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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64〉 동방여행

입력 : 2013-01-11 10:00:07 수정 : 2013-01-11 10: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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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현재를 빚은 과거, 내일을 만들 오늘이 거기 있었다 # 이스탄불, 동방여행의 시작과 끝

유럽인의 입장에서 볼 때의 머나먼 동쪽 대륙, ‘동방’을 다녀온 여행기라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 효시일 것이다.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는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서아시아·중앙아시아를 거쳐 원나라의 상도에 이르러, 쿠빌라이에게 관직을 받고 지내면서 중국 각지를 여행하다 1295년에 베네치아로 돌아온다. 그는 귀국 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다. 1298∼1299년에 제노바 감옥에서 루스티첼로에게 자기의 동방여행 경험을 구술하여 필기하도록 한다. 오류와 과장된 부분이 많지만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동방 지역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담았고, 이후 높아진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동방여행기’를 알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11년, 독일 베를린에 있는 페터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던 스위스 출신인 스물네 살의 건축학도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는 친구 오귀스트 클립스탱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출발하여 보헤미아와 세르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를 거쳐 터키와 그리스를 횡단하는 긴 여정은, 지금처럼 아스팔트 위나 하늘 위가 아닌 먼지 날리는 흙길과 벼룩이 득시글거리는 배 안에서 이어졌다. 배를 타고 도나우강을 따라 내려오며, 혹은 기차·마차를 타거나 노새의 등에 올라타고 유랑하며, 그 젊은이는 ‘햇빛 아래 형태들이 벌이는 찬란한 유희이자 영혼의 긴밀한 체계인 그곳의 건축’을 발견하면서 여행 일기를 쓴다. 일기에 여행하며 느낀 인상을 기록하고, 많은 데생도 남긴다. 그는 데생을 하면서 사물을 보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다.

그는 그때 기록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서 한 지방 신문에 실었다. 이후 기록을 분류하고 다듬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든다. 이 책은 1914년 ‘동방여행(Le Voyage d’Orient)’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책 출간은 난관에 부딪혔고, 원고는 그의 서재에 계속 쌓여 있게 된다. 여행을 하고 54년이 흐른 뒤, 그는 마침내 젊은 시절의 망설임과 발견의 증거인 이 책을 출간하기로 결심한다. 1965년 7월, 그는 다른 자료는 참고하지 않고 원고를 수정하고, 세심하게 주석을 붙인다. 설명이 필요 없는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이 바로 그렇게 해서 태어나게 된 책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7주를 머문 이스탄불은 중국에서 출발한 실크 로드의 종착지였다. 도시가 형성된 기원전 660년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렸으며, 서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 되었다가, 1453년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해 점령되면서 오스만제국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무대가 된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종착지도 이곳이다. 크리스티는 이스탄불의 페라팰리스 호텔 411호에 머물며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 두 대륙에 걸친 도시 이스탄불, 그 낯선 땅에서 낯선 시간을 만나는 경험은 이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과연 어떤 영감을 준 것일까?

# 터키, 시간을 거슬러 찾아간 낯선 땅

나는 공교롭게도 올해 휴가를 터키로 가게 되었다. 이를테면 내게는 ‘서방여행’이 된 셈이다. 2009년 가을 이후 3년 만에 휴가를 얻은 것이다. 보통 여름에 바캉스로 떠나는 휴가에 사람 구경만 하는 게 싫어서, 되도록이면 날이 좋고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가을의 적당한 시점에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휴가라는 게 남들 갈 때 가야지 나만 따로 가려고 하니, 일이 잡고 사람이 잡고 여러 가지 행사가 잡아서 매년 벼르다 시기를 놓치곤 했다. 이번에는 아예 빼도 박도 못하게 6개월 전에 예약을 해놓고, 한 달 전부터 사방에 나를 찾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요란스럽게 다녀왔다.

