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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75> 클리셰

입력 : 2013-06-20 22:07:46 수정 : 2013-06-20 22: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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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펜션 ‘언덕 위의 하얀 집’ 환상 복사
궁전 같은 국적 불명 결혼식장 추억 속으로
관공서 건물 과거엔 권위적 형태 지향
요즘엔 기능 떠나 ‘올글래스 건물’ 유행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환상을 가볍게 복사해서 지어놓은 서양식 목조 주택. 진부하지만 모두 좋아하는 대표적인 건축의 클리셰다.
#욕하면서 보고, 욕하면서 따라하는

영화나 연극에서 주인공이 위기에 몰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예상치도 못했던 천재지변이나 어디서 떼를 지어 나타나는 구원병들에 의해 상황이 종료된다. 이럴 때는 여태까지 몰입해서 극에 빠져 있던 관객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은 주인공조차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런 극적 장치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기계로 만든 신’이라고 풀이된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주로 사용하던 수법으로, 극이 전개과정에서 어찌 손을 쓸 수 없이 꼬일 때, 무대의 상부에서 기계장치로 작동되는 끈에 매달린 신이 내려온다. 신의 권능으로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해결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법이 요즘 우리가 보는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이야기를 무척 꼬아놓아서 대체 어쩌려고 저러나 궁금할 즈음, 마지막 한 회에서 인과율을 무시한 채 일거에 모든 갈등이 해결되어버리는…. 끝까지 숨을 죽이며 구경하던 사람들을 허무하게 하는 바로 그런 드라마들이 판을 치며 시청률 경쟁을 벌인다.

늘 인기를 얻는, 욕하면서도 꼭 본다는 그런 드라마들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이를테면 착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너그러운 주인공은(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 어려운 상황에서 꿋꿋하게 살고 있다. 그에겐 언제나 운이 따르고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도와준다. 또한 그에겐 (늘) 출생의 비밀이 있다. 아주 특별한 이유로 잃어버리거나 키우지 못했던 자식 생각에 문득문득 가슴 아파하는 부유하거나 대단한 권력을 가진 생부나 생모가 주변에 있지만, 그들은 쉽게 만나지 못해서 우리의 애간장을 다 녹인다.

주인공의 주변은 늘 사람들이 복닥거리고 가난하고 비좁고 어둡지만 사랑이 넘치고 정이 흐르는데, 주인공을 도와줄 여력이 없어 우리의 가슴은 더욱 아리다. 혹은 주인공의 평범한 배우자나 배우자의 가족이 속물근성을 드러내며 되지도 않는 이유로 구박을 하고 주인공을 밖으로 내몬다. 그런데 주인공은 배우자에게 버림을 받는 순간 갑자기 유능해지고 눈에 띄는 존재가 된다.

주인공의 라이벌은 언제나 유능하고 유복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하며 외모 또한 출중하지만 성격은 아주 나빠서 우리는 그를 보는 순간 화가 치민다. 그래서 우리는 손톱을 깨물며 분을 삭이면서, 매번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을 기다린다.

이때 갑자기 느닷없이 주인공을 좋아하고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재벌 2세나 성공한 기업가 혹은 전문직 종사자가 나타난다. 같이 등장하는 표독한 시어머니(예전에는 봉투를 내밀며 떠나라고 강요하는 정도였다면 요즘은 정신병원에 집어넣거나 심지어 죽이려 할 정도로 자극의 강도가 심해졌다), 호텔 커피숍에서 유리컵에 담긴 물을 얼굴에 끼얹는 절차가 빠질 수 없고, 어른 찜 쪄 먹는 영악한 어린이, 뜬금없이 웃기는 조연들이 간간이 등장하고 간단한 기억상실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갑자기 보이지 않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나 정말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용서와 화해가 조성되며 급하게 이야기는 결말을 맺는다. 모든 악인은 망하고 주인공은 그들을 용서하고 등 뒤로 희망에 찬 빛이 비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많은 신랑과 신부가 이야기 속의 왕자와 공주로 연출되기를 꿈꾸었던 시대 불명 국적 불명의 예식장들.
#진부하지만 환상을 주는 클리셰

이건 텔레비전을 틀면 흔히 나오는 드라마의 골격이다. 사람들은 그 골격에 외피만 약간 수정하고 밝기만 조금 조정하여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고, 그걸 모든 국민이 열심히 본다. 대부분 그 흐름을 알면서도 몰입해 보고, 충분히 예상을 했으면서도 새삼 놀라며 같이 흥분한다.

