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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5〉 존경과 행복의 건축

입력 : 2013-01-04 14:09:07 수정 : 2013-01-04 1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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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배려·애정 그 위에 ‘은근한 위계’를 세우다 #학교와 군대와 감옥의 공통점

간혹 내가 “한국의 학교와 군인들이 생활하는 병영과 사람들을 수감하는 감옥의 건축적 어휘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저항감을 표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물론 시설물을 만든 목적이 분명히 다른 세 건축물을 같이 엮는 시각이 불편하겠지만, 그 공간들을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목적은 감시와 효율이다. 각 공간들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나란히 놓고, 한 명이 여러 명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하며, 최대한 많은 인원이 들어가도록 만들어놓아 모두 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하다. 일사불란하게 나열되어 있는 그곳에는 어떤 차별성이나 특성도 없다. 그래서 그 안의 구성원들에게 학교나 군대·병원은 추억의 장소 혹은 아름다운 기억을 담은 공간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으로 남는다.

우리가 흔히 보는 많은 공포영화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공간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직설적이다. 그곳에서는 훌륭한 감시와 계도와 통제가 이루어지는 대신,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예의라든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감수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

특히 인간의 모든 심신(心身)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육의 장소인 학교가 가장 문제다. 공간들 간의 어떠한 존경도 없고 배려도 없이 그저 죽 나열되기만 한 곳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어떤 교류가 이루어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별다른 문제로 삼지 않으며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내가 20년 가까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학교들을 돌이켜보아도, 그 어떤 공간도 나의 감수성을 키워주었다거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심지어는 대학에서의 강의실마저 늘 비슷했다.

끝을 알 수 없이 긴 복도에 교실들이 모두 같은,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기다리는 그곳을 우리는 그 위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푯말이 없다면 찾아 들어갈 수 없다. 그 안에 줄을 정연하게 맞추어놓은 책상에 앉아서 모두 같은 방향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일 년을 시작하곤 했다. 심지어 건물 바깥으로 나서도 그늘도 별로 없는 황량한 운동장이 메마른 사막 같은 느낌만을 줄 뿐이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명문 학교로 진학해서 높은 연봉을 주는 직업을 얻기 위한 학문적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며 도덕률인 서로 배려하고 존경하는 마음과 자세이다. 존경(尊敬)은 어떤 개체가 다른 개체를 인정하고 그 존재의 의미를 존중하며 교류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는 것이다. 그건 어떤 거창한 다짐이 아니라 소소한 생활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인생 전반에 걸쳐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개념을 바탕으로 한 건축이나 공간 혹은 그런 사회 그런 도시에서, 사람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소수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강학 공간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공간들이 자유롭게 뿌려져 있다. 학생들의 공간인 학구재(정면)와 지락재(오른쪽)가 다소곳이 맞아준다.
#소수,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


서원은 교육의 공간이다. 서원이 생기기 이전에도 향교나 성균관 등 이를테면 공립학교 격의 교육시설들이 있었다. 그에 비해 서원은 사립학교의 성격을 가진 곳이고 지금으로 치면 대학 정도, 사회에 혹은 관직에 나오기 직전의 교육기관으로 보면 된다.

조선은 무척 독특한 정치적 시스템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왕은 있으나 왕이 신하에게 견제를 받는 나라, 사대부라는 새로운 계층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 사대부는 초야에서 공부를 하며 자신을 닦는(修己) 사(士)와 벼슬에 나가 세상과 사람을 다스리는(治人) 대부(大夫)를 합성한 말로, 혼란해진 고려 말기에 등장한 그들은 정치적인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며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그때의 사대부들은 두 개의 길로 갈린다. 한쪽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나라의 실권을 잡은 훈구파로 불리는 쪽이고, 한쪽은 선비로서의 대의와 충절을 중요시하며 정치에 나서지 않았던 훗날 사림으로 불리는 입장의 사람들이었다. 조선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시점 즉 세종에서 성종 시대를 거치며 초야에서 학문과 자신을 닦던 사림이 중앙정치무대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네 차례에 걸친 사화로 인해 많은 시련과 상처가 있었지만, 결국 사림의 입지는 공고해져 이후 조선을 주도하는 실권세력이 된다. 이상의 흐름은 우리가 흔히 아는 이야기이다.

사림은 성리학적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성리학을 체계화한 주자를 큰 스승으로 섬기고 안향에서 시작되어 이색과 정몽주를 거쳐 김종직 이황으로 이어지는 한국 성리학의 학맥을 잇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만든 곳이 서원이다.

지락재의 두 칸 마루에는 마당이 연장되어 담장 너머 아름다운 계곡으로 이어지고 풍성한 가을 단풍이 한 가득 담긴다.
주세붕이라는 사람이 풍기 군수를 지낼 때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을 먼저 만들고, 1년 후에 주자가 세웠다는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이라는 사설학교를 만든 것이 서원의 시초이다. 이후 그 서원은 퇴계 이황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당시의 왕인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된다. ‘소수’는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서원은 무척 널리 퍼지게 되었고, 지방 세력들의 인적·물적 산실이 되면서 비정상적인 권력이 행사되기에 이른다. 급기야 여러 차례의 정부의 제지를 거치다가 마침내 고종 대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요한 서원을 제외한 많은 서원들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소수서원은 부석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부석사는 해마다 가고 철마다 가다 보니 셀 수 없이 많이 갔던 곳이다. 그런데 정작 소수서원에는 가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정신없이 부석사로 달리다가 나올 때 들러야지 하다가는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들어가지 못했고, 더러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들어가 보고자 했더니 너무 일러 문을 안 열었었고, 혹은 공사 중이라 문을 닫아놓았고 해서 언젠가 들르면 되지 하면서 늘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그러다가 이번 가을에 반드시 가리라 마음먹고 풍기에 들어서자마자 소수서원부터 들렀다.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참 고적했다. 훤칠한 소나무들이 활활하게 서서 너울거리고 있었고 가을이 제대로 박힌 풀과 나무와 하늘이 자신들이 낼 수 있는 한 제일 아름다운 색을 내며 경쟁하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는 표현이 이 시기의 자연보다 더 적합한 경우는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
#존중하고 교류하는 마음, 존경을 담다


