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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76> 마루

입력 : 2013-07-04 21:01:09 수정 : 2013-07-04 21: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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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어 가득 찬… 멋과 향기 있는 오묘한 경계의 공간
집 안이면서도 집 밖인 특수한 공간
양반집에 있는 호사스러운 누마루
정갈하고 품위있는 대청마루 등 다양
자연과 풍류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사람들과 정서적 교감 나누게 하는 곳
#마루, 가장 높고 신성한 곳

지난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경남 거창 어느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집을 한 채 지었다. ‘一’자 형태의 소박한 집으로, 삼대가 사는 내부는 무척 조밀해서 별다른 공간적 호사를 부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주변의 경관과 집을 감싸고 있는 숲이며 물이며 자연적 요소가 너무나 훌륭해서 그런 안타까움을 덮어주었다.

여유 공간에 대한 아쉬움은 집의 앞과 옆으로 붙인 마루로 해소했다. 거실 앞에는 기대어 앉아 팔을 걸칠 수 있는 교살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달아 집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너른 들과 산을 보게 했다. 2층 방에는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보 위에 높은 난간을 세운 공중에 떠있는 마루를 얹어, 집의 옆구리에 붙어있는 층층나무와 그 아래로 고이는 맑은 샘을 내려다보게 했다. 두 곳의 마루로 인해 집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풍부한 표정을 갖게 되었다.

어찌 보면 그냥 비어있는 공간이지만 비어있으므로 인해 가득 채워지는, 마루는 참 넉넉한 공간이다. 몇 년 전에 설계했던 넓은 마루가 붙어있는 작은 집이 외국의 건축 언론에 소개되었을 때, 대체 현관은 어디이고 저 데크(?)의 기능은 과연 무엇인가? 의아해하는 서양인들의 반응이 무척 재미있었다.

안도 밖도 아닌, 자연과 집 사이에 놓인 마루…. 우리는 마루를 무척 좋아한다. 그 촉감을 좋아하고, 그 단어가 가지는 넉넉함을 좋아한다. ‘마루’라는 단어의 여러 가지 의미 중에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아본다면, 하나는 주택의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바닥에 나무판을 깔아놓은 공간이고, 또 하나는 고갯마루·산마루와 같이 높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 그 두 가지가 전혀 다른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발생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마루라는 단어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중앙아시아의 퉁구스족의 언어에서 발견된다. 그들의 언어에서 ‘Malu’ 혹은 ‘Malo’란 그들의 주된 주거형식인 천막에서 제일 높은 기둥 아래 공간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마루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곳이며 위계가 가장 높은 공간이기에 그곳에 신을 모신다는 것이다. 결국 마루는 ‘높은 곳’,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로 완성된다.

거창주택의 거실에 달린 누마루. 기대어 앉아 팔을 걸칠 수 있는 교살 난간을 둘러 집 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너른 들과 산을 보게 했다.
또한 종묘사직(宗廟社稷)이나 종가(宗家)라는 단어 등에서 쓰이는 ‘마루 종(宗)’이라는 한자도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근원·으뜸·제사·존경받는 사람 등의 의미가 있는 그 글자의 기원을 뒤져보면, 역시 퉁구스족의 ‘마루’와 비슷하게 공간을 표현한 글자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골문을 보면, ‘마루 종’자의 원형이 박공지붕 모양의 공간 안에 있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은 모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마루는 상에 뭔가 올려놓고 치르는 의례, 즉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파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루는 ‘제사를 지내는 무리의 장’ 혹은 ‘가장 높은 곳’, 모든 ‘일의 근원’으로 의미가 점점 확대된다. 또한 왕을 뜻하는 마립간,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마님’ ‘마루하’는 모두 마루에서 나온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마루라는 공간은 결국 조상이나 절대신을 모시는 신성한 곳이며 그래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살림집 안대청은 ‘집의 신’ 중 으뜸인 성주신을 모시며 농사로 거둔 곡물을 ‘집의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공간이다.

