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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78> 강릉 선교장

입력 : 2013-07-18 20:02:47 수정 : 2013-07-18 20: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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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지서 약간 떨어진 낮은 능선에 둘러싸인 ‘명당'
효령대군 11세손 이내번이 처음 터 잡은 후 10대 걸쳐 차츰차츰 집 늘려가
안채·사랑채·행랑채 등 가로로 길게 배치돼 있는 게 특색
강릉에 위치한 선교장, 23칸이나 되는 무척 긴 행랑채가 집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진정한 만석꾼의 집, 선교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래된 것들에 대한 괄시가 무척 심했다. 지금이면 상당한 대접을 받았을 물건들이 헐값에 고물로 넘겨지고, 명당이니 풍수니 하는 소리는 모두 근거 없는 미신 정도로 치부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갑자기 신데렐라처럼 화려하게 되살아나 복고 열풍이 불고, 집을 짓고 집안을 꾸밀 때도 ‘명당 마케팅’ ‘풍수 마케팅’으로 재미를 보는 사람들이 꽤 생기는 모양이다.

‘한국적인 가치’가 드디어 대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서울 한복판 궁궐 주변이 ‘하늘이 내린 명당’이라고 하면서 파헤쳐져서 아파트로 불끈 솟은 모습을 보면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긴 한다. 명당이란 것이 정말 광고 문구처럼 하늘이 내린 것인가. 정말 사람이 들어가 살기만 하면 무조건 발복하는 ‘절대명당’이 있는 걸까.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주택 중 가장 큰 집인 선교장은 강원도 강릉에 있는 오래된 부잣집이다. 부자 삼대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이 집 식구들은 10대에 걸쳐 여전히 부자로 잘 살고 있다. 선교장은 강릉 경포대에서 시내 쪽으로 가는 길옆으로 낮은 능선에 둘러싸여 홀로 서 있다. 들어가는 입구의 연꽃 만개하는 연못과 그 위에 서 있는 그림 같은 정자, 그리고 몇 칸이나 되는지 세기도 힘들 정도로 긴 행랑채와 그 안으로 안채와 동별당·서별당·외별당·열화당 등 줄줄이 보이는 지붕들은 이 집이 예사로운 집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아닌게 아니라 선교장은 정말 대단한 집이다. 집의 규모가 지어질 당시 왕궁이 아닌 일반 주택의 최대 한계치인 99칸을 넘어서는 102칸이다. 집이라기보다는 작은 궁궐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집의 모습을 보자면 담 대신 23칸이나 되는 무척 긴 행랑채가 집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는데, 그 행랑채에는 문이 두 개 달려 있다.

이런 이색적인 정면의 모습은 이 집이 다른 집과 다른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슬그머니 암시해주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은 안에 들어가면 더욱 강해지는데, 마치 물건을 나란히 늘어놓듯이 집들이 가로로 길게 들어서 있다. 보통의 집들은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를 한구석에 두고 집안을 관장하는 안채가 가운데 앉아 있다. 그리고 나머지 기능들은 그 주변으로 빙 돌아가며 배치되는데, 이 집은 그런 일반적인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어떻게 보면 위계가 없고 정확한 기능도 없어 보인다. 사랑채만 해도 열화당을 비롯해서 여러 곳이 있고, 안채의 기능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집 안에 들어가서 느껴지는 공간감이 무척 다양하다.

그 이유는 이 집이 한 번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안채가 지어진 1756년부터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차근차근 지어졌기 때문이다. 선교장의 주인은 재력이 대단해서 한때 강릉을 중심으로 한 영동지방에서 수확한 곡식의 대부분을 거두는 진정한 의미의 만석꾼 집안이었다. ‘만석’이라는 것은 나락으로 만 가마이며 쌀로는 오천 가마인데, 이는 1000여 가구가 일 년을 버틸 수 있는 양이다. 경제적 수준을 이야기하는 척도가 쌀이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굉장한 양이다. 이 집은 농경지가 절대적으로 적은 강원도에서는 유일무이한 만석꾼의 집이었고, 전국을 통틀어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고 한다.

