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70〉 경복궁

입력 : 2013-03-26 18:29:22 수정 : 2013-03-26 18:29:2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우리나라의 정궁인 ‘경복궁’
전형적이고 권위적이지만
공간의 크고 작음 구사가 탁월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겸비한 궁궐
#제왕이 살던 공간

궁(宮)이란 글자는 제왕 등 왕족이 사는 규모가 큰 건물을 일컫는 말인데, 애초에 집을 이르는 말이었다. 기원전 10세기 이전의 문자인 갑골문을 보면 마치 지붕 아래 창문이 2개 있는 듯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궁 앞의 좌우에 설치되었던 높은 망루를 가리키는 궐(闕)과 합쳐지면 궁궐이 된다. 궁궐건축은 최고 지배층의 업무 및 생활공간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알다시피 서울에는 다섯 개의 궁이 있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대부분 전쟁을 겪으며 불탔다가 복원된 이력이 있고, 이중 경희궁은 거의 훼손되어 명목상의 이름만 남은 상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한국 사람과 한국 문화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능멸했다. 특히 임금이 살던 곳이고 국가의 상징인 궁궐은 가장 중요한 표적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일제가 동물원으로 바꾸어 희한한 동물들과 다양한 놀거리를 집어넣어 엉뚱하게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 했던(?) 창경궁이다. 더군다나 그곳에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를 잔뜩 심어놓고 봄이면 밤 벚꽃놀이를 하게 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뿐인가. 경희궁은 파괴한 다음 학교를 만들었다. 정문인 흥화문은 조선총독부가 1932년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해 장충단 건너편에 만든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의 문으로 쓰이다가,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의 정문이 되었다. 한참 후인 1994년 경희궁지에 돌아와 복원됐다.

궁궐 중의 궁궐인 경복궁도 정면에 덩치가 산만하고 견고한 돌 껍질을 두른 건물을 세워 앞을 가로막았다. 또한 영역을 축소하고 궁궐에 가득 채워져 있던 509동(6806칸)에 이르던 건물을 40여 동(857칸)만 남기고 모두 없애고 국적과 시간성이 모호한 의사 서양풍의 돌 건물들로 채워 넣었다. 4000여 칸은 공원을 만든다며 경매에 넘겨, 대부분 필동과 용산에 있던 일본계 사찰과 요정, 일본인 부호의 저택으로 팔려나갔고, 조선물산공진회(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일제가 병합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전국의 물품을 수집·전시한 대대적인 박람회) 개최를 이유로 근정전 전면에 있던 흥례문과 회랑, 자선당, 시강원 등 건물 15동과 문·담장·석재 등을 없앴다.

그 파괴의 꼼꼼함과 용의주도함을 보면, 가끔은 일본인들의 철저하고 근면한 업무 자세에 경탄이 날 정도이다. 침략하고 노략질하는 것도 저 정도면 거의 예술의 경지라는 생각이 든다.

경복궁은 우리나라의 정궁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한양에 도읍을 잡을 때 뒤로는 백악산을 베고 누워, 오른쪽에는 인왕산을 왼쪽에는 낙산을 발치에는 남산과 관악산을 두고 정남향으로 지은 궁궐이다. 매우 전형적이며 매우 권위적이지만, 공간의 크고 작음의 구사가 능란하여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궁궐이기도 하다.

#경복궁 자경전의 따뜻한 오후

나는 ‘경복궁 키드’다. 학창 시절 경복궁과 그 경내에 있던 중앙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을 열심히 다녔다. 딱히 놀러다닐 곳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버스 요금과 비슷한 입장료만 내면 되는 비용 대비 효용도 그렇고 평일에 늘 한적한 곳이라 그 고즈넉한 공간감이 좋아서였다.

