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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의 성城, 그림자왕의 이름으로 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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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성'


피곤한 이방인이 오다

늦은 밤, 눈에 파묻힌 마을에 한 남자가 도착했다. 토지측량사 K였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깊은 어둠 속 다리의 목책 위에 웅크리고 앉아 한동안 이방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마치 끝없이 긴 여행을 하고 있는 방랑자처럼 몹시 피로해 보였다. 나는 검은 날개를 파닥이며 K에게 물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왔지?”

그러자 K는 갈라지고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백작님의 부름을 받고 온 토지측량사야.”

“측량사? 베스트베스트 백작님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

“그래, 까마귀야. 우선 잠잘 곳이 필요한데 어디로 가야 할까? 지금 난 굉장히 피곤하단다.”

나는 곧장 솟구쳐 올라 여관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K는 그날 밤, 카프카의 영혼에 사로잡혀 한 마리 까마귀가 된 나와 함께 마을로 들어갔다. 여관에는 빈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K는 여관 주인이 마련해준 짚 매트리스에 누워 새우잠을 청해야 했다.

K는 자다가 깨어 부득이하게 성주의 숙박 허가증이 없다는 이유로 신분 조회를 받게 되었다. 성과의 통화로 신분이 확인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K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뭔지 모를 야릇한 분위기로 인해 K의 마음은 무거웠다. 다음날 K는 맑은 겨울 아침의 공기 속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멀리 산 위로 선명하게 성의 윤곽이 보였다. 돌로 지은 나지막한 건물들로 이어진 성의 규모는 짐작했던 것보다 소박하고 단조로웠다. 건물에 딸린 탑 위로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빙빙 맴을 돌고 있었다. 성을 향해 걷던 중 K는 헛간 같은 낡은 건물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나오는 선생을 만났다. K는 스스럼없이 다가가 선생에게 성의 백작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선생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그들이 가파른 비탈길 아래로 사라지자 K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될 때마다 피로함이 더해졌다. K는 길게 뻗은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K의 머리 위로 낮게 활공하며 그의 그림자를 쫓았다.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 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판화_정길재]


 
미로 같은 마을과 이상한 사람들

가도 가도 작은 집들과 얼어붙은 유리창뿐이다. 급기야 수북이 쌓인 눈 속에 발이 빠져 걷기 어려울 지경이 되자 K는 걸음을 멈췄다.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농가로 들어가야 했다. 

실내는 수증기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각기 빨래를 하거나 목욕을 하는 중이었다. 그곳은 라제만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이었다. 그러나 K는 신분상의 이유로 손님을 맞을 수 없다는 설명을 듣고 무두장이의 집에서 쫓겨났다. 

얼마 후 고맙게도 한 집에서 나온 남자가 K에게 다가오더니 목적지까지 자신의 썰매를 태워주겠다고 제안했다. 알고 보니 그는 미심쩍은 이방인을 자신의 집 앞에서 쫓아내기 위해 일부러 친절함을 가장했던 것이었다. 

멀리 성으로부터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K는 느릿느릿 달리는 썰매를 타고 마부 게어슈테커와 함께 눈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좀체 성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길이 바뀌자 K는 마부가 자신을 데려온 곳이 성이 아닌 여관이었음을 깨달았다. 거기다 두어 시간이면 될 거리를 종일 걸려 해거름에야 도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해가 짧아, 해가 짧아졌어!”

K는 중얼거리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의 문 앞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아르투르와 예레미아스로 K의 일을 돕기 위해 성에서 파견된 조수들이었다. 마치 두 마리의 뱀처럼 서로를 꼭 닮은 이들은 K에게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다면서 곧장 성에 전화를 걸어 본 후 입장이 거절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K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급기야 직접 전화를 건 K는 역시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말만 거듭 확인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때 바르바나스라는 한 남자가 K에게 성의 사무국장 클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전해 준다. 거기에는 K가 성의 영주에게 정식으로 채용되었으며 근무조건과 보수에 대해서는 직속상관인 마을 촌장이 알려줄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K는 편지배달부인 바르바나스를 따라 직접 성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그를 따르기로 했다.

