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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를 통해 본 한국문화] ⑮ 한국의 최고 브랜드 태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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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9-23 01:50:31 수정 : 2009-09-23 01: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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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발차기로 세계무술 주역으로 ‘우뚝’
광복 후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태권도’만한 것은 없다. 태권도는 한국의 무술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신을 상징한다. 태권도 경기 용어는 한국말이다. 따라서 세계 태권도인은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 세계인에게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아마도 태권도의 보급물결을 탄 덕일 것이다. 그래서 ‘태권도=한국=한글’은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런데 태권도의 원류를 보면 일본의 공수도(空手道·당수도, 가라테)를 비켜갈 수 없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국내에 들어온 무술인 공수도를 우리에 맞게 토착화하여 세계적 브랜드로 내놓는 데 성공한 것이 태권도이다.

◇세계 태권도의 요람인 서울 역삼동 국기원의 정문.
문화적으로 보면 이보다 통쾌한 것은 없다. 태권도의 원류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고대의 전통무술에 그 뿌리를 갖다 대는 것은 차라리 콤플렉스의 소산이다. 그것보다는 공수도를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여 확대재생산한 것이라는 편이 훨씬 자랑스러운 태도이다. 일본은 한국의 김치를 일본의 ‘기무치’로 개발하여 세계적인 상표로 만들지 않았는가. 문화란 원조가 어디냐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개발하고 시대에 맞게 창안하여 지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 태권도와 일본의 공수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만큼 태권도인은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 당수도서 비롯한 공수도

태권도는 한국의 어떤 문화항목도 해내지 못한 세계화, 국제표준화를 한국인이 주도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권도 무예인은 찬양받아 마땅하다. 한국의 철학, 과학, 역사, 정치, 가요, 그 무엇이 태권도만한 일을 했는가. 말만 ‘선비문화’라고 떠들어대지만 우리의 학자들은 세계 시장에 태권도만한 ‘브랜드’를 내놓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심기일전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의 인문학, 지식 엘리트의 수준은 아직 외국의 것을 베끼거나 추종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외국 오리지널(original)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부류도 있다. 최근 들어 대기업군이 세계적으로 도약하면서 삼성, 현대, LG 등이 한국의 기업브랜드로 정착되어 가고 있지만 십여년 전만 해도 태권도가 유일한 브랜드 종목이었다.

◇극진 가라테를 창시한 최배달 선생.
공수도의 손기술 중심을 태권도의 발기술 중심으로 이동한 것은 참으로 한국의, 한국에 의한, 한국을 위한 이동이었다. 태권도는 물론 손발 두 기술의 복합이지만 현란한 발기술은 세계 무술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최근 태권도의 경기체육화로 인해서 무술로서의 태권도 면모가 상실되고 변질되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동안 태권도인은 불모지의 한국무술에서 신천지를 개척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기업들이 외국으로 가기 전에 태권도인은 간호사와 함께 제일 먼저 외국으로 진출했다.

한국 교민들은 태권도 도장과 교회를 중심으로 교민사회를 넓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권도가 미국 독일 등 구미와 이란 이라크 등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 심신수련의 무술체육으로 소개된 것은 광복 후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 구미나 후진의 아프리카가 동시에 한국의 태권도로 어린 2세들의 건강한 몸과 정신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이룩한, 공자(孔子)의 업적보다 더 탁월한 것일 수도 있다. 태권도는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무술축제’(충북 충주)를 주최하고 태권도의 종주국답게 ‘태권도 공원’(전북 무주)을 조성하는 바탕이 됐다.

태권도는 권법(拳法)이다. 이들은 맨몸으로 하는 무예이며 스포츠이다. 권법에는 무예를 하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권법이 있고, 권법 자체가 목적인 것도 있다. 또 권법에는 무예에 가까운 것도 있고 놀이에 가까운 것도 있다. 맨몸으로 하는 무예가 이 땅에 유행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무기를 규제하고 배제토록 강요하는 강대국 혹은 식민 지배국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맨몸으로도 무기를 든 사람들과 싸울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들 두 무예의 공통점은 발을 사용하는 것이다. 바로 이 발에 우리의 무예의 강점이 있다는 것은 세계가 이미 증명한 바이다.

무예에서 손이 발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무기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발은 아무리 잘 사용해도 무기를 잡을 수 없는 핸디캡이 있다. 그러한 발을 가지고 세계적인 무술로 만들었으니 다른 어떤 것보다 입지전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발의 무술’은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이 개발할 수 있는 최고의 무술임에 틀림없다. 태권도는 한국의 몸이고 한국의 혼이다. 발은 또한 땅을 디디고 있으니 참으로 착실한 것의 제일이고, 겸손한 것의 제일이고, 순수한 것의 제일이다.

