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26>기녀출신 거상 김만덕

관련이슈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입력 : 2008-11-25 17:58:33 수정 : 2008-11-25 17:58:3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굶주린 제주백성 재산 풀어 구제… 조선시대 기부 실천한 여성CEO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내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김만덕의 초상.
최근 한 여배우의 기부 선행이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수년간 계속해서 8억5000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선뜻 내놓은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김밥 장사로 어렵게 모은 돈을 흔쾌히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쾌척한 할머니의 이야기도 간혹 들린다. 삶의 의미 중의 하나가 기부에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부로 나눔을 실천하는 한 가수의 삶도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런 사례는 알려진 것이고, 물론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는 소리 소문 없이 기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부 문화를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은 만덕이다. 특히 제주도 기녀 출신이라는 지역적, 신분적인 특이성도 그녀의 신비감을 더하게 한다. 만덕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돈을 벌었으며 기부까지 했을까?

#1. 의기(義妓) 만덕은 누구인가?

“제주의 기생 만덕(萬德:1739∼1812)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 허락해 주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20년 1월 25일)

위의 기록은 1796년(정조 20) ‘정조실록’에 기록된 만덕의 기부 선행 장면이다. 조선시대 한반도 최변방 중의 한 곳인 제주에서, 그것도 기생 출신 여자가 재물을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국가의 공식 기록인 실록에 기록하였다는 점 또한 매우 이례적이었다. 실록에는 만덕에 관한 기록이 짧게 언급되어 있지만, 그녀의 행적은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과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박제가의 ‘초정전서’, 조수삼의 ‘추재기이’ 등 조선 후기 개인의 저작물에도 소개되어 있다. 그만큼 만덕의 행적이 당시 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고을로 이뤄졌던 1872년 제주도를 그린 제주삼읍전도. 육지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 남쪽이 지도의 상단에 그려져 있고 오름과 10개의 목마장 경계, 최남단 마라도 위치도 뚜렷하게 표시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만덕은 김해 김씨의 후손으로 아버지 김응렬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살에 풍랑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에 제주도를 덮친 전염병의 여파로 어머니마저 잃었다. 고아가 된 만덕은 바로 퇴기(退妓)의 수양딸이 되었다. 대개 기녀는 자신의 딸에게도 기예를 가르쳤고, 이 과정에서 만덕도 기예를 익혀서 15세 무렵부터는 본격적으로 관기(官妓)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만덕이 기생으로 알려진 것은 이러한 삶의 배경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만덕 스스로는 기녀로 자처하지 않았다. 양갓집 딸이라는 자존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채제공이 쓴 ‘만덕전’에는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이고 기녀 노릇을 했지만 기녀로 자처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2. 어떻게 큰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여성의 능력을 쉽게 발휘할 수 없었던 조선 후기. 당시 사회에서 만덕과 같은 여성의 성공 신화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면 만덕은 어떤 방식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었을까? 만덕이 살았던 조선 후기 영조, 정조시대는 조선시대에도 대표적인 변화의 시기였다. 전통적인 사업인 농업 이외에 수공업이나 상업, 유통 경제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고 실천된 시기였다. 상업과 유통 경제의 발달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것이 포구 무역과 객주업이었다. 만덕은 포구 무역과 객주업으로 큰 돈을 번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제주도가 더 이상 경제적 소외지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 어업과 해상 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제주도가 떠오른 것이다. 만덕은 그곳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직접 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만덕은 관기를 그만두고 건입 포구에서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제주목 관아에 인접한 이곳 포구에는 장삿배에서 관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 판매하는 일종의 중개 상인이었다. 요즈음으로 치면 호텔과 판매업을 갖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만덕이 객주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관기로 있으면서 관리들과 맺어진 친분도 중요한 작용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그녀 특유의 장사 수완이 큰 몫을 하였다. 제주는 쌀 등의 곡물이 특히 부족한 곳이었다. 만덕은 외부에서 반입되는 쌀이나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금의 독점권을 확보하여 이를 미역, 전복 등 제주의 해산물과 교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쌀과 소금의 시세 차익을 이용하여 계속 부를 축적해 나갔고, 결국 제주도 최고의 여성 갑부가 되었다.
◇제주도 최고의 여성 갑부였던 김만덕이 천금으로 쌀을 사들여 제주 백성을 구제한 공로로 당시 국왕 정조를 알현해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는 상상도.

#3. 만덕과 ‘배비장전’의 도시, 제주도

만덕은 조선시대 제주도를 빛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인물이 알려지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사실 제주도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최악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오늘날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관광도시 제주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絶海孤島)였고, 모든 정보가 차단됐고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은 지역이었다.