 

도마뱀과 독수리

그러나 야속하게도 바르바나스는 성이 아니라 곧장 자기 집으로 귀가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K는 바르바나스의 누이인 올가로부터 성의 관리인 클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클람이 전용으로 이용하는 ‘헤렌호프’라는 이름의 여관에 대해서도.

올가와 함께 헤렌호프에 온 K는 주점에서 클람의 애인이라는 여급 프리다를 만났다. 그녀는 왜소한 몸집에 야윈 뺨을 가진 금발의 아가씨였다. 프리다는 주점 한구석에 뚫린 엿보는 구멍을 통해 클람의 모습을 훔쳐볼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 구멍을 통해 본 클람은 중키에 뚱뚱하고 몸이 비대해 보이는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프리다는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K를 예전에 자기가 일했던 한 여관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K는 프리다와 사랑을 나누며 낮과 밤을 꼬박 침대에서 보냈다.

K가 마을에 머문 지 나흘째가 되는 아침이었다. K는 프리다에게 청혼했다. 그리고 프리다가 ‘엄마’라고 부르는 여관의 여주인에게 두 사람의 결혼 계획을 밝혔다. 여주인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경악하며 프리다에게 K와 결혼함으로써 ‘클람의 애인’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잃게 될 것에 대해 경고했다. 심지어는 도마뱀과 연을 맺기 위해 독수리를 버렸다고까지 말하며 그들의 결혼이 가져올 심각한 파장에 대해 우려했다. 그러나 K는 여주인의 모든 부탁과 충고의 말들이 실은 자신과 프리다를 위한 것이 아닌 클람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잃어버린 길

촌장은 K가 클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고 난 뒤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 대한 자초지종을 고백했다.

“사건의 전말을 솔직히 이야기하지요. 오래전에 내가 촌장이 된 지 두 달밖에 안 됐을 때 공문이 내려왔어요.”

성에서 온 공문의 내용은 측량사 초빙에 관한 것이었다. 요컨대 측량사를 임명해 보낼 예정이니 마을은 그가 일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면과 기록을 준비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몇 해 전의 일로써 더 이상 마을은 측량사를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다고 했다. K가 마을에 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담당부서의 행정 착오 탓이었다. 당시의 공문서가 철회되지 않아 생긴 해프닝이라고 설명했다.

“대개 그렇듯 서류가 제대로 가면 늦어도 하루 만에 해당 부서에 들어가 당일 일이 처리되지요. 하지만 길이 한번 어긋나게 되면, 아무리 조직체계가 잘 잡혀 있어도, 계속 엉뚱한 길로 돌아다니다가, 보통은 길을 잃게 되지요.”

뿐만 아니라 K가 성 관리인 클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도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정식 공문이 아니며 눈속임에 불과한 사신(私信)이 틀림없다고 했다. K는 성과 마을이 공모하여 자신을 내쫓으려는 게 분명하다고 말하며 앞으로 자신은 지금까지 치른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이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권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보이지 않는 왕

힘없이 여관으로 돌아온 K는 여주인으로부터 놀라운 고백을 듣게 된다. 20년 전 여주인 또한 프리다와 마찬가지로 클람의 연인이었다는 것이다. 여주인은 그 증거로 K에게 클람으로부터 받은 세 가지 기념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숄과 나이트캡과 당시 두 사람 사이를 왕래하며 심부름을 했던 소년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다. 

여주인은 자신이 K에게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타지 사람인 K를 위해서 몇 가지 당부와 제안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앞으로 클람의 이름을 함부로 호명하지 말 것이며, 클람을 만나기 전에 K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면 자신이 나서서 두 사람의 만남을 적극 주선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K는 여러모로 미심쩍은 여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딱 잘라 거절했다.