우리 민족의 몸짓은 손짓보다는 발짓에 더 무게중심이 가 있다. 손짓은 발짓의 보조이다. 이를 ‘발구름 놀이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태껸이라는 것도 실은 발구름 놀이의 대표적인 것이다. 널뛰기도 그렇고, 제기차기도 그렇고, 씨름도 하체중심의 발걸기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 한국에서 구기종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축구이다. 한국인이 동아시아에서 축구를 제일 잘하는 것은 바로 축구가 발의 스포츠이고, 동시에 골키퍼라는 수문장에게 승패의 비중을 주는 ‘수비지향적 경기’인 것과 관련이 있다. 이는 야구가 피처 중심의 ‘공격지향적 경기’라는 것과 대조적이다.

오키나와에서 기원했다는 공수도(空手道) 혹은 당수도(唐手道). 그것이 한국에 접목되더니 잠시 태수도(跆手道)로 변하고 다시 태권도(跆拳道)가 되었다. 손기술에서 발기술로 중심이동을 하더니 어느 날 세계적인 무예 혹은 스포츠가 되었다. 이만한 속도와 내용으로 세계를 정복한 무예의 예는 없다. 태권도는 해방 전후 최홍희(崔泓熙) 등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들어온 공수도, 즉 가라테가 1955년 태권도로 개명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태권도는 ‘태껸’과 ‘태권’의 발음의 격의적(格義的) 통합, 그리고 발의 기술이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최근 태권도공원 기공식이 열린 무주 마크가 달린 태권도복을 입고 있는 문대성 IOC 선수위원.
1960년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동양 무술의 대표는 가라테(空手道, Karate)였다. 태권도는 그 그늘에 있었다. 월남파병은 태권도가 세계적으로 발돋움하는 신호탄이었다. ‘한국(따이한)=태권도’라는 등식은 월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상륙하였다. 태권도는 미국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 ‘코리안 가라테’라는 이름을 써야 했다. 가라테가 미국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가라테의 영웅 오야마 마쓰테쓰(大山倍達)의 카리스마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전북 김제 출신의 최영의(崔永宜, 1922∼1994)였다. 태권도가 가라테의 이름을 빌렸듯 그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게 식민지의 굴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일본 이름에는 한민족을 나타내는 ‘배달(倍達)’이라는 두 글자가 숨어 있다.

최영의는 1937년 야마나시 군관학교에서 가라테(松濤館 계통)를 배우기 시작하여 동경의 척식대학의 학생이 되었다. 이즈음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후나고시 기친(船越義珍)의 사설도장에서 2년여간 배운다. 1947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열린 전후 최초의 무도대회 가라테 부문에서 우승한다. 한국 무예인의 피가 폭발한 것이다. 이듬해 뜻한 바가 있어 지바(千葉)현 남부에 있는 기요즈미(淸澄)산에 들어가서 좌선과 무술수련을 겸한 뒤 자신의 가라테를 정립하고 1951년에 문명세계로 돌아왔다.

그의 영웅담은 부지기수이지만 황소 52마리와 맨손으로 싸워 그중 36개의 소뿔을 잘라버리고 세 마리를 즉사시켰다. 1954년에는 ‘블랙 코브라’라는 별명을 가진 타이 킥 복서를 1회 2분 만에 턱을 으스러트려 버렸다. 드디어 그는 1961년 가라테를 동양의 선(禪)과 접목하여 자유롭고 거친 구미테(組手)를 강조하는 ‘극진회(極眞會)’를 창립하였다. ‘극진 가라테’는 아마도 인간이 개발한 가장 강력한 무술의 종합일지도 모른다. 그는 만화 ‘바람의 파이터’(만화가 방학기의 작품이다. 2004년 양윤호 감독, 양동근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의 주인공이다.

가라테는 본래 일본의 무술이 아니다. 가라테는 오키나와 무술인 당수도(唐手道)였고, 그 당수도는 중국(인도 발생설도 있다)에서 전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수도는 오키나와가 일본 막부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이것을 일본말로 가타나가리, 즉 ‘칼사냥’이라고 한다) 살기 위해서 빈손, 즉 공수(空手)로 대적하기 위해 생존적 몸부림으로 발전시킨 무술이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통합된 것은 1879년(琉球處分)이며, 그 이전에는 일본과 중국에 번갈아가며 조공을 바친 독립국가였다. 위도로 보면 중국 푸젠성이나 대만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당수도의 ‘당’(唐)자가 같은 발음(唐=空=가라)의 공수도(空手道)로 변한 것이다. 무예라는 것도 문화의 일종으로 전해지고 변하면서 생성소멸을 거듭하는 것이다.

