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오페라단 '토스카' 주역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파타네, 소프라노 한예진, 베이스 바리톤 박태환, 테너 이정원 |
사실, 무대 밖에서 본 박태환의 얼굴에선 악인 스카르피아의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는다. 흔히 외국 가수들이 지니기 마련인 엄청난 풍채의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자 180도 변신한 성악가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이 내리고 ‘거대한 존재감을 지닌 성악가’가 탄생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스카르피아가 토스카를 협박하고 종용하는 2막의 흥미진진한 40분은 몰입을 향한 절정의 레이스였다. 1막의 목소리가 다소 트이지 않아 우려했던 것도 잠시, 장엄한 테데움 장면에 이어 2막의 파르네제 궁정 안의 스카르피아 방 장면에서는 무대를 완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었다. 박태환의 강력한 에너지는 그렇게 ‘토스카’의 비극성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
흔히, 스카르피아를 연기하는 가수들이 과격한 포즈로 화를 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에 그쳤다면 이번 젊은 스카르피아는 냉정하면서도 악한 캐릭터에 보다 설득력을 실었다. 금색 숄더로 상대와 실랑이를 벌이거나 쇼파에 토스카를 밀어붙인 뒤 겁을 줬으며, 치밀하게 계산된 동선으로 토스카에게 한 걸음 한걸음 다가가 토스카를 종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카바로도시의 고문소리를 듣고 비열하게 웃는 표정까지 관객들의 눈과 귀가 절대 게으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오페라 보는 재미를 배가시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날 박태환은 무대에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최악의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관객과의 약속을 져버리지 않은 채 뜨거운 무대를 보여 준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랜드 오페라단 '토스카' 싸인회 현장, 베이스 바리톤 박태환이 관객과 사진을 찍고 있다. |
목동 역시 발코니 석에서 출현했으며, 3막의 카바로도시 총살 장면 역시 보다 많은 총소리로 역동성을 부여했다. 단 성당이 수직상승 하기 전 서양화가 박보순 화백의 작품이 걸린 세트가 부산스럽게 움직여 소음을 발생시킨 점, ‘별은 빛나건만’의 아리아가 나오는 무대의 조명이 너무 어두운 점은 옥에 티였다.
카바로도시역 테너 이정원은 1막에서 토스카와 함께 부르는 2중창과 3막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에서 매끄러운 고음을 선보였다. 특히, 2막 보나파르트의 승전 소식을 듣고 내 뿜는 ‘빅토리아’ 고음은 일품이었다. 주역 소프라노 한예진은 2막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불러 관객에게서 폭풍 같은 갈채를 이끌어냈다.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파타네는 보다 압도적인 성량으로 푸치니의 음악적 전율과 희열을 객석을 전달했다.
작은 역할이지만 관객의 귀에 확실히 존재감을 아로새긴 가수는 간수 역 베이스 김용이었다. 억지스런 무게감 있는 발성이 아닌 명료하게 저음을 넘나드는 목소리가 일품이었다. 성당지기 역 바리톤 윤기훈의 희극적인 움직임과 안정감 있는 목소리, 스폴레타 역 테너 권순태, 이현호의 맑은 음성도 인상적이다. 다만 권순태와 이현호의 연기 색깔이 전혀 다른 점이 확연히 드러난 점은 아쉽다.
마르코 발데리가 지휘한 인씨엠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후반으로 갈수록 보다 밀도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미성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려 준 목동 역 이유진· 전성훈, 마에스타 합창단(지휘 김주완), 강남논현남성합창단(지휘 장재영),예원학교소년소녀합창단(지도 임은주)이 힘을 실었다.
그랜드 오페라단의 ‘토스카’는 총 3회 공연 중 둘째날만 공지된 캐스팅대로 진행됐다. 첫날과 마지막 날은 원래 공지한 테너(마우리지오 살타린)가 무대에 서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테너 이정원과 엄성화가 카바로도시 역으로 무대에 섰다. 서울 공연 이후 오는 6월 2일 부산 벡스코(BEXCO) 오디토리움에서도 한 차례 더 ‘토스카’를 만날 수 있다.
한편, 예술의 전당 모철민 사장도 관람하는 열의를 보인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은 현재 서울 오페라단의 ‘라트라비아타’, 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 갈라’를 남겨놓고 있다.
공연칼럼니스트 정다훈(ekgns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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