아주 진부하지만 준비된 감동을 선사하는, 사람들을 텔레비전 앞에 꽁꽁 묶어대는 아주 훌륭한 도구, 그것을 우리는 ‘클리셰’라고 한다. 포기하지 않고 반복되는 진부한 극적 상황, 혹은 극적 장치를 뜻하는 클리셰(Cliche)라는 단어는 원래는 출판 용어였다고 한다. 프랑스 말이며 인쇄를 할 때 사용하는 아연으로 만든 판을 말한다. 똑같은 판으로 찍어낸 듯하다는 데서 진부하다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드라마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끝날 즈음 어김없이 남녀 주인공은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황홀하게 입을 맞추고,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혹은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건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고 손뼉을 친다.

또한 로맨스나 무협 같은 장르소설 등은 대부분 일정한 틀 안에서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는 클리셰가 가장 큰 골격이 된다. 과거에는 복수, 원수의 주변인과의 사랑, 동굴 속에서 우연히 높은 무공을 얻는 기연 등이 주된 클리셰였다면, 요즘은 과거로 돌아가는 회귀나 환생, 시대나 차원 이동 등 판타지와 결합한 클리셰가 인기다. 그래서 대중소설 작가들은 클리셰를 적절히 배치하고, 그 틈새를 메우는 인물과 배경에 특색을 부여하면서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고, 독자들은 그 익숙한 구조에 늘 호응한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발명은 소수에 불과하다. 기존에 있던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변용시켜서 사용하면서 인간의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것이 끊임없이 일정한 틀 안에서 무의미하게 혹은 안이하게 반복되는 것은 때로는 참기 힘든 일이다.

예를 들자면 결혼식 때 주례 선생의 말씀, 햇볕이 따가운 월요일 오전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모두 그 이야기의 흐름과 내용을 얼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례사가 시작될 즈음, 훈화가 시작될 즈음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진부하기 때문에, 내용을 대강 알기 때문에.

클리셰의 정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우리네 결혼식이 아닐까 싶다. 모든 과정이 하나의 결정된 프로세스로 진행되며, 비슷한 포즈의 결혼사진과 비슷한 규모의 혼수, 비슷한 형태의 집안 다툼. 그뿐 아니라 20분에서 30분 정도의 시간 안에서 행해지는 예식 절차까지도 모두 하나의 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하다.

사람이 다르고 인생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지만, 결혼식만큼은 그 과정과 형태와 자세가 모두 판에 박은 듯 비슷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애초 지금의 결혼식의 형식은 어떤 근거가 있다거나 전통에 입각해서 정해진 것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양의 개신교식 결혼식과, 우리 전통 혼례의 형식을 겉모습만 가져다 적당히 섞은 것이다. 신랑신부와 하객들을 궁전처럼 생긴 예식장 안에 몰아넣고, 하루에 가장 많은 혼례를 치르도록 조합해 만들어놓은 ‘업자용’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예식장 사업이라는 것이 무척 전망이 좋은 사업이었다. 전국에 비슷한 형태의, 대부분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가 살 것 같은 성처럼 생긴, 혹은 시대·국적 불명의 건물이 여기저기에 솟아있었다. 많은 신랑과 신부가 그 안에서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속의 왕자와 공주로 연출되기를 꿈꾸었던 예식장들…. 그러나 이제는 ‘컨벤션 홀’이라는 형태로 바뀌거나 재개발되며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높은 건립비용과 까다로운 유지관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관공서의 클리셰로 거듭난 올글래스 건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용인시청, 서울 금천구청,대전 동구청, 서울 관악구청.
#건축적 클리셰, 전원 속의 목조주택 혹은 유리 건물 청사들