활래정 안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
#자신에게 맞는 땅이 진정한 명당

배를 내려 다리를 건너 들어왔다 해서 이름 붙여진 배다리골(선교·船橋)에 처음 선교장이 자리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중엽에 효령대군의 11세손 전주이씨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안동권씨와 강릉으로 이주해와 경포대 근처 저동에 자리를 잡는다. 강릉 출신인 그의 어머니는 충주에 살던 전주이씨 이주화의 3재취로 시집을 갔는데, 결혼한 지 15년 만에 남편 이주화가 세상을 떠난다. 그 이후 집안의 여러 가지 상황은 이내번의 모자에게는 그다지 편하지 않게 돌아갔던 모양이었다. 강릉에 돌아와서도 친정의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 어머니와 함께 이내번은 재산을 열심히 모으기 시작한다.

운이 좋아서인지 수완이 좋아서인지 일은 잘 이루어지고 금세 더욱 너른 터가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터를 찾아다니던 어느 날, 이내번은 눈앞으로 떼를 이뤄 이동하는 족제비들을 보게 된다. 이상하게 여겨 뒤쫓다 보니 족제비 무리는 어느 야산에 이르러 울창한 송림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이내번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데 바로 그곳은 터도 그가 원하던 너른 터였고, 더군다나 자리도 더할 수 없는 천하의 명당이었다. 늘 그렇듯이 이야기의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역시 신령스러운 동물이 등장하고…. 이내번은 그런 명당을 대번에 알아본다.

“시루봉에서 벋어 내리는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가 평온하게 둘러져 장풍(藏風)을 하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의 좌우로 벋어, 왼쪽으로는 약동 굴신하는 생룡(生龍)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할 만하고, 약진하려는 듯한 호(虎)는 오른쪽으로 내려 자손의 번식을 보이는 산형이라 생각되었다. 더욱이 앞에는 얕은 내가 흐르고, 그 바른편에는 안산(案山)이 있고, 왼편 시내 건너엔 조산(朝山)이 있어 주산에 대한 객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훌륭한 터였던 것이다.”(이기서 저 ‘강릉 선교장’, 열화당)

선교장 사람들이 믿는 그 땅의 모습이다. 이내번 일가는 그곳에서 불같이 일어나 큰 부자가 되고, 그 집안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땅이 그런 정도의 명당인가. 내가 보기에 그곳은 일반적인 명당의 구비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긴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부잣집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보다 훨씬 뛰어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집은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는 통념을 뛰어넘어 두고두고 가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선교장 입구의 활래정.
사실 명당이라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명당이란 단지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낸 하나의 추측이거나 혹은 몇 가지 사례에 의해 가공되는 불완전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약간 논리의 비약은 있겠지만, 사실 이 세상에 명당은 없거나, 혹은 모든 땅이 명당이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 맞는 ‘어떤 땅’이 있을 뿐이다. 즉, 자신에게 맞는 땅을 골라서 그 위에 살게 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편안함 속에서 자신의 역량이 배가되는 것일 뿐이다.

충남 아산에 있는 ‘맹씨 행단’이 좋은 예이다. 조선 초에 뛰어난 재상 맹사성이 살던 곳인데 사실 그곳은 일반적인 의미의 명당이 아니다. 땅의 위치가 커다란 산의 북사면이라 언제나 그늘이 지고 싸늘한 곳이다. 커다란 앞발을 높이 들고 포효하는 호랑이 밑에 집을 지은 형상이니 웬만한 사람은 들어가면 그 기세에 눌려 성치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맹사성은 그곳에 들어가 아무 탈 없이 잘살았고, 그뿐 아니라 관직에 들어가서는 별다른 난관 없이 높은 곳까지 오르고, 행복한 말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맹사성이 명당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맹사성이 들어갔으므로 그 땅이 명당이 된 것이다. 이내번이 고른 땅 역시 누구나 들어가기만 하면 복이 굴러들어오는 절대적 명당이 아니라, 그가 처한 여러 가지의 상황을 극복하는 데 가장 적합한 땅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는 부자가 된 것이다.

