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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리각미술관 이종각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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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3-24 17:56:39 수정 : 2014-02-20 17: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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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代 노구에도 예술혼 불태우는 ‘영원한 청년 조각가’
지독한 가난과 색맹 장애 이겨내고
국내 2세대 조각가그룹 거장으로
‘경희인의 상’ 공모 당선 계기로
경희대서 퇴임까지 33년간 후학 지도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국내 2세대 조각가 그룹의 거장으로 우뚝 선 사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소년은 색맹이라는 장애를 딛고 55년 동안 조각에 심취해 우리나라 조각계에 모더니즘 정신을 불어넣었다.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선정한 한국현대미술가 100인 중 한 사람이 됐다. 24일 만난 ‘리각 미술관’ 이종각(76·전 경희대 미대학장) 관장은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젊은 작가 못지않게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어 영원한 청년 조각가로 불린다. 일제시대와 전쟁을 겪은 추상조각가로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창작의 시간에 있고 싶다는 이 관장의 예술혼에 불타는 삶의 궤적을 살펴본다.

◆홀어머니와 단둘의 어려웠던 시절

1937년 충북 옥산에서 태어난 이 관장은 5살 때 충남 천안으로 이사와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와 나무타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강아지 그림 한 점을 그렸는데 훗날 유명화가가 된 친구와 교사로부터 “누가 그려준 그림일 것”이라는 오해 가득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홀어머니와 단둘이 가난을 견디는 게 우선이었다. 변변한 화구조차 없어 연필 몇 자루로 그림 공부를 독학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극빈자 학비면제 혜택으로 천안중학교를 졸업했고 천안농고에 진학해서는 수업료를 내지 못하자 교장이 수업료로 그림을 받아줄 정도였다. 수업료 대신 그림을 받아줬다니 재능과 가능성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어려운 형편에 어머니는 든든한 힘의 원천이었다. 어머니는 “그림 그리면 밥 빌어먹는다”는 당시의 사회적 편견에도 언제나 아들이 꿈을 이루길 응원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리각 미술관의 소나무에 수목장된 상태로 아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

이종각 관장이 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색맹 판정으로 화가에서 조각가로 꿈 바꿔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54년 천안문화원이 공모한 포스터 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한껏 기운을 뻗쳤다. 이를 계기로 미대 진학을 결심하고 회화공부에 몰두했다. 잠시 혼돈의 시기도 있었다. 미대 입시를 위한 신체검사에서 ‘적록색약자’로 판정받았을 때였다. 화가에게 색 구별은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때 힘이 돼 준 게 스승들이었다. 교장과 담임 선생님이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이 불후의 명곡을 남긴 것처럼 너에게도 미술에 재능이 있기에 색약이라는 단점을 안고 있을 것”이라며 “회화가 아닌 조각을 전공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1957년 홍익대 조각과에 진학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당장 먹고 살기조차 힘든 시절이라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했다.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할 형편에 놓였는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새로 지은 대학본관 4칸의 벽에 부조작품을 만들면 한 칸의 작품을 한 학기 등록금으로 쳐서 2년간의 등록금을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떤 역경에도 조각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뇌게 됐다. 밤늦은 시간까지 본관건물에 부조작업에 몰두했다. ‘인간가족’이란 제목의 이 시리즈물 일부였다. 부조작품은 본관이 도서관으로 바뀌면서 훼손되고 말았는데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한다.

빛나는 재능이 가져다준 기회는 학창시절로 끝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병역의무를 마친 1963년 반도화랑을 운영하는 이대원 전 홍익대 총장의 도움으로 ‘용접인체 조각’들을 전시했다. 전시장을 찾은 미국인 화상(畵商)이 작품의 매력에 빠져 1965년까지 2년 동안 매달 1500달러를 지급하고 50개씩의 작품을 구입했다. 원화 대비 달러 가치를 감안할 때 2년 동안 벌어들인 3만6000달러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이때 모은 수입과 현대화랑·호암아트홀 등 유명 화랑에서 팔린 작품은 ‘리각 미술관’ 건립의 밀알이 됐다.