#내외부를 넘나들며 자연과 소통하는 경계가 없는 공간

요즘에는 마루라고 하면 그 단어의 의미가 대폭 축소되어, 나무로 덮인 방의 바닥 혹은 나무로 만든 바닥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 옛집에서 마루는 처마 밑이나 지붕 아래 있기는 하지만 벽이 없이 외부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내부와 외부의 중간적인 역할을 하는 무척 중요한 매개공간이다. 집의 안팎이 스스럼없이 통과하고 합쳐지는 우리 건축의 특성이 마루를 통해서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다시 말해 마루는 ‘전이적 공간’이며 경계를 넘나드는 ‘무변(無邊)적 공간’이다.

마루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대표적인 마루인 대청은 글자 그대로 큰 마루라는 뜻으로, 안채의 한가운데 있으며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하고 제사를 지내는 실질적인 집안의 중심이다. 대청의 상부에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벽장처럼 만들어놓은 벽감이 설치되기도 한다.

옛집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시원한 대청에서 경험했던 여름 한낮의 낮잠을 이야기한다. 대청에 누워서 여름 한낮에 태양이 작열하는 마당을 보고 있을 때의 적조함과 청량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나라 건축, 아니 우리 옛집의 가장 특별한 풍경이고 분위기이다. 그건 아마 대청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인 특성 때문이고, 또한 과학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정교하고 크기가 적당하여 미모와 덕성을 고루 갖춘 양갓집 규수와도 같이 단아한 양동마을 심수정 누마루.
일반적인 남향집으로 상정할 때 대청을 중심으로 태양이 내리쬐는 앞마당은 절대적인 ‘양’의 공간이다. 그리고 일 년 내내 햇볕이 비추지 않는 뒤처마 밑 응달을 가진 뒷마당은 절대 ‘음’의 공간이다. 기류는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즉 앞마당에서 뒷마당으로 움직인다.

대청은 일반적으로 남쪽은 전면이 개방되어있는 형태이고, 북측 벽은 아랫부분에 창문이나 문을 받쳐주는 머름을 세우고 그 위에 문틀을 끼우고 나무로 짠 바라지창을 단다. 열려있는 남쪽으로부터 북측의 좁은 창문으로 흘러드는 바람은 유입구와 유출구의 개방된 면적의 차이로 인해 속도가 더해진다. 그래서 대청에서의 바람은 더욱 시원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루 밑은 비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마루의 틈으로 바람이 올라온다. 좁은 틈으로 유입되는 바람 역시 속도가 붙어 더욱 시원해진다. 마루는 이렇듯 입체적인 바람의 설계가 이루어진 공간이다.

방에 들어가기 전 밟고 올라가거나 걸터앉을 수 있도록 문 앞에 달린 마루는 툇마루 혹은 쪽마루이다. 툇마루는 툇간에 설치된 마루로서, 툇간이란 집의 몸체 바깥으로 내민 기둥과 벽과의 사이 공간을 말한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쭉 이어진 툇마루는 외부공간이긴 하지만 집의 칸 수에 산입된다. 반면 쪽마루는 방안으로 출입을 편리하게 위해 내밀어 만든 작은 마루이며 툇마루와는 달리 칸 수에는 산입되지 않는, 면적의 측면에서 보면 부가적인 공간이다.

누마루는 일반적인 주택에서는 흔히 있는 방식이 아닌 무척 호사스러운 마루이다. 방보다 바닥이 올라간 고상식의 높직한 마루로, 그 가장자리에 난간을 두른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최소한 한 면 이상이 개방되어 있다.

뜰마루는 마루를 들일 수 없는 집 방문 앞에 놓인 평상을 이른다. 그리고 당연히 마당을 옮겨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포터블 마루’이다.

그리고 가막마루라는 마루가 있다. 이 마루는 대청이나 툇마루 등과 같이 위치나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루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을 지칭하는 특이한 마루이다. 예전에 보통 대갓집에서는 여자들은 안채에 기거하고 남자들은 사랑채에 기거하였다. 사랑채에는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결혼한 손자까지 같이 있었다. 보통 평소에도 어른이 택일을 해주어야만 부인과 만날 수 있었는데, 새신랑이 안채에 있는 새댁에게 어른들 몰래 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 쪽마루를 ‘가만히 건너간다’는 의미로 가막마루로 불렸다고 한다.

