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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이주민들의 고통스런 유랑의 길

입력 : 2008-07-18 21:31:49 수정 : 2008-07-18 21: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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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상 연작소설집 ‘찔레꽃’
◇남북 민간교류 현장에서 탈북 이주민의 비참한 실상을 목격한 소설가 정도상씨는 “21세기 유랑민들에게 삶의 온전성을 되돌려줘야만 진정한 의미의 인권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소설가 정도상(48)씨가 탈북자의 실상을 그린 연작소설집 ‘찔레꽃’(창비)을 펴냈다. 6·15민족문학인 남측협회 집행위원장으로 남북을 오가며 채집한 에피소드에 살을 붙였다. 정씨는 1987년 광주항쟁 소설집 ‘일어서는 땅’에 단편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한 이래 사회·정치 문제를 도전적으로 다룬 작품을 써왔다. 권력을 직접 공격하든, 서민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든 그의 소설엔 정의감이 뼈처럼 들어 있다. 소설집 ‘모란시장 여자’(2005), 연작소설 ‘실상사’(2004) 등 근작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데, 그 비극을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에 자주 마음이 아팠다”는 말은 정씨의 작품세계를 정확하게 요약한다. 

2006년 초부터 2008년 4월까지 집필한 ‘찔레꽃’ 연작은 탈북 여성의 기구한 삶을 다룬 소설이자 ‘비공식 브리핑’이다. 문학의 역할 중 하나는 공식역사가 놓친 삶의 세목을 건지는 일이다. 7편의 연작은 함흥 출신 여성인 ‘충심’의 고통스러운 유랑길을 따라간다. 주인공 충심의 인생은 북한의 전체주의와 남한 사회의 위선으로 무참하게 헝클어진다. 연작의 첫 단추 ‘겨울, 압록강’이 암시하듯, 충심에게 닥친 현실은 이북의 겨울처럼 가혹하고, 질기다.

순진한 열일곱 살 처녀 충심은 인신매매범에게 속아 이종사촌 미향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다. 나물죽으로 연명하는 곤궁함, 사랑하는 재춘 오빠를 배불리 먹일 수 없는 처지가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헤이룽장성의 궁벽한 농촌에 팔린 두 소녀는 지옥을 경험한다. 미향은 부자(父子)에게 번갈아 욕을 당하는 결혼생활로 실성하고, 충심은 남편의 의심과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한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메이나, 소소, 은미로 이름을 바꾸며 월경하지만 현실은 끝까지 혹독했다. 한국에서 선교사 일당에게 정착금과 생계비를 갈취당한 충심은 노래방 도우미, 매춘부로 전락한다. 음악학교에 다니던 소녀의 소박한 소망은 퇴폐 노래방에서 끝났다.

“사람답게, 나이에 어울리게 살고 싶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저녁을 먹고, (…) 무엇보다도 신분증 없이 떠돌지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삶을 간절히 소망했다.”(157쪽)

긴박한 월경과 추잡한 기획입국은 6번째 단편 ‘얼룩말’에 소상하게 폭로된다. 박 선교사는 탈북을 도와주는 대가로 여덟 살 아이에게 “김정일은 나쁜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란 간증을 강요한다.

‘찔레꽃’이 절망으로 완전히 막혀 있진 않다. 충심을 팔아넘겼던 춘구와 갑봉은 훗날 오라비처럼 곁을 지켜주는 인간다움을 보인다. 작가는 인간 본성의 선함을 암시하면서 조심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낙관적인 것은 억센 운명에 휘둘리면서도 찔레꽃을 보살피는 충심의 꿋꿋함이다.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찔레와 고려에 남은 달래와 병든 아버지의 찔레꽃 전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찔레 화분을 끌어안고 잠들었다.”(218쪽)

남북 민간교류 실무자이기도 한 작가는 ‘찔레꽃’을 써야 했던 필연을 책 말미에서 말한다. 소설가, 사회운동가, 정의로운 개인으로서의 어투가 섞인 복합적인 목소리다.

“다른 작가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많지 않았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유랑하는 사람들을 ‘탈북자’로 만들어 한국으로 ‘기획입국’시키며 영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뻔뻔스럽게도 ‘북한인권’ 운운하는 것을 보면서 절망했고 그 때문에 이 작업이 긴급하다고 느꼈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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