특별히 터키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왕 해외에 나갈 거면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과거와 현재를 망라하는 다양한 건축을 볼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지만, 어떤 인연의 끈이 작동을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터키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군부 독재 시절 휴가를 받은 모범수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욜’이라는 영화와, 이을용이 몸담았던 축구팀이 있었던 트라브존이라는 동네 이름과, 빨간색의 터키 국기 정도밖에 없었다. 산발적으로 주워들은 정보들은 들쑥날쑥해서 터키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없었다. 

성 소피아 성당. 비잔틴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2∼537년에 지름 33m, 높이 56m의 돔을 중심으로 하여 로마의 아치 기술과 동방의 돔형 건축 기술을 조합해 세운 놀라운 건축물이다.
다만 터키 땅의 면적은 우리보다 3.5배가 넓으며 그리고 무수히 많은 문화와 인종과 문명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 또한 트로이가 그곳에 있으며, 성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얼추 들었다. 얼마 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 덕에 알 듯 모를 듯한 터키의 골목 이야기도 읽었다. 그렇지만 터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그리 긍정적인 편은 아니었다. 왜인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서구문명 외의 다른 문명은 슬쩍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상한 습관이 있는데, 우리 스스로 그 안에 있으면서도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인데도, 왜 그런 태도를 갖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난생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별다른 의문도 없이, 꼭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세상사에 휘둘리다 사전지식이나 여행에 대한 일정을 전혀 체크하지 않고 떠났다. 밤 비행기로 출발하며 중간에 어딘가를 들른다는 정도로 알고 갔는데, 타면서 보니 비행기는 우즈베크항공이었고 7시간쯤 열심히 날아 컴컴한 새벽에 타슈켄트공항에 도착했다. 말로는 표현이 잘 되지 않는 이를테면 밥상 위에서 삼일 정도 놓여 있느라 수분을 다 날려버린 백설기마냥 아무런 감동 없는 좁고 팍팍한 공항 대기실에서 5시간 동안 그냥 앉아만 있다가, 다시 4시간 반 동안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가는 참으로 묘한 여행이었다. 서쪽으로 날아가다 보니 해는 계속 우리의 뒤를 쫓고 우리는 냅다 반대방향으로 피해 가고 있었다.

내가 겪은 밤 중 가장 긴 밤을 보내고, 결국 해에게 따라잡힌 것은 터키에 거의 다 닿았을 무렵이었다. 분명 20시간의 밤을 보냈건만 이스탄불에 도착한 시간은 고작 아침 아홉 시였다. 아침의 찬란한 햇빛이었지만 나의 오래된 시간의 감각은 그 빛이 아침의 햇빛일 리가 없다며 내게 시간의 보정을 강하게 지시했다. 나는 그 빛을 기울어져 가는 오후의 햇빛으로 자꾸 인식하고 있었다.

본래 시간은 선적인 진행을 하고 우리는 그 선 위에서 정연하게 인생의 색을 칠하고 그 칠을 도로 자연에 넘겨 희미해지며 생을 마무리한다. 시간은 되돌려지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그런 강한 믿음에 대한 심각한 혼란에 빠지며 여행은 시작되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불편하지만 느긋했던 100년 전의 여행과 달리, 이스탄불에서 시작해서 앙카라를 거쳐 고대 지하도시와 동굴 수도원이 있는 카파도키아, 온천과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이 있는 파묵칼레, 세례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머물던 기독교의 성지이자 에게해 연안의 100여개 고대 그리스 도시 유적 중 가장 대표적인 장소인 에페소·트로이 등을 불과 일주일 만에 차례로 들러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여정은 모든 것이 아쉽기만 했다.

