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졌다. 몸과 마음이 가볍고 맑아졌다. 문제는 날씨다. 봄이 왔다고 생각하자, 시샘이라도 하는 듯 전국의 날씨는 ‘흐림’이다. 맑은 기운 받고 와야겠다. 추천받은 곳은 경북 청도(淸道). 이름 자체가 맑은 기운 가득한 고장이다. 풀이해 보니, 맑은 청(淸)과 길(道)이다. 청도 여러 지역의 들판을 메운 푸른 미나리는 ‘청(靑)’의 다른 뜻과 어울린다. 맑은 고장이 봄에는 푸름, 가을에는 붉음을 자랑하는 듯하다. 씨 없는 단감과 대봉시가 가을 청도의 자랑이니 말이다. 청홍(靑紅)의 색감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곳도 드물지 싶다. 청도는 소싸움과 달집태우기로 유명하고,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3월에는 ‘청도 소싸움’도 예정돼 있어 찾는 재미가 배가된다. 싸움을 준비하는 소들을 만나기 전에 청도 곳곳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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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때 세워진 청도 운문사의 말사인 북대암에 봄이 찾아왔다. 하늘 향해 치솟은 암벽 아래 운문사 주위를 나는 새들은 청아한 소리를 빚어내고, 계곡물은 맑은 소리를 내며 저만치 달아난다. |
다른 사찰과 달리 운문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신 솔 향기 짙은 푸른 소나무가 바깥 세상에서 온 이들을 맞이한다. 소나무들은 꽤 키가 크다. 줄을 맞춘 듯 정렬돼 있다.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의 머리만큼이나 정갈하다. 산문을 들어서는 이의 마음도 정결해진다. 운문사가 창건된 때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시절. 진평왕 30년(608년)에 원광 국사가 중창했다. 국사 시간이면 등장했던 세속5계를 화랑에게 알려준 국사다. 신라 시절 젊은 낭도들의 터전이었던 이곳이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자리 잡은 때는 1958년. 승가대학은 1987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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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 입구는 삼림욕장 만큼이나 공기가 맑다. |
운문사에서 겸양의 미덕을 충전한 뒤, 말사인 북대암에 올랐다. 운문사에 비해서는 꽤 가파르다. 북대암은 암벽 기슭에 자리했다. 북대암 마당에서 운문사 전경을 바라본다. 운문사에서는 몰랐는데, 이곳에서 보니 동양 최대의 비구니 사찰도 그리 크지 않다. 의미를 찾고자 여기저기 살펴본다. 밋밋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숲 속에서도 겨울이 밀려간 듯하다. 잔설마저 몰아낸 산과, 산이 만들어낸 공간에 자리한 운문사에 초록 빛깔이 번져간다. 북대암 입구에서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북대암 마당의 높은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까치 소리가 들린다. 맑은 교향곡이 따로 없다.
비구니들의 도량을 벗어나 찾은 곳은 청도의 고택들. 금천면 임당리의 김씨고택은 내시가 살았던 집이다. 그래서 ‘내시 고택’으로도 불린다. 그 사연이 있다. 내시들로만 가계는 16대까지 이어졌다. 1592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거세된 자들’에게 가계와 가문이 있었다니, 믿기 어려울 수 있다. 답은 바로 입양이다. 내시 집안에 입양시키는 친부모가 많지 않을 듯싶지만, 갖가지 사연으로 입양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가계의 마지막 내시였던 이는 통정대부 정3품 벼슬을 지낸 김일준(1863∼1945). 그가 낙향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어떻게 알려지게 됐을까. 가계의 흐름을 알려주는 가세도(家世圖)를 통해서다. 가세도가 발견된 때는 1980년. 가계를 알려주는 직함과 이름, 산소의 위치가 기록돼 있었다. 족보가 보통 세로의 종적인 기록이지만, 이 가세도는 횡적인 기록이 다수였다. 가로는 A4 4장을 이어놓은 분량이었지만, 세로는 7㎝밖에 안 됐다. 입양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가세도는 입향시조가 정착해 15대까지 양자를 들여 이어온 내력이 담겨 있다. 김일준은 16대이며, 양아들인 17대에 이르러서는 갑오경장으로 내시제가 없어졌다. 18대부터는 정상적인 부자관계로 가계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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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소싸움 축제의 결전을 며칠 앞두고 있지만, 우승 경험을 가진 ‘아만세’ 는 여유만만하다. |
청도=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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