‘이발소 그림’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있다. 사실은 정식 회화의 유형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냉소가 들어가 있는 표현이다. 일군의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화가가 그린, 예를 들어 대부분 폭포가 있고 눈 덮인 산이 있고 넓은 호수가 있으며 그 안에 그림 같은 집이 있는 약간 조잡한 풍경화다. 그런 그림들이 동네 이발소 같은 대중적인 장소에 투박하고 가벼운 색채와 터치로 그려져 걸려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 그림에는 작가의 의도나 정신은 없다. 딱히 어떤 특정한 장소를 그린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막연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풍경을 그냥 직설적으로 그림으로 옮긴 것들이다. 그것을 현대회화에서 키치라는 개념이 사용되면서 즐겨 인용하거나, 때로는 그런 그림들을 장난스럽게 자신의 회화에 이식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런 의미에서 뻔하고 진부한 그림을 통틀어 ‘이발소 그림’이라 하고 ‘회화적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다.

건축에서도 그런 집들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는 환상을 가볍게 복사해서 지어놓은 국적과 건축적 양식이 모호한 서양식 목조 주택들…. 경사 지붕에 뻐꾸기 창이 달린, 나무인지 시멘트인지 비닐인지 멀리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사이딩(siding·가로 널로 붙이는 외부 마감재)을 두른 캐나다식이거나 미국식, 혹은 호주식의 집들은 어디선가 본 듯 친숙하다. 1990년대 무렵부터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산 중턱마다 혹은 논밭 한가운데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 그런 목조주택들이 메뚜기가 들판을 덮치듯 순식간에 우리의 시골 풍경을 점령했다.

사람들은 아파트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그런 모습의 전원주택이나 펜션을 짓는데, 대부분의 집들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패턴화되어 있는 내부가 있다. 현관을 열면 정면에 보이는 화장실 문, 훤히 개방되어 독립성은 하나도 없는 거실과 그 너머의 부엌, 우리는 그 집들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속을 뻔히 안다. 결국 아파트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건축적 클리셰다.

관공서나 공공 발주로 만들어진 건물들 또한 마찬가지다. 시청이나 구청, 법원 같은 관공서 건물은 늘 무뚝뚝하고 권위적이고 대칭을 추구하는 모습이었다. 문턱이 높고 일반인들이 들어서자면 입구에서부터 주눅이 드는 그런 건물들이었다.

그런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이된다. 공공청사들은 여러 명의 건축가가 제출한 계획안을 심사해 당선작을 뽑는 현상설계나 여기에 건설회사까지 합류하는 턴키 등의 공모에 의해 선정되는데, 70∼80년대 무렵의 관공서 건물은 약속이나 한 듯 돌로 지어지고 일정한 패턴의 창문들이 달린 형태를 취한다.

그것이 2000년대를 넘어오며 무겁고 권위적이었던 형태를 지양한다며 새로운 형태로 바뀌기 시작한다. 건물의 기능이나 상징성과는 연관을 찾을 수 없는, 전면을 유리로 뒤덮은 이른바 ‘올글래스 건물’들이다. 투명하거나 반사가 되는 전면 유리(all-glass)를 두른 고층 건물은 원래 내부의 쾌적성은 떨어져도 매끈하고 랜드마크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기업 사옥에서 선호되는 형태였다. 높은 건립비용과 까다로운 유지관리에도 불구하고 석양을 반사시키며 빛나는 유리 건물은 투시도나 조감도에서 유난히 돋보이면서 속속 공모에서 당선되어, 새로운 관공서의 클리셰로 거듭났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새로웠으나 아무런 비판 없이 복제되면서 건축적 클리셰가 되어버린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건축가들의 건물에서 한때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했던 건물의 옆구리를 관통하는 일자형 긴 계단, 무뚝뚝하고 차가운 느낌의 노출 콘크리트, 그리고 하얗고 네모 반듯한 평지붕의 박스형 건물들…. 따라잡고 싶은 욕망이 클리셰를 키웠다. 진부함에 대한 거부,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어느새 또 다른 클리셰가 되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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