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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고재 안뜰 정자 앞에 앉아 있는 안영환씨. 그는 한옥이 일상과 풍류가 분리되지 않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공간이라고 강조한다. 사진=안영상 사진작가 |
종로구 계동 재동초등학교 후문을 따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옛것을 즐기는 집’ 락고재의 주인장은 안영환(51)씨다. 그는 한옥 양반문화의 명품 브랜드화를 주창하고 있는 인물이다.
“한옥은 자연을 닮은 자연을 호흡하는 기(氣)찬 건축물입니다. 풍류란 바로 자연의 호흡이니 한옥과 천생연분인 셈이지요.” 그는 풍류는 바람이고 호흡이고 생명이라 여긴다. 자연의 에너지를 받고 살아가는 건강한 삶의 양식이다.
한번은 독일 건축학회 세계순회 세미나가 락고재에서 있었다. 하루종일 소규모 토론회등이 이어졌다. 돌아가면서 그들이 안씨에게 던진 질문은 “왜 한옥은 마음이 편해지나요?”였다.
“한옥은 푸른 하늘과 구름이 들락거릴 수 있는 공간 구조가 장점이지요.” 부드러운 지붕곡선, 가구 사용이 절제되어 있는 융통성 있는 가변적 공간, 온돌방의 미학, 건폐율이 25%를 넘지 않는 여백과 주변 환경을 정원으로 끌어들이는 열린구조에 그는 답을 찾았다.
“고즈넉한 한옥을 보면 가슴이 짜릿하고, 군불 지핀 온돌방에 누우면 저절로 ‘시원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에서 저는 한국인의 문화유전자를 발견합니다. 그것의 결정체가 한옥의 풍류라 할 수 있지요.” 그는 한옥 양반문화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국제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경제성, 편리성이란 측면에서 푸대접을 받아왔던 한옥이 이제 삶을 비보(裨補)해줄 건축공간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집이 삶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생명을 담는 소중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한옥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풍류의 뿌리는 자연이고, 그것을 담는 그릇이 한옥이라 했다. 그가 한옥에서 외국인들에게 전통 음식, 음악, 춤 등 한국의 풍류문화를 체험케 하는 이유다. 한옥이야말로 풍류를 제대로 우려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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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고재 대청마루에서 주안상을 마주하고 손님과 대화하고 있는 안영환씨. 그는 한옥에서 하늘땅을 연결하는 신단수 같은 이미지, 곧 자연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
락고재에 들어서면 담벼락에 창호 형태로 붙어 있는 조명이 대나무와 어우러져 달빛을 연상시킨다. 옹기종기 놓여 있는 장독대는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대청마루의 시원한 공간에 빠져들면 바람도 시간을 비껴간다. 여기에 전통음식과 차, 가야금 등 국악공연을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다.
6년째 락고재를 이끌어 온 안씨는 사실 이 분야엔 전혀 문외한이었다. 그는 ‘진사댁’ ‘제주미항’ 등 한국 전통식당을 여러 곳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1982년 이후 10여년간 미국 회사(EDS)에서 통합관리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1990년대 초 귀국해 사업하는 친구들을 도우면서 외국인 바이어를 많이 만났는데, 한결같이 한국의 정체성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해왔습니다. 중국에 압도하는 스케일이 있고 일본에 화려한 섬세함이 있다면, 한국은 무슨 색깔이 있냐는 식이었지요.”
그도 그럴것이 기껏해야 갈비집, 고궁, 룸살롱이 ‘한국의 전부’였으니 이해가 되면서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나보란듯 보여줄 것은 없으나 느끼게 해줄 수 있는 한국문화의 본류인 ‘풍류’를 주목하게 된다.
“한국문화의 진수는 ‘시각’이 아니라 ‘가슴’이라는 것을, 그것이 곧 풍류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안동 하회마을 등 유서 깊은 종택의 양반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숙박과 함께 풍류를 맛보는 프로그램이었다.