현재 제주도를 대표하는 명문 오현고의 이름은 제주 오현단에 배향된 5명의 인물 즉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을 추모하는 뜻에서 유래한다. 이들 오현은 어사로 제주에 파견되었던 김상헌을 제외하면 모두 사화와 당쟁의 격동기에 유배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유배 기간 동안 당시 학문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제주에 학문을 진작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세기 이후에도 제주도는 당대 최고의 명망가들을 유배자로 맞았다. 19세기의 학자 김정희는 1840년에서 1848년까지 8년 동안 제주도 유배생활 동안에도 꼿꼿한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인격과 학문을 고양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그 유명한 추사체가 완성된 곳도 이곳이었으며, 유배지를 찾았던 제자 이상적에게 “추운 계절이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는 공자의 명언을 담아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보내준 곳도 제주도였다. 근대의 인물 중에도 최익현, 김윤식 등이 무너져가는 조선사회를 일으켜 보고자 뜻을 세우다가 결국은 제주도로 유배되는 비운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세계적 관광도시로 변모하여 휴양을 즐기는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았던 당대의 내로라했던 학자들이 재기를 위해 자신의 의지를 굳혀나가던 바로 그러한 공간이었다.
◇제주 건입동 모충사의 김만덕 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김만덕의 묘비. 김만덕은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뒤 15년 후에 세상을 등졌다.

조선 후기에는 제주도가 소설 속의 주요한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배비장과 기생 애랑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배비장전’의 무대가 제주이다. 소설은 김경이라는 양반이 제주목사에 임명되자 자신과 친분과 있던 배선달을 예방의 비장으로 삼는 것에서 시작한다. 본래 서강에 살면서 놀기 좋아했던 배선달은 기쁜 나머지 집에 가서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제주도는 당시에 여색(女色)으로 소문난 곳이어서 아내는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남편이 주색잡기에 빠지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소설의 첫머리는 아내와 굳은 약속을 하고 제주도에 도착하는 목사 일행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해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그만큼 제주도는 가기가 힘든 곳이었고 관리들이 기피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주도가 고전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는 점은 그만큼 제주도가 역사의 공간으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로 볼 수 있다.

#4. 금강산 유람과 채제공의 ‘만덕전’

만덕의 기부 행위에 조정에서도 포상을 논의했다. 남자가 아니어서 쉽게 관직을 내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만덕은 조정의 이런 고민을 깨끗하게 해결해 준다. “다른 소원은 없으나 오직 하나, 한양에 가서 왕이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는 것과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2000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거액 기부자답지 않은 소박한(?) 소원이었다. 당시 제주도 여인들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제주목사는 조정에 민원을 보고하였다. 
 
◇화가 이명기가 1789년 그린 채제공의 초상. 채제공은 김만덕을 ‘고니 노닐 듯 빼어난 기풍’이라고 평했다.

정조는 흔쾌히 만덕의 소원을 수용하고 적절한 조처를 지시하였다. 1796년 만덕이 서울 궁궐에 오자 정조는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의 벼슬을 내렸고, 왕비 효의왕후와 함께 직접 만덕을 격려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평생의 소원이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8세기 이후 조선에 진경문화가 도래하고, 선비들의 여행도 활발해지면서 금강산이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선비들은 금강산 유람 경험을 기행록으로 남겼고, 김홍도나 정선과 같은 화가들은 화폭에 금강산을 담았다. 만덕 역시 금강산 유람이 활발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접하였고, 조선에 태어난 이상 꼭 금강산을 둘러볼 것을 꿈꾸었다.

꿈을 이룬 만덕은 만폭동, 묘길상을 거쳐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총석정을 둘러보는 것으로 금강산 유람을 마쳤다. 만덕은 그야말로 장안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번암집’에서 “만덕의 이름이 한양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자 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금강산 관광 후 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제주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이때 정조의 최고 참모이던 재상 채제공을 다시 만났다. 처음 상경했을 때도 만난 바 있었던 채제공은 이별의 자리에서 직접 지은 ‘만덕전’을 그녀에게 주었다. ‘만덕전’은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 실려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였다.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인데 예순 얼굴 마흔쯤으로 보이네. 천금 내어 쌀을 사들이고 백성을 구제한 덕으로 처음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뵈었네. 다만 원하는 것은 금강산을 한 번 유람하는 것. (중략) 탐라는 저 멀리 고량부 신인(神人) 때부터인데 여인네가 이제야 나라 임금을 뵐 수 있었다네. 칭찬 소리 우레 같으며 고니 노닐 듯 빼어나니 높은 기풍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구려.”(‘번암집’ 중 ‘만덕전’)

만덕은 제주도에 돌아온 후 15년 만인 1812년 세상을 떠났고, 유언에 따라 무덤은 제주 성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묻혔다고 한다. 만덕은 영원히 제주의 연인으로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해마다 만덕상을 제정하여, 또 다른 만덕을 현재에도 계속 배출해가고 있다. 제주 기녀 출신에서 성공한 CEO로 자리 잡은 여인, 나눔의 미덕을 실천한 기부 천사 만덕. 그녀로 인하여 조선시대 여성사는 더욱 풍부하게 되었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엄현경 '여전한 미모'
  • 천우희 '미소 천사'
  • 트와이스 지효 '상큼 하트'
  • 한가인 '사랑스러운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