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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의 세계오지기행]안나푸르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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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5-02 10:38:37 수정 : 2008-05-02 10: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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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여신, 붉은 꽃잎치마를 두르다
◇네팔 국화인 랄리구라스와 다울라기리 연봉.
히말라야에 봄이 오면 안나푸르나 여신은 붉은 꽃잎치마로 갈아입는다고 하였다. 히말라야의 봄을 만나러 네팔로 길을 떠났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푼힐(Poonhill·3193m)전망대는 다울라기리 연봉을 비롯해 안나푸르나 남쪽 봉우리, 네팔 사람들이 신성시해 등정할 수 없는 마차푸차레 봉우리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나야풀에서 시작된 산행은 힐레(해발 1475m)라는 산자락에서 첫 밤을 쉬어 간다. 산자락으로 질곡 같은 이곳 사람들의 삶을 연상시키는 계단 논들이 펼쳐져 있다. 골이 깊어 하늘이 좁은 이곳은 계곡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마을의 불빛들이 별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잔등이 벗겨진 당나귀들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여물을 먹고 있다.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른 셀파족 여자는 짐을 부리고 창가에 걸터앉아 뜨개질을 하며 노래를 부른다.

‘레섬 피리리 레섬 피리리’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랫소리가 달빛에 실려 계곡으로 스며든다. 안나푸르나의 첫날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트레킹 이틀째, 끝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산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눈에 보이는 건 말과 당나귀의 배설물. 들리는 건 짐을 실은 당나귀들의 방울소리와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지난밤 묵었던 마을이 발아래 작은 점으로 보일 때쯤, 동쪽 산위로 안나푸르나의 남봉이 고개를 내밀었다. 만년설을 보자 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셀파족

점심을 먹고 오후가 지나서야 비로소 숲길로 접어들었다. ‘랄리구라스’라는 처음 보는 나무들의 군락지였다. 나무에는 동백 같기도, 철쭉 같기도 한 붉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이 네팔 국화라고 하였다. 산을 오른다는 느낌보다 숲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었다. 고도계가 해발 2400m를 넘어서고 있었다. 산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고도가 조금씩 높아질수록 랄리구라스 꽃들이 만발하였다. 이 나무는 고원지대에서 자생하는 수종이란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꽃의 유혹에 이끌려 힘든 줄도 모르고 산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침 8시에 출발했는데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고라파니(Ghorepani·해발2750m)라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좀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었지만 아름다운 꽃과 숲의 유혹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많이 늦어졌다.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이라는 뜻의 고라파니. 이곳은 푼힐 전망대 바로 아래에 자리하는 마을이다. 깊은 산속에 이렇게 규모가 큰 마을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선물가게와 숙소들이 줄지어 있고 숙소마다 여행자로 넘쳐나고 있었다. 가게에 진열된 상품이며 먹을거리들은 모두 말이나 당나귀,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이곳까지 운반된 것들이다. 벗겨진 당나귀의 등짝과 목이 꺾이도록 짐을 지고 오던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진열장에 오버랩되고 있다.

설산들은 구름에 숨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밤사이 날이 개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숙소 커튼 사이로 새벽 달빛이 비쳐들고 있다. 만월이다. 문을 열고 밖을 나오자 거대한 설산이 달빛 아래 우뚝 솟아 있다.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다. 만월인 이 밤, 하얗게 빛나는 히말라야 설산 앞에서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 생애, 잊지 못할 풍경 하나를 안나푸르나 여신은 달빛을 통해 그렇게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푼힐 전망대로 오르는 새벽 산길이 부산하다. 달은 서쪽으로 기울었고 마차푸차레 쪽 하늘은 아침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전망대 바로 못 미쳐 오른쪽 숲길로 나는 길을 잡았다.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장소에서 나만의 일출을 맞고 싶었다.

광활한 랄리구라스 군락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달빛 아래 순결한 모습에서부터 푸른 새벽의 신비로움까지, 안나푸르나는 다양한 얼굴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다울라기리 봉우리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한 아침 태양이 서서히 안나푸르나 여신의 저고리를 붉은색으로 갈아입힌다. 마차푸차레 봉우리까지 올라 온 태양이 랄리구라스 군락지를 비추자 수많은 붉은 꽃송이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랄리구라스 꽃잎들은 안나푸르나 여신의 치마폭을 수놓으며 히말라야 봄의 아침을 뽐내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봄의 제전이 시작되었다.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길,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였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환하게 웃으며 서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당신 안의 신께 경배를….”

고라파니에서 타다파니(Tadapani·2630m)로 이어지는 길은 이번 트레킹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고라파니 동쪽 고갯길에 올라서자 아침에 올랐던 푼힐 전망대가 바라보인다. 이곳은 푼힐 쪽보다 조망이 더 뛰어나다. 다울라기리 봉우리는 거대한 새처럼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고 안나푸르나 남봉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왔다.

길잡이 ‘루션’이 랄리구라스 꽃을 따서 내 모자에 꽂아 준다. 이곳 사람들은 이 꽃을 먹는다고 하였다. 꽃송이를 손바닥에 거꾸로 대자 꽃송이에서 물이 떨어진다. 물을 마셔보니 아주 달콤하였다. 참꽃 한아름 꺾어 꽃잎 따 먹던 유년의 시간이 엊그제였는데…. 만년설과 꽃길, 그리고 유년의 시간들, 이곳이야말로 꿈결 같은 꽃길이다. 나는 갈 길도 잊은 채 천상고원의 풍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여행작가

≫여행정보

로얄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가장 짧은 시간에 푼힐 전망대를 다녀 올 수 있는 트레킹 코스다. 한국의 여러 여행사에서 7박8일 일정의 상품을 팔고 있다.

개인적으로 찾아도 쉽게 트레킹이 가능한 코스다. 목요일에 출발하는 대한항공 직항편으로 카트만두까지 간 후 그곳에서 포카라를 거쳐 갈 수 있다. 트레킹은 연중 언제든 가능하나, 우기인 여름철은 피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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