# 폐허 너머로 보이는 오래된 진실을 만나다


공항에서 관광 버스를 타고 아침의 분주함이 가득한 이스탄불 시내를 지나, 중간중간 다양한 시간이 층을 이루며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다니는 시가지를 파고들어, 로마시대에 만들었다는 푸석한 담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 좁은 길이 나오고, 곧바로 하늘로 날카로운 침을 곧추세운 미나렛(Minaret·이슬람 신전에 부설된 높은 탑, 아랍어로 ‘등대’라는 뜻)들이 보였다. 그리고 미나렛 아래로 마치 음식을 담아온 둥글둥글한 뚜껑 같은 덮개들이 보이고 바로 성 소피아 성당이 보였다.

처음 찾아간 곳은 예전에 투르크의 술탄이 살았던 궁(톱카프궁전)이었다. 언덕을 조금 올라 마치 시간의 문을 들어서는 것처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쌓여 있는지 측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햇살이 무척 강하고 명랑했다. 안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득시글거렸고, 궁전의 공간들은 의외로 밝았고 의외로 얕았다. 신비주의에 휩싸인 왕은 그 안에 깊숙이 숨어있었다고 했다. 잠깐씩 틈을 보여주는 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보기에는 그저 한강 정도 되는 폭인데, 그곳은 바다였다. 파도가 없어서인지 집들이 바다에 바짝 붙어서 마치 물 위에 지어진 듯 둥둥 떠 있었다.

이스탄불을 떠나자 얼마 안 되어 황량한 흙더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흙더미는 황무지가 아니라 가끔 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다. 지평선이 펼쳐진 너른 들에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들과 산이 아무런 완충 없이 이어진다. 또 한참 지나자 다시 나무 한 그루가 있는 풍경이 연속되고 있었다. 몇 시간씩 달리는 그 길은 때로는 실크 로드의 일부이기도 했다. 곳곳에 ‘카라반 사라이(Caravanserai)’라는 옛 대상들이 쉬던 숙소가 잔해로, 혹은 성채처럼 다부지게 서 있었다.

여행의 막바지, 에게해 연안으로 향하며 이오니아의 고대도시인 에페소스(Ephesos)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 거대한 폐허를 만났다. 에페소스는 그 기원이 무려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전 11세기 말경에는 초기 그리스 문화가 발달했고 기원전 6세기부터 페르시아,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더대왕의 영토로 편입되어 헬레니즘 문화·로마 문화 등이 교차했던 지역이다.

수많은 사람의 발길에 닳아 반들반들해진 대리석 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스쳐간다. 시민들이 모이던 아고라와 그들이 의견을 발표하고 연극공연을 하곤 했던 소극장 오데온,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대형 야외극장, 하드리아누스제의 신전, 아케이드 형식의 상점가, 화려한 모자이크로 바닥 포장된 고급 주택가, 손 씻는 공간과 분수까지 마련된 공중화장실, 심지어 사창가의 흔적까지 남아 있어서 마치 조금 전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듯 생생했다.

내리막길의 끝에서 야외극장으로 꺾어지기 전, 두루마리 1만20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장서를 보유했다는 켈수스 도서관(Celsus Library)이 나타난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스렸던 2세기의 유적으로, 코린트식 열주들이 도열한 그 입면은 숨이 막히고 할 말을 잊도록 만드는 이 폐허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르 코르뷔지에나 루이스 칸이나 안도 다다오 같은 건축가들은 모두 고대 도시의 폐허를 보고 건축의 큰 영감을 받았노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막연히 폐허의 느낌, 그 적막함이 주는 어떤 독특한 슬픔을 포함한 감성이 사람의 근원적인 어떤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이나 그리스 도시국가의 폐허들을 가지고 있는 터키의 여러 도시를 지나면서, 그들이 받았던 영감이 그런 애상이 포함된 단순한 감상이 아닐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마치 우리가 서쪽으로 향하며 거슬렀던 시간의 흐름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발로 엮인 덩어리가 된 시간이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그 강력한 느낌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파르테논 신전 계단에서, 우리는 그 너머의 바다와 오래된 진실을 본다. 나는 이십 대고, 더 이상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중에서)

임형남 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작은 집, 큰 생각’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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