건춘문에서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면 산뜻한 마사토(磨沙土·점성이 없는 하얀 흙) 마당이 나오고 돌로 만든 건물이 제일 먼저 나온다. 그 앞에 커다란 나무가 마치 그간의 사정을 우리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하는 듯 꺼부정하고 슬픈 몸짓으로 서 있었다. 멀리 예전의 조선총독부였고 그 무렵에는 중앙청이었다가 나중에 국립박물관으로 생을 마감한, 나중에 ‘허물자’ ‘보존하자’로 엄청난 토론과 격돌을 불러왔던 커다란 돌덩어리가 보였고, 당시 학술원으로 쓰였던 중앙청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 규모가 컸던 건물이 있었다. 그 뒤로 하늘을 다 덮을 듯한 지붕을 가진 근정전이 무지막지한 중앙청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경회루를 비롯한 몇 동의 건물이 겨우 남아 있긴 했지만, 경복궁은 바짝 마른 백설기처럼 푸석하고 여기저기 구멍들뿐인 처연한 모습이었다. 빈 곳 사이로 간혹 담이 나오고 간혹 매점이 나오고 간혹 나무가 나오지만 건물은 모두 어디론가 실려 나가고 없었다.

그 얼마 안 남은 건물들 사이에서 특히 내가 좋아하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자경전(慈慶殿)이라고, 향원정 조금 못 미쳐 빈터를 지나면 대문이 나오고 행랑채를 거느린 어떤 규모 있는 반가(班家) 같은 집이 하나 나온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누마루가 하나 덩실 떠있고 양편으로 기단을 높이 쌓고 건물을 세운 아주 단정하고 품위 있는 집이 보인다. 그리고 집을 따라 돌아가면 후원이 나오고 후원에는 십장생이 새겨진 무척 아름다운 굴뚝이 나온다.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왕위 계승자로 삼고 양모가 된 신정왕후를 위해 지어준 자경전. 단정하고 품위 있는 건물이다.
나는 경복궁에 가면 마치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대문 채를 지나고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로 갔다. 그러나 더 이상 들어갈 수는 없었으므로, 마루 끝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다 오곤 했다. 간혹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읽기도 했지만 왠지 그 안에 그냥 앉아있는 것이 무척 행복했다.

자경전은 고종의 양어머니인 우리에게는 조대비라고 알려진 신정왕후의 침전이다. 전체의 규모는 44칸인데 일반적인 반가처럼 집이 분산되어 있는 형식이 아니고 모두 모여 있는 형식이라 규모에 비해 그리 커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경복궁에 갈 때마다 자경전에 앉아 있었지만 한 번도 ‘넘어오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넘어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팻말 바깥쪽에 걸터앉아서 해를 쬐거나 건너편 행랑채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거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안이 너무 궁금했다. 마루에 앉아서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시험공부를 하던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평일 오후의 고궁은 정말 사람이 없고, 특히 경복궁에 오는 사람들도 주로 근정전이나 경회루 혹은 향원정을 거쳐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 옆에 황토색 타일로 외관을 두르고 있는 민속박물관으로 빠지지 절대로 자경전 쪽으로 오지는 않았다.

나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발을 벗어 손에 들고 팻말을 넘어 들어갔다. 마루가 있었고 복도를 끼고 방들이 마치 여러 겹 포개놓은 샌드위치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마루를 따라 들어가서 조용한 복도 귀퉁이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아∼ 여기가 이런 곳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오래된 나무가 뿜어내는 고동색의 냄새와 오래된 한지를 뚫고 들어오는 묵직하면서 약간 구수한 바람 냄새가 시원했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갑자기 불안해져서 다시 신발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관리인 아저씨가 마당에 서 있다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멍하고 있다가 아저씨가 “거기에 들어가면 어떡하느냐”고 했고, 내가 뭐 할 말이 있었겠는가. “죄송합니다, 너무 궁금해서 한번 들어가 봤습니다”라고 대답할밖에. 그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고 아주 순순히 훈방해 주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경복궁의 중건은 300여 년 만인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1865년부터 3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삶의 공간으로 함께 이어지길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를 보면 경복궁의 자리는 빙 둘러 담이 있고 네 개의 문이 있고 그리고 그 안에는 주춧돌과 풀로 채워져 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그 당시에는 잡초와 돌덩이들만 뒹굴던 폐허였던 것이다. 그 상태로 30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궁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막대한 돈과 막대한 인력이 필요한 실로 국가적인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복궁을 복원한 것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었다. 당시는 안동김씨의 세도가 아주 심했던 때였다. 영·정조를 거치며 왕들이 무척 경계했음에도 그들의 세도는 꺾이지 않았다. 풍양조씨 조대비(신정왕후)는 그런 정치적인 이유로, 후사가 없던 철종의 대를 잇는 왕위 계승자를 고를 때 인척 서열상으로 아주 후순위(15촌)였던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지명하고 자신은 수렴청정을 한다.