사랑채의 기능을 하는 ‘열화당’.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듣는다’는 시구에서 인용해 지은 당호이다. 동판지붕의 차양이 인상적이다.
문화재청 제공
#대가족을 이루며 세상의 중심이 되다

이내번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강릉 토박이들에게는 그의 성공에 적합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주변에는 늘 그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태어난 충주에서나 어린 시절 들어와 열심히 자리를 잡아나간 강릉에서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던 그가 생각한 것은,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멀어지지 않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중심을 찾는 것이었다.

배다리골은 그런 그에게 아주 잘 맞는 위치였다. 우선 강릉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서도 별로 떨어져 있지 않고, 주변은 높지 않은 산으로 인해 적당히 가려지고, 터가 넓어서 살림의 규모를 점점 넓히며 그가 원하는 하나의 독립된 사회를 이룰 수도 있는 곳이었다. 이내번은 족제비 가족처럼 그동안 불어난 재산과 가족을 이끌고 배다리골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들어온다. 높지 않은 능선이 양팔로 감싸안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탄탄한 외곽을 쌓고 늘어나기 시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장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반적인 당(堂)이나 재(齋)로 끝나는 당호를 쓰지 않고, 장원을 뜻하는 장(莊)으로 집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원은 대대로 이루어진다.

이내번의 이런 생각은 집을 구성하는 데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내번이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때는 지금의 모습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지금처럼 초입에 활래정이 있지도 않았고 긴 행랑채도 없었다. 다만 가족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일반적인 ‘ㅁ’자형 부잣집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식구가 늘어나고 이에 맞춰 집도 늘어나는데, 늘어나는 집의 모습은 일반적인 반가의 형식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선교장의 형식은 기본적인 틀을 완성한 3대 오은 이후(李厚)와 사회적인 기능이 확충된 6대 경농 이근우에 의해 두 차례 대대적인 증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내번의 손자인 이후는 자신들이 뿌리를 내린 강릉에서 경제적인 성공과 다른 측면에서 존경받는 명가의 위치를 확보하고 싶어한다. 그는 여러 번 과거에도 응시하는 등 노력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해서 작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평생의 한으로 남고, 결국 집안을 단속하며 재산의 증식과 가족의 화목에 온 힘을 기울인다. 가족 결속에 대한 열정은 어느 집에서나 있게 마련이지만, 외부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배척을 받아온 이내번 대부터의 분위기가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용한 것이다.

이 작업은 4대손 이용구에게까지 연장되는데, 이때 지은 건물 중 하나가 유명한 열화당이다. 사랑채의 기능을 하는 이 건물의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듣는다’는 시구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랑채의 당호로는 다소 엉뚱하지만, 집안의 이념과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는 이름이었다. 이로써 선교장은 일반적인 부잣집에서 대가족을 수용할 수 있는 장원으로 확실하게 개념이 정립된다.

그럼으로써 다양한 기능의 채들이 병렬로 나열되는 선교장의 특이한 구성이 완성된다. 이는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이며 가장 핵심의 단위인 가족이 집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이 아니라 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독특한 형식이다. 후대로 갈수록 선교장은 더욱 사회적인 성격이 확충되어 외부 지향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 정신은 그대로 남아 대표적인 한국의 명가 중 하나로 자리하게 된다. 그렇기에 배다리골은 사회의 최소단위인 가족을 핵으로 하여, 중심이 아닌 곳에 스스로 새로운 중심을 만들고자 했던 이내번의 염원을 담아냈던, 더할 수 없는 명당이 되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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