“한국 전통 주택의 마루는 두세 칸 집에서는 보기 힘들고, 네 칸 집의 전형적 구성인 부엌 온돌 마루 온돌에서야 등장한다. 마루는 방과 부엌 같은 필수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여유를 표현하는 사치 공간이자 외부공간과의 관계를 활발히 하는 정서공간이다. 또 어떤 용도로든 쓸 만큼 전용성이 큰 공간이며, 공식적 활동이 일어나는 공적공간을 대표한다”(전봉희, ‘한국건축 개념사전’ 중에서)

#비어있지만, 비어있기에 오히려 가득 찬 역설적 공간

옛집의 숫자만큼 집집이 다양한 마루가 존재한다. 병산서원 만대루에 덩실 떠있는 8폭 병풍 같은 누마루가 있고, 양동마을 심수정의 집 귀퉁이에 슬그머니 붙어있는 정교하고 크기가 적당하여 미모와 덕성을 고루 갖춘 양갓집 규수와도 같이 단아한 누마루도 있다. 또한 반듯한 마당에 정갈하고 품위 있게 넓게 펼치고 앉아있는 논산 윤증고택에 있는 대청마루도 있다. 우리는 그런 마루에 가서 기둥을 쓸어보고 바닥을 쓸어보며 앉아서 시간의 감각을 빼앗기고 일어나질 못한다.

반듯한 마당에 정갈하고 품위 있게 앉아있는 논산 윤증고택의 대청마루.
충남 옥천에 가면 이지당(二止堂)이라는 오래된 서당이 한 채 있다. 무척 빠른 국도의 속도에 정신없이 쓸려 달리다가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한적한 길로 접어든다. 큰 내를 옆에 두고 천천히 들어가면 건너편에 산에 박힌 듯이 서있는 긴 집이 한 채 눈에 들어온다.

이 서당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다가,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과 더불어 장렬하게 순국한 중봉 조헌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그리고 강에 면한 언덕배기 앞뒤가 좁고 옆으로는 긴 땅에 8칸으로 길게 앉혀 놓은 집이다.

그 집의 양끝에는 키가 다른 두 개의 망루 같은 누마루가 있고 가운데 6칸의 정연한 본채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며 더욱 자세히 보면 양쪽 누마루는 무척 거칠고 투박하며 비례도 특이하다. 정교하지 않은 난간과 누마루를 받치는 기둥들이 정연한 입면과 대조를 이루어, 매우 개성 있는 조형감각이 느껴진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누마루는 규모가 크거나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자연을 완상하고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거나, 서원이나 사찰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인 예식을 진행하는 엄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지당의 누마루는 조금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서원과 서당의 구분은 지금과 사뭇 다른 조선시대의 학제를 단순 비교하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 제향의 기능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서원의 누마루와 서당의 누마루(물론 누마루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는 굉장히 다르다.

제향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교육공간으로서의 이지당 누마루는 일반적인 누마루와는 다른 시야를 갖고 있다. 우선 1.5층의 누마루와 2층의 누마루는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통해 들어가야 하고, 올라가더라도 질박하게 나무를 엮어놓은 위험천만한 난간을 앞에 두게 된다. 이곳에 올라오면 허리를 펼 수 없을 것처럼 낮게 잡아놓은 천장에 엉거주춤 서있거나 앉아서 약간은 인색하게 펼쳐져 있는 프레임을 통해 자연을 만난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지만 절대로 긴장을 늦추거나 자세를 흩트리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누마루는 주요 공간에 붙어있는 단순한 부속공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위에 개입하고 일련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비어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가득 찬 공간이 되는 마루는 다양한 행사를 치르는 공적인 영역이자, 사람들 개개인이 자연을 한발 더 다가서서 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건축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멋과 향기를 지닌 오묘한 경계의 공간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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