용접인체 조각 납품이 끝나고 동북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겠다는 생각에 1년 3개월 동안의 짧은 교직 생활을 접었다. 이후 은사의 추천으로 1969년 경희대에 강사로 출강했다. 경희대에 출강을 시작한 이듬해인 1970년은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경희대는 설립 20주년을 맞아 ‘경희인의 상 건립’ 공모를 했는데 이 관장의 출품작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당선작은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을 누비는 모습의 ‘팔선녀’를 표현한 대형 소조(청동) 작품이었다. 경희인의 상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기념사진촬영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시간강사에서 조교수로 임명됐다. 이 관장은 이후 2003년 퇴임 때까지 33년간 경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리각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인 이종각 관장의 1998년 작품 ‘응축형의 변주’
◆덴마크 왕립미술학교 유학


1970년대는 우리의 미술이 본격적인 현대미술로 탈바꿈하는 시기였다. 조각분야는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종각은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창작활동에 매진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레일 연작’ 등의 작품을 통해 기술적 형상화에 몰두했다. 새로운 장착세계로 나아가지 못해 갈증을 느끼던 그에게 1979년 조각가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기회가 찾아온다. 덴마크 정부 초청으로 왕립미술학교에서 유학하게 된 것. 1년 동안 덴마크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조각작품과 개인미술관을 방문하면서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받고 새로운 창작조각 세계를 향한 화두를 깨닫는다.

“조각계의 거장 부랑쿠시가 밤나무로 만든 작품을 접했는데 쩍쩍 갈라져 커다란 틈새가 벌어진 그 작품이 전혀 흉하지 않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요.”

이종각은 1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확산공간’과 ‘응축형의 변주’라는 명제를 고집하며 국내 조각계에 모더니즘 정신을 불어 넣었다. 1984년 한국미술관과 갤러리 현대에서 열렸던 개인전은 평론가 이일, 이경성 등 한국미술 평단 대부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개인미술관 건립의 꿈도 유학시절에 비롯됐다.

“노르웨이 스톡홀름에서 ‘밀레의 정원’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죠. 이런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개인 미술관으로 시작해 언젠가는 많은 사람이 찾아올 수 있는 그런 미술관….”

리각 미술관 실내 전시공간 모습.
◆개인 미술관 건립

이 관장은 1987년 충북 옥산에서 작업실 겸 전시 공간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1994년부터는 고향인 천안에서 본격적으로 개인미술관 건립에 나섰다. 태조산 중턱에 위치한 미술관은 이 관장과 아들 부자가 15년 동안 땀과 정성을 쏟아부어 2008년 ‘리각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미술관은 조각가 이종각 관장의 예술적 열정과 성취를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념적 성격의 미술관과, 서울의 문화집중 현상을 보완하고 그러한 현상에 대안적 성격을 갖는 ‘지역’의 현대 미술관이라는 설립 의의를 지니고 출범했다. 야외조각공원과 실내전시공간을 활용해서 다양한 현대미술의 실험들을 담아내고 있으며 작품을 넘어 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한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구현하는 문화센터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미술관은 야외 조각공원 1만5700㎡(4750평), 지상 2층의 실내전시 공간 850㎡(260평)로 구성됐다. 이름 전체를 딴 이종각 미술관 대신 성씨와 이름의 끝 자를 따 부드럽고 리듬감이 있는 ‘리각’으로 명명했다.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인 ‘응축형의 변주’를 비롯해 이 관장의 1970년대 초기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 1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연간 방문객은 2만여명에 이른다.

“조각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문화쉼터가 됐으면 좋겠어요. 미술관 운영 프로그램을 다양화하고 이곳이 현대미술의 실험무대로 활용돼 대한민국 미술계의 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1년에 1개의 작품은 만들어야 하겠지요. 삶이 마무리되는 순간도 작업실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천안=김정모 기자 race121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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