K가 프리다와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퍼져나갔다. 촌장은 학교 선생을 설득해 K에게 학교의 임시 관리인 자리를 맡기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앞으로 K가 취하게 될 돌발행동에 대한 예방책이었다.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K는 한 달간 봉급이 없는 수습 관리인 생활을 시작한다. 자신의 처지가 순식간에 학교의 잡역부인 급사로 전락하자 K는 어떻게든 성 관리인 클람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헤렌호프 여관에 간 K는 클람의 썰매 앞에서 오랫동안 그를 기다리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다. 클람은 K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독수리처럼.


그가 있는 먼 곳, 난공불락의 거처, 울부짖는 소리에 의해서만 중단시킬 수 있는 침묵, 증명도 반박도 할 수 없는 내리훑는 듯한 시선, 낮은 곳에서는 도저히 쳐부술 수 없는 그의 세력권…….



모든 것은 피로 때문에

학교에서의 생활은 짐작했던 것보다 더 궁색하고 초라했다. 두 조수까지 함께 생활을 해야 했으므로 프리다와의 관계도 사사건건 어긋나고 매번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 K의 피로감을 가중시켰다. 성의 연락책인 바르바나스에게 편지를 부탁한 K는 회신이 없자 궁금한 마음에 그의 집을 방문한다. 

거기서 K는 늙은 부모와 함께 집을 지키는 둘째 딸, 아말리아로부터 우연히 지난날의 이야기를 듣는다. 성 관리의 구애편지를 찢어버린 대가로 그들의 가족이 겪게 된 고립과 차별대우, 지위를 박탈당한 아버지의 억울한 사연까지. 아말리아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진실을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 K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편 프리다는 K가 오래전부터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믿는 연적, 아말리아의 집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조수인 예레미아스와 함께 과거의 생활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K에게 자기들은 원래부터 잘 알고 지내던 어릴 적 친구 관계로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K는 어떻게든 프리다의 오해를 풀어주고 마음을 돌려보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는다.

클람의 수석비서인 에어랑어를 만나기 위해 여관의 복도를 헤매던 K는 방을 잘못 들어와 또 다른 비서인 뷔르겔과 마주친다. 뷔르겔은 K의 전후 사정을 듣고 난 후 그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지만 K는 이제 모든 일에 지쳐 더 이상의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다. K는 몰려드는 피로에 무너지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후 누군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깨어난 K는 다시 에어랑어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간다. 아침 5시경 K는 복도에서 하인들이 서류를 방으로 배달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매끄럽지 않게 진행되는 서류 배달과 목록이 맞지 않아 생긴 다툼, 닫힌 문 앞에 쌓이는 서류 다발과 암암리에 하인들에 의해 찢기는 쪽지를 보며 K는 그것이 어쩌면 성으로부터 자신에게 온 회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관 주인 부부는 복도에 관계자가 아닌 낯선 사람이 서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와 K를 끌어내 술집으로 데려갔다. K는 술통 위에 몸을 기대고 자신을 향해 윽박지르는 여주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K가 잠들었다. 
나 또한 밀려드는 피로감에 나락 같은 잠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1924년, 오직 친구들만이 인정해 주었던 유대계 글쟁이, 카프카는 견고하고 높은 ‘성’의 문턱 앞에 홀로 잠든 K를 남겨둔 채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K는 오늘의 화근이 형편의 불리함보다는 피곤함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왜 하필 이곳에서 피곤함을 느끼게 되었을까? 아무도 피곤해 하지 않는 이곳에서…….

작가와 작품 소개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계 고등학교를 거쳐 프라하 대학에 진학해 법률을 공부했고, 1906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생애 대부분을 국영 보험회사에서 일하며 보냈다. 완고한 아버지 및 몇몇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정서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1912년에 ‘실종자’(후에 ‘아메리카’로 개제), ‘변신’을 쓰기 시작했고, 1914년에는 ‘유형지에서’와 ‘심판’ 집필에 들어갔다.
1916년에는 단편집 ‘시골 의사’를 탈고했다. 1917년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여러 곳으로 정양을 다니게 되고, 1922년에 ‘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카프카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불안을 깊이 통찰한 문학 세계를 펼쳐 보였으며, 이 때문에 사르트르와 카뮈는 그를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했다.