소나무숲을 지나고 작은 언덕을 끼고 살짝 돌아 들어가자, 조그만 정자가 보이며 소수서원의 영역이 시작되었다. 후기의 많은 서원들이 산을 끼고 높은 곳에 앉아서 커다란 누각을 앞세운 위세 가득한 풍모를 보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대신 경렴정이라는 아주 소박한 정자가 문 앞에 한 채 있을 뿐이었다.

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건물의 옆면이 나오는데 학생들이 강학을 하는 강당 격의 명륜당이다. 명륜당이 전체 영역의 반을 가르듯 한가운데 나타나고 좌우로 건물들이 그야말로 윷놀이 판에 윷가락을 뿌려놓은 듯 널려 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서원과는 사뭇 다른 배치에 조금은 당황했다.

비유하자면 창덕궁의 배치와 공간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비슷했다. 경복궁이 직교하는 좌표와 책에 나온 대로 정연하고 엄숙하게 만들어놓은 정궁이라면, 창덕궁은 땅의 흐름과 기운의 흐름대로 공간들 간의 상호 존중과 땅들끼리의 교감을 바탕으로 지어놓은 건물이다. 질서정연한 교회의 미사곡이나 형식미를 강조한 시에서 느끼는 감정과, 내재된 운율을 바탕으로 혹은 운율이 안에서부터 알처럼 박혀서 나오는 그런 시를 읽을 때의 감정의 대비와도 흡사하다.

소수서원도 내재된 운율과 자연의 흐름을 가장 큰 뼈대로 삼아 집을 구성해 놓았다. 그래서 처음 들어갔을 때는 당황이 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앞과 뒤와 옆과 그 흐름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땅의 흐름과 바람의 흐름, 사람의 움직임의 흐름이 섬세하게 굽이쳐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며 무척 푸근해진다.

가령 병산서원이나 도산서원 혹은 도동서원과 같이 서원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혹은 서원의 가장 좋은 예로 떠받들어지는 그 서원들을 보자면 모든 건물은 마치 무언가를 향해가듯 어떤 질서에 의한 정연한 배치와 일정한 리듬과 표정을 담고 있다. 공손하면서도 경건하고 또한 아주 맑은 기운이 느껴지고, 그 자세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감동을 한다. 한참을 올라간 후에 돌아섰을 때 서원 앞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에 놀라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서원의 모습이었는데 여기는 좀 다르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있는 명륜당을 끼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작은 건물 둘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나는 학구재이고 다른 하나는 지락재이다. 칸 수로 보면 둘 다 세 칸짜리 아주 작은 집인데, 지락재는 마루가 오른쪽으로 두 칸이 있고, 학구재는 마루가 가운데 한 칸 있다. 말하자면 서원 건축에서 위계가 낮은 편인 학생들이 기거하는 방이다.

보통의 경우 누각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가운데 큰 강학당 좌우에 아주 낮게 시립하고 있는 건물이 동재와 서재로 불리는 학생들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학생들의 공간으로 발길이 먼저 닿게 된다. 지락재의 두 칸 마루에는 마당이 연장되어 담장 너머 아름다운 계곡으로 이어지고 풍성한 가을 단풍이 한 가득 담긴다. 큰 스승들의 영혼과 엄격한 학문의 전당에서 느껴지는 기분이 아니고, 개인적인 혹은 무척 사적이고 은밀한 집의 공간에 앉아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빙 둘러가며 안향과 주세붕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장서각, 그리고 안향과 주세붕 등의 영혼이 쉬고 있는 문성공묘가 거의 같은 선상에 자유롭게 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도록 만드는 자유롭지만 엄정한 위계가 그 안에 있었다. 참 의아하면서도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원을 둘러보고 나오다 주세붕이 계곡 맞은편 바위에 경(敬)이라고 크게 새긴 각자를 보았다. 각자에는 붉은색이 칠해져 있었고, 그 위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백운동’이라고 이황이 새긴 글씨가 보였다. 시기적으로 주세붕이 새긴 뒤에 한참 지나 쓴 글씨겠지 싶다. 두 학자가 시간의 간격을 두고 새긴 글씨는 소수서원을 상징하는 무언가를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 넓지 않은 바위에 먼저 새긴 사람은 적당한 여백을 남겨 뒤에 오는 사람을 배려했고, 나중에 새긴 사람은 적당히 앞 사람을 넘어서지 않고 공생하려고 하는 마음을 담았다. 소수서원은 서로 배려하는 마음과 존경을 담은 집이었다.

혹자는 소수서원이 초기의 서원으로서 어떤 원칙과 규범이 생겨나기 전에 지어진 건물이므로 그런 자유로운 배치를 했고 위계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가 본 소수서원은 그런 위계를 뚜렷이 드러내기보다는, 즉 신분의 높고 낮음과 나이의 많고 적음이 엄존하는 교육의 공간에서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적당한 위치와 드러나지 않는 은근한 위계를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인간적이며 따뜻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는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했을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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