“달밤 병산서원 만대루에 앉아 소반 술상을 앞에 두고 대금 연주를 듣게 했습니다. 은은한 달빛을 타고 흐르는 대금 소리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파란눈의 아가씨를 보고 ‘바로 이거다’ 확신을 했지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일상을 받은 하회마을 담연재를 비롯해 지례예술촌, 경주 독락당 등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에 맞춰 종갓집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종친회 제사 등으로 장소 확보가 여의치 않았다.
안씨는 서울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할 거점공간이 절실해졌다. 옛 진단학회가 쓰던 낡은 한옥이 헐린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매입했다. 역사적 의미가 담긴 건축물이라 원형을 살리고 싶어 해체복원에만 2년여의 시간을 할애했다. 썩은 기둥은 잘라내고 보완하는 동발잇기 방식으로 진행했다. 워낙 한옥이 낡아 80%는 새 건축자재를 쓸 수밖에 없었다. 대목장 정영진옹이 낡은 고가의 골격을 유지하는 선에서 전통 한옥의 멋을 살려 냈다. 쓸 수 없는 기와도 버리지 않고 담을 쌓는 데 활용했다. 여기에 정자와 연못, 장독대와 굴뚝, 소나무와 대나무 조경을 보완한 것이 지금의 락고재다. 한옥의 원형을 살리면서 화장실 등 호텔의 편리함도 갖췄다.
“디지털 시대엔 더 정제되고 고급스런 아날로그 문화의 수요가 늘게 됩니다. 한옥 풍류문화를 명품으로 가꿔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선비문화, 그 속에 담긴 ‘풍류’가 해답이라고 말한다. 중국이 부러워하고 일본이 탐낸 풍류와 넉넉함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락고재엔 온돌 찜질방도 있다. 일본의 ‘료칸(전통여관)’의 온천에 견주기 위해서다. 방 안엔 쑥향이 그윽하다. 아궁이에서 참나무 장작이 소리를 내며 붉게 타는 모습은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다. 참나무 타는 향은 후각을 자극한다. 한 외국인이 ‘아궁이 찜질방’에 연거푸 원더풀이다.
“풍류는 즐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합일되는 과정이 있기에 더욱 흥취가 납니다.” 락고재의 밤이 가야금 산조 등 풍류 한마당에 젖어들고 있다. 원래 국악기는 한옥을 채우기 위한 악기가 아니었는가. 센 음들은 창호지가 걸러내고, 부드러운 음은 서까래에서 맴돌게 된다. 서양음악이 밀폐된 공간에서 절대음이 깨끗하게 연주되는 것을 중요시한다면, 국악은 빗소리 바람소리까지 다 음악으로 받아들인다. 한옥 자체가 완성된 풍류마당인 셈이다.
“한국문화가 정적이라 하지만, 실은 동적이며 흥겨움과 과정의 섬세함이 살아 있는 문화입니다. 저는 한옥이라는 공간을 통해 이런 우리 문화의 본류를 보여줄 생각입니다.” 안씨는 이를 위해 스위스와 미국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한 아들에게 미국과 일본에서 각각 5년간 ‘락고재’ 실험을 하게 할 생각이다. 비즈니스로도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다. 요즘 소규모로 특화된 호텔이 세계적으로 뜨고 있는 추세와도 걸맞다.
“10년 후엔 아들에게 일을 물려주고 도가적 삶을 살기 위해 산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무위자연이 바로 풍류가 아닙니까.” 그는 이미 재산 절반을 사회에 환원할 계획을 세웠다. 나머지 절반으론 한국의 풍류문화에 일조할 작정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를 용인 백남준 미술관 맞은편에 좀더 큰 크기로 복사해 짓는 등 전국 곳곳에 한옥풍류방을 세울 예정이다. 하회마을의 양반 초가 건립 추진도 같은 맥락이다.
그와 대청마루에 앉아 주안상을 마주하고 처마 위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신선이 부러울 게 없다. 이런 게 풍류가 아닐까.
문화전문기자 wansik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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