 옮긴이 홍성광은 서울대학교 인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형이상학적 성격’, ‘하이네 시의 이로니 연구’, ‘토마스 만과 하이네 비교 연구’, ‘토마스 만의 괴테 수용’, ‘토마스 만과 김승옥 비교 연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미카엘 엔데의 ‘마법의 술’, 하이네의 ‘독일, 겨울 동화’, 프리더 라욱스만의 ‘철학의 정원’,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등이 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성>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성’은 20세기 문학의 최고봉 카프카의 ‘파우스트’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언과 종교적인 측면에서 단테의 작품에 비유되었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실존주의로 해석되었으며, 기법상 비유의 차원에서는 특이하고 완벽한 상징법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카프카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작품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아울러 20세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카프카는 ‘성’에서 개인의 삶 자체가 정치임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역사와 세계에서 고립된 개인의 실존적 고통을 그리고 있다. 카프카는 ‘성’을 1922년에 쓰기 시작했고,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3대 걸작 소설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은 매혹적인 결말과 예술성으로 가장 완성도 높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K에게

 

불가사의한 영혼을 지닌 K, 당신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봐야 했으니까요. 당신이 간 곳이 이 길인지 아니면 저 길이었는지 무척 혼돈스러웠지요. 갈림길에 서서 나는 매번 고민했습니다. 실타래처럼 얽힌 길찾기 퍼즐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너무 복잡해서 끝내 포기해버리고 말 고난이도의 게임. 내게는 K, 당신 하나만을 찾아가는 길도 그렇게 암담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 또한 게임의 복판 어딘가에서 분명 헤매고 있었습니다. 성과 성의 종루가 보이는 곳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지며 환희와 절망, 양극의 감정을 번갈아가며 느끼고 있었지요. 선명하게 보이는 성과, 차가운 대기 속으로 울려 퍼지던 종소리는 잠시나마 당신에게 안도감과 기쁨, 희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것들이 준 확신은 서서히 희미해져갔습니다. 성은 안개에 휩싸여 실종돼 버리고 종소리는 꽁꽁 얼어붙은 창공의 벽에 갇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K, 당신은 참을 수 없는 피곤함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누군가의 팔에 의지해 이끌려서라도 반드시 가야 할 길이었으니까요. 성 관리인은 독수리처럼 높은 거처에 머물고 있었지만 당신은 그를 만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런 당신을 보며 나또한 피로가 눈처럼 쌓여 어느새 발을 뺄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지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 운명, 그 냉엄한 현실과 싸워야 했던 당신, K.
끝내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당신은, 마지막으로 불쌍한 페피에게 물었습니다. 

"봄이 되려면 얼마나 남았지?"

페피는 대답했지요.

"이곳의 겨울은 길어요. 정말 길고 단조로운 겨울이지요. 하지만 아래층에 있는 우리는 그 점을 불평하지 않아요...... 아무튼 언젠가는 봄이 오고 여름도 오니, 때가 되면 계절이 다시 찾아오게 마련이지요."

당신은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미 다시 찾아올 봄을 기대하지 않았지요. 당신은 성으로 가는 길도, 운명과의 줄다리기도 모두 포기했습니다. 모든 끈과, 희망 그리고 기다림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K, 당신은 홀연 이 세계의 퍼즐 바깥으로 나가버렸지요.
아직 찾지 못한 길을 그대로 남겨둔 채 말입니다.

나는 당신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겁니다. 
내게 있어 당신은 끝나지 않는 밤, 깨어나지 못할 악몽이 되었으니까요.

당신의 말대로 당신의 책은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내 머리를 친 일격으로 남아 기억될 것입니다. 
재앙과 같은 책, 어떤 사람의 죽음처럼, 
자살처럼 나를 비탄에 젖게 하는 책,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끔찍하고 잔인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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