그리고 흥선군 이하응은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봉해지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펼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잇달아 내놓는다. 그중에 가장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사업이 경복궁의 복원 중창이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꿈도 꾸지 못했던 막대한 역사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과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으리라. 그때의 애환이 구전가요 ‘경복궁 타령’에 아주 잘 나온다.

“석수장이 거동을 보소, 방망치를 갈라 잡고 눈만 끔벅거린다. 도편수란 놈의 거동을 보소, 먹통을 들고 갈팡질팡한다.”

경복궁 복원은 당시의 모든 기술력이 동원된 엄청난 사업이었고 그 안에 구현된 건축과 조각과 조경 등의 내용은 아주 빼어난 조선 예술의 진수였다.

그리고 대원군은 조대비를 위해 자경전을 지어준다. 강녕전·교태전 등 정식 침전과 달리 좀 더 한가롭고 편안한 침전인 연침(燕), 즉 가정집 분위기의 침전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만세문을 통해서 자경전을 들어설 때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앙상한 가지를 활개치듯 뻗치고 있는 나무였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고 대단하게 집을 가리지도 않아서 그냥 보면서 지나쳤는데, 사실 그 안에는 심상치 않은 의미가 있었다.

자경전 입구에서 보이는 일제 때 심은 나무. 한국 건축에서 원래 마당에 나무를 심지 않는데, 그 이유는 대문에서 바라보면 한가할 한(閑)자가 되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의 전통적인 마당 조경에서 마당 한가운데나 정면에 나무를 심는 것은 크게 어긋나는 방식이라고 한다. 집안이 곤궁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네모난 마당에 나무가 들어가 있는 형상은 빈곤한 곤(困)자가 되고, 또한 그 모습을 대문에서 바라보면 한가할 한(閑)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정컨대 그런 의미론적인 이유보다는, 전통건축에서 건물을 배치할 때 절대 음지인 뒤꼍에서 절대 양지인 앞마당으로 기류의 이동을 유도해 집안의 온·습도를 조절하고, 햇빛을 하얀 마사토 마당에서 반사하여 집안을 환하게 비춰주는 자연 채광을 고려했던 방식을 비추어 볼 때, 마당의 조경은 여러 가지로 불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일본은 부수지 못한 건물에는 슬그머니 그런 정도의 어깃장이라도 놓아야 직성이 풀리고 불안감이 사라졌나보다. 그런 짓은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몇 년 전 ‘궁’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무척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역시 베스트셀러였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것인데, 우리나라가 공화국이 아니라 입헌군주국이라는, 즉 식민지 시절을 겪지 않고 왕조가 이어져 왕과 왕후, 황태자 심지어 상궁과 내관들까지 궁에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오만한 황태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 평범하고 명랑한 여고생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라 할 수 있었지만, 그 배경이 바로 ‘궁’이라는 공간이었다는 게 모든 이들을 열광하고 빠져들게 한 매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도 살지 않고, 그저 관광의 대상일 뿐이었던 궁을 사람들이 그득한 살아 숨 쉬는 삶의 공간으로 복원한 것은 무척이나 신선한 발상이었다. 궁궐과 같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담겨 있는 한국의 공간들이 그간의 고리타분하고 전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모두가 사랑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은 두 손을 들고 활개를 치며 반길 만한 일이다. 그곳이 슬픈 역사가 박제된 공간, 단순히 벽에 붙여놓고 감상만 하는 공간이 아닌 우리의 생활과 붙어 있는 공간이 되어, 살아 있는 역사를 같이 써나가는 그런 공간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간절히 기원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나연 '깜찍한 브이'
  • 나연 '깜찍한 브이'
  • 시그니처 지원 '깜찍하게'
  • 케플러 강예서 '시크한 매력'
  • 솔지 '아름다운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