었다. 이집트에서 태양의 아들인 파라오를 제외하고 신격화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과거의 임호테프처럼 현대의 디자이너들도 사람들의 꿈을 들어주고, 혹은 빠르게 그 시대의 꿈을 읽고 그걸 구체적인 물질로 만들어낸다. 그 기능의 10퍼센트도 사용하지 못하는 고가의 장난감 스마트폰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 자칫하면 ‘국민 가방’이 될지도 모를 고가의 명품 가방을 왜 모두 들고 다니는지 알 수 있는 열쇠는 그 지점에 놓여 있다. 우리는 마치 매혹당한 영혼처럼 그 제사장들의 주술에 말려들어가 우리의 욕망을 식힌다.

# 건축은 땅이 꾸는 꿈이다

건축은 꿈이다. 건축가는 꿈을 듣고 또한 스스로 꿈을 꾼다. 건축가들은 파르나서스 박사처럼 사람들의 꿈을 듣고 그걸 엮어내고 펼쳐서 보여주기도 하고, 땅의 꿈을 듣고 그 위에 쌓아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 있다. 사람의 꿈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땅을 이해하고 그 결을 이해하는 일은 더욱더 어렵다.

누구나 집을 지을 때는 땅을 보고 짓는다. 땅의 크기에 맞게 땅의 모양에 맞게 그리고 땅의 고유한 성질에 맞게 일을 진행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가지 복잡한 이익과 주변의 간섭이 끼어들면서 점점 땅의 목소리는 잦아들게 된다. 유능한 건축가는 건축주와 땅을 만족시킬 줄 아는 사람이고, 위대한 건축가는 건축주와 땅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시대의 요구까지도 만족시킬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절대적인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건축가가 있을까? 그런 기준에 적합한 건물이 있을까?

한참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한강 양화진변에 봉긋이 솟아 있는 잠두봉 위에 꽃처럼 피어 있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이 생각난다. 한강과 평행하게 달리는 강변북로를 달리다 그 건물을 볼 때면 “저 건물은 땅과 참 잘 어울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그 땅에 가장 적합하며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더라도 땅이 저렇게 피어올랐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 참 즐거워지고 은은한 감동이 일렁인다. 그리고 땅이 꾸었던 꿈은 스스로가 절벽 위에 피어 있는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모습이었구나 하는 사실이 읽혀진다.

그러나 도시에서 땅의 흐름을 읽고 땅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땅의 질서가 사람의 질서에 수렴되어 버린 서울의 한강 이남, ‘강남’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더욱 어렵다. 강북의 땅은 예전에 훌륭한 조상들이 땅의 흐름을 잘 보전해 주셔서 지금도 그 이야기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지만, 강남은 땅을 고르게 펴고 다듬고 문질러 놓은 후 그 위에 그 뻣뻣한 기하학을 입혀 놓아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땅이 어떤 꿈을 꾸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 어번 하이브

강남역에서 북쪽으로 예전에 제일생명 사거리로 불리던 곳이 있다. 그곳은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한가한 곳이었는데, 새로 지하철 9호선이 개통하면서 복작거리기 시작하는 중이다. 주변으로 깊고도 무거운 바람이 부는 것은 한강을 향한 남북방향의 경사와 반포 쪽을 향한 동서 방향의 경사가 엇갈리면서 무척 복잡한 맥이 흐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명으로 보자면 논현동은 고개를 의미하고 반포동은 물가를 뜻하니, 말하자면 흙과 물의 접경에 있는 셈이다. 또 오랫동안 비어 있던 유흥업소가 있던 곳으로, 마치 좋은 시기 다 보낸 퇴역한 장군처럼 남향 볕을 쬐며 쓸쓸히 늙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땅은 어떤 꿈을 꿀까? 거기엔 어떤 건물이 들어서야 할까?―궁극적으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런 단순한 질문이다―그 앞을 지나다니며 늘 그 땅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궁금증에 답이라도 하듯이 어느 날 그 자리에 가림막이 쳐지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납작한 땅에서 툭툭 털면서 일어서고 있었다. 마치 “자, 보아라” 하는 듯이. 골격이 갖춰지고 표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장막이 걷히자 하얗고 네모 반듯한데 표면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입방체가 하나 나타났다. 알고 보니 그 건물은 김인철이라는 건축가가 설계했고 건물의 이름은 ‘어번 하이브(Urban Hive)’였다. 어번은 도시이고, 하이브란 꿀벌통 또는 활동의 중심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데, 말 그대로 이 건물은 꿀벌의 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공질의 벽은 그 건물의 껍질이자 뼈대였다. 외부에 벽으로만 서 있는 그 건물은 작지 않은 면적임에도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었다. 콘크리트라는 무척 무거운 재료임에도 밝고 가볍게 느껴지고, 동그란 구멍을 정연하게 뚫어 놓았음에도 방향성이 없는 원형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분방한 느낌을 준다. 그 분방한 느낌과 그 가벼운 질감은 흐르는 땅위에 무게감을 덜어주면서, 땅 위에서 가능한 최대의 덩치를 확보해 주었다.

아마도 땅은 그런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가득 채워 놓으면서도 비어 있고, 단호하게 존재하지만 그 존재는 무척 투명하면서도 가벼워 땅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그런 몸을….

가온건축 공동대표, ‘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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