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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희망으로 꿈을 이룬 사람들

입력 : 2009-05-08 17:35:25 수정 : 2009-05-08 17: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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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소개한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꿈을 이룬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고난 천재성이 있거나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노력 하나만으로 땀을 쏟은 만큼 평가를 받은 것이다. 한 명은 한인 1세로 최초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시 직선 시장에 당선된 강석희(56)씨이고, 또 한 명은 ‘내신 5등급에 모의고사 290점’이라는 중하위권에서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기어코 서울대에 합격한 김찬영(23)씨의 이야기다. 각각 자서전 ‘유리천장 그 너머-세일즈맨에서 시장까지, 강석희의 꿈과 도전’과 수기 ‘꿈이 있다면 멈추지 않는다’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강석희 시장이 시의원에 첫 출마한 2004년 가가호호 방문하여 유세하는 장면. 5개월 동안 2만 가구를 방문, ‘발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강석희 지음/올림/1만2000원
유리천장 그 너머/강석희 지음/올림/1만2000원

꿈이 있다면 멈추지 않는다/김찬영 지음/은행나무/1만2000원

“뛰어난 재능이 없더라도, 잔꾀나 편법을 부리지 않아도, 투기를 하지 않아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차곡차곡 꿈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내 삶을 움직이는 원칙은 성실, 최선, 정직, 화합, 비전 이런 것들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도덕 교과서 같은 원칙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를 깨우쳤다.”

2008년 11월 흑인인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함께 유색 인종으로서는 최초로 어바인시 시장에 당선된 강석희 시장의 말이다.

학연, 지연, 혈연, 재력 등 무엇 하나 의지할 것 없었던 강석희는 과연 무슨 힘으로 어떻게 미국 대도시의 시장이 될 수 있었을까.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난 강 시장은 77년 고려대를 졸업하자마자 막연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형네 집 차고를 개조한 방과 식구가 여섯인 누나의 방 2개짜리 임대아파트에 빌붙어 신혼생활을 하며 직장을 찾았다. 첫 인터뷰에서 미심쩍어 하는 매니저에게 “석 달만 기회를 주면 당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소”라는 대담한 제안으로 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 회사인 서킷시티에 입사, 뛰어난 실적을 보이며 승승장구했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에 부딪혀 숱한 아픔을 맛봐야 했다. 스스로 회사를 떠난 그는 몇 번의 실패 끝에 사업가로 기반을 다졌다.

그의 인생을 180도 전환하게 한 사건이 1992년 발생했다. 바로 LA폭동이다. 피땀으로 일군 동포들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는 참상을 지켜보면서 그는 한인사회의 열악한 정치적 현실에 눈뜨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치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2004년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의원에 출마, 따갑기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 5개월 동안 2만가구를 일일이 방문하여 유세를 펼친 일화는 그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발발이 캠페인’으로 유권자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그는 시의원 재선은 물론 4년 후 시장에 당선되는 영광까지 얻었다. 발발이 캠페인은 단지 선거 유세뿐만 아니라 현장 민심을 듣는 계기였고, 그는 민심을 하나하나 정책에 반영해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다음은 ‘희망 없이 뛰어난 능력보다 노력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길이 열린다’고 전하는 강 시장의 말이다.

“흑인 오바마와 이민 1세 강석희를 선택한 미국인들의 너그러운 포용력, 모든 이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미국의 열린 정신에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에서 방글라데시나 필리핀 이민자가 선출직에 출마한다면 한국인들이 과연 그들을 시장이나 의원으로 뽑아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미국 사회의 열린 태도는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참고로, 1991년 캘리포니아주 다이아몬드바 시장을 지낸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은 직선이 아니었고, 2005년 뉴저지주 에디슨 시장에 선출된 최준희씨는 세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한인 1.5세대다.

◇2007년 김찬영이 3수 끝에 서울대 논술 시험을 볼 때의 장면이 우연히 한 통신사 사진뉴스에 실렸다.
김찬영 지음/은행나무/1만2000원
김찬영의 서울대 합격기는 어찌 보면 매우 평범한 이야기일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1등만 하다가 과학고나 외고를 졸업하고 명문대에 진학한 ‘최고’ ‘1등’ ‘엘리트’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공부보다 게임을 좋아하던 한 평범한 학생이 과외는 물론, 학원도 한 번 다니지 않고 공부로 오로지 꿈을 향해 달렸던 ‘노력’의 과정이기 때문에 더 빛이 나는지 모른다. 수험생 커뮤니티인 ‘오르비’에서 다른 합격기에 비해 최고로 화제를 불러 모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을 하는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난 김찬영은 중간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문과, 이과를 선택할 땐 10여번이나 결정을 번복하며 교무실을 들락거렸다. 어렵게 이과를 선택하지만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3학년 때 다시 문과로 옮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 ‘꿈’이 생겼다. 게임 고수들과 상대하면서 한 과목 한 과목 대면하며 승부욕을 키워나갔다. 기어코 K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이 남아 대학을 그만두고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재수 끝에 이번엔 H대 법대에 합격했지만 그곳도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그는 다시 3수를 선택했다. 하루 12시간씩 혼자 공부하는 방법을 택한 그는 마침내 2007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합격했다. 그로선 불가능을 현실로 이룬 것이다. 순전히 노력 하나만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셈이다.

김찬영은 말한다. “실력은 초라해도 꿈만은 당당하라”고.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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