일제 때 우리나라에 심어진 일본의 가라테는 1960년 이후 한국의 태권도로 급속도로 진화한다. 가라테가 태권도가 되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일화가 있다. 1952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한해 전, 제1군단 참모장이었던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당수도 시범단의 시범을 보이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맨손으로 13개의 기왓장을 일격에 완파해 버리는 것에 감명한 나머지 국군에게 이 무술을 익히게 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태껸이구먼!”이라고 한마디 던진다. 이게 당수도가 태권도로 둔갑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의 전승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분명 성장하는 과정에서 태껸을 보았고, 그래서 그 비슷한 동작을 하는 권법을 ‘태껸’으로 보았던 것이다. 문화는 쉽게 사라질 것 같지만 부활의 실오라기 같은 기회만 얻으면 되살아나는 법이다.

월남 파병 계기로 본격 도약

그때 당수시범은 ‘태껸’의 발음을 회복하는 실마리가 되었으며 결국 ‘태권(跆拳)’이라는 격의명사를 탄생한 채 ‘태권도’(跆拳道)로 거듭나게 되었다. 한국문화의 전승에서 글자보다는 발음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엔 또한 발(足)을 중시하는, ‘무기를 들 수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문화의 특징도 가미되어 있다. 태권도에는 공수도의 공(空)과 발(足)과 ‘평화’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우리는 남의 무술을 통하는 우여곡절의 우회로를 거쳐서 드디어 전통무술에 다가가는 기회를 찾은 셈이다. 여기엔 우리 무예나 권법의 무의식적 부활이 있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 무예인 공수도에서 출발하였지만 그것을 빌미로 서서히 ‘손 중심’에서 ‘발 중심’의 무예를 창안해 갔던 것이다. 이것을 무의식적 부활, 땅의 부활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여기엔 한국문화의 ‘모성적 특성’도 자리하고 있다.

태권도는 전통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외래문화와 자생문화가 만나 창조적으로 발전한 좋은 사례이다. 태권도의 자부심은 바로 창조적 발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태권도의 현안은 현재에 가장 필요한 종목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놓치면 심한 경우에는 세계인으로 버림받을 수도 있다. 한때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던 종목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경우도 드물지 않다. 기술 발전과 시대정신에의 적응에 실패한다면 태권도라고 사라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한국의 태권도가 세계적인 태권도로 거듭나기까지 태권도 영웅들은 적지 않다. 여기엔 훌륭한 무예가도 필요하고, 국제스포츠 외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인물도 있었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로 올라간 한국의 국력의 뒷받침이 있었다.

김운용 등 스포츠 외교도 한몫

태권도를 미국 주류사회에 정착시키고 기술향상에 이바지한 이준구(李俊九)를 비롯해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김운용(金雲龍) 등 스포츠 외교가의 공적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는 1970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승인종목으로 채택된 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 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13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다.

태권도를 통해서 종주국의 국어인 한글이 부분적으로나마 세계화되고 여러 인종, 여러 문화에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경제개발의 성과만큼이나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태권도는 단순한 스포츠나 무예가 아니다. 한국의 정신이 응결되어 있는 문무(文武) 문화의 결집이고, 앞으로도 한국문화의 선두에서 한국의 국가브랜드 이미지의 선봉에 서 있을 것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일본은 가라테를 태권도보다 먼저 세계에 보급하였지만 그것을 올림픽 종목에 넣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는 가라테가 일본에서는 상류층에서 즐기는 종목이 아니라 하류층에서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천시하였던 탓도 있다. 일본의 국기는 어디까지나 검도이고 유도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권도를 밀어내고 가라테를, 중국은 우슈를 올림픽 종목에 진출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태권도인의 단합과 창진적 발전이 기대된다.

태권도는 초기에도 그랬듯이 항상 현재와 전통을 융합한다. 그 이름이 당수에서 시작되었든, 수박이나 각희에서 시작되었든 상관없다. 태권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성이기 때문이다. 태권도는 끝없이 생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한국 무예의 대명사이고 세계적으로 보급된 한국무예라고 할지라도 진화하지 않으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혹자는 이종격투기 대회에서 태권도 출신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들어 무예 중에도 약한 무예라고 하지만 그것은 망발이다. 태권도는 격투기가 아닐 따름이다. 태권도는 무예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정신이다. 태권도가 한국의 문화의 총체성을 대표하는 지위를 누리고 있고 앞으로도 누려도 좋은 것은 그것에 한국의 말과 한국의 정신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태권도는 이제 김치나 된장과 같은 것이 되었다.

현재 한국의 무예 인구는 줄잡아 600만∼700만명에 이른다. 역시 국기인 태권도가 500만∼600만명으로 대종을 차지한다. 나머지 종목은 모두 100만명 정도이다. 단체의 수를 보면 단일종목으로는 검도가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합기도, 경호, 태껸, 기타의 순이었다. 태권도는 대한태권도협회로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단체는 줄어들었다. 태권도인의 단결이 더욱 요청된다. 만약 일본의 가라테나 중국의 우슈가 올림픽 종목에 들어가기 위해 태권도를 밀어내는 공작을 벌인